114. 충동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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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충동적으로
2022.12.02.
데미안은 녹스를 회유하지 못했고, 되려 손을 잡고 북쪽 숲에서 도망쳤다. 그야말로 처참한 결과였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데미안과 녹스가 나눴던 대화를 라크하에게 말해주었다.
모든 걸 알게 된 라크하는 틀어진 계획에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제 남은 선택지가 얼마 없어서 그런 거겠지.’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온 이후로 라크하는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바빠졌다.
반면, 나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가해졌다. 라크하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을 남긴 탓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해서라도 편히 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레이나의 편지까지 도착해 내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데미안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니…….”
데미안이 배신을 했다는 소식을 전할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깊은 한숨을 뱉으며 딱딱한 테이블에 한쪽 얼굴을 댄 나는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고요했다.
속이 트이는 맑은 하늘이었으나, 나에겐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 녹스가 데미안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제르디아 황가가 이룬 모든 걸 빼앗으면 그만이지.
그건 황실을 습격할 거라는 말이 아닌가? 녹스가 한 말을 되새겨볼수록 이상하게도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원작의 후반부에 황실을 습격했다는 내용이 있었지.”
원작에서 데미안과 녹스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대충 읽어서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데미안이 녹스를 소환한 건 몇 년 전이었다. 즉, 원작 내용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건데.
이미 소환된 녹스가 원작 속에서 갑자기 사라졌을 리는 없었다. 녹스는 키네스의 신력이나, 시전자의 죽음으로만 없앨 수 있으니까.
마침 원작에서도 키네스는 마물 떼를 끌고 온 라크하를 처리하다가 신력을 쓰고 쓰러지기도 했었고.
‘그러면서 녹스가 사라진 거라면 정황상 들어맞긴 해.’
다만, 원작에서 황실의 습격한 주동자가 라크하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녹스는 언제 라크하의 몸에 들어간 거지……?”
앞으로 녹스가 라크하의 몸에 들어갈 일이 생긴다는 건가? 아니, 이미 데미안과 손을 잡고 떠났으니 그럴 일은 없어진 걸지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끙끙 고민하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크하와 대화를 해 봐야겠어.”
녹스가 마물 떼를 끌고 오는 거라면, 분명 징조가 있을 것이다.
혼자서 생각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곧장 라크하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정작 집무실에서 나온 사람은 시롬이었다. 시롬은 나를 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말입니다.”
“혹시…… 저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나요?”
“예?”
시롬의 얼떨떨한 얼굴을 보고 나는 뒤늦게 내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내가 라크하의 연인이라고 해도, 지킬 건 지켜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못 들은 걸로 해요.”
나는 허둥지둥거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멍청한 메이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으면, 당연히 나도 포함된 걸 텐데 뭘 묻는 거야!’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얼굴에 마구 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조금 뒤 한바탕 부끄러운 감정이 지나가고 나니 어쩐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가끔 찾아가면 라크하는 일을 미뤄두고 나를 최우선으로 여기곤 했었는데…….
“……많이 바쁜 건가.”
오늘 밤에는 라크하가 내 방을 찾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잠을 안 자고 버텨 봐야겠다.
녹스와 관련된 얘기와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까지 바쁜 건지 물어보기 위해서라도.
***
문 너머로 들려오는 메이아의 목소리에 라크하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순간, 메이아를 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라크하는 가까스로 인내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개중 메이아가 들으면 온종일 걱정할 일도 있었고,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뒤 그녀에게 알리고 싶은 일도 있었다.
라크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책상 위로 올려둔 편지 봉투로 향했다. 황제의 직인이 찍혀 있는 봉투였다.
“다시 보고를 이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업무 책상 위로 긴 지도를 펼친 파트라슈가 라크하를 향해 물었다.
막 수색 임무를 마치고 온 파트라슈의 보고를 듣고 있던 참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황궁에서 온 편지를 받은 이후로 조금만 집중력이 깨지면 신경이 다른 곳으로 새는 탓이었다.
라크하는 편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지도를 바라보았다.
“계속해.”
“데미안과 녹스의 흔적은 여기서 끊겼습니다.”
파트라슈가 지도에 미리 표시해 둔 위치를 짚었다. 라크하는 파트라슈가 짚은 위치를 살펴보다 특이점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파트라슈가 표시해 둔 위치는 그 외에도 한 곳이 더 있었다.
“스톡 산맥 부근은 왜 표시를 해둔 거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말입니다. 한 번 확인은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따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공작님, 스톡 산맥이라 하면 마물의 성소라고 불리는 곳이 아닙니까?”
옆에서 지도를 확인하던 시롬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라크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롬의 말마따나 스톡 산맥은 마물이 득실거리기로 악명 높아 마물의 성소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기사들이 주기적으로 토벌을 나가는 지역이었다.
가만히 두었다간, 들끓는 마물들이 산맥에서 내려와 마을을 공격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 거지?”
“으음…… 밤마다 마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서 근방 마을 주민들이 매번 두려움에 떨곤 했는데, 요즘은 잠잠하다고 합니다.”
“좋은 소식인 거…… 아닙니까?”
“글쎄, 꼭 그렇다고는 확정 짓지는 못하겠군.”
시롬의 질문에 라크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메이아가 알려준 녹스와 데미안의 대화가 떠오른 탓이었다.
‘제르디아의 황가의 모든 걸 빼앗을 생각이라는 건 황궁을 습격할 거란 말과 다름없지.’
하지만 정녕 데미안과 녹스, 단둘이서 꾸밀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아직 녹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탓에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라크하의 시선이 다시 황제의 직인이 찍힌 봉투로 향했다.
“공작님께서 수색을 허가해주신다면, 기사들을 동원해서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허가한다. 다만, 앞으로는 네 판단에 따라 움직이도록.”
“……예?”
파트라슈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어 라크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책임자의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땐 보고를 먼저 올려 허가를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분명 라크하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한데, 라크하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파트라슈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파트라슈, 당분간 자네에게 지휘권을 위임할 생각이야.”
파트라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면, 라크하는 태연한 얼굴로 황제의 직인이 찍힌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파트라슈에게 내밀었다.
“선대 공작 부부 실종 건으로 어제 황실에서 송달된 소환장이다.”
***
라크하가 방으로 올 때까지 안 자고 버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쌍둥이들에게 붙잡혀 체력을 많이 소비한 탓이었다.
“흐아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하품만 몇 번째더라. 하도 하품을 해댔더니 세기도 힘들었다.
침대 헤드에 기댄 채 책을 읽던 나는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또다시 늘어지게 하품했다.
이러다가 잠들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산책이라도 하고 와야겠어.”
바람이라도 쐬면서 걸으면 잠이 깨겠지.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얇은 잠옷 위로 담요를 걸친 채 복도로 나왔다.
‘회랑 쪽에 있는 정원을 잠시 걷고 올까?’
회랑은 본관과 이어져 있으니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라크하와 길이 엇갈릴 염려도 없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회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회랑으로 나와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
밤바람이 세게 불며 내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담요가 날아갔다.
“앗, 담요가……!”
날아가는 담요를 황급히 잡아채려고 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내 손을 떠나 날아간 담요는 이내 회랑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렸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담요가 걸려 있는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담요는 손을 위로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위치에 걸려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오자마자 웬 봉변이라고 해야 할지…….’
“덕분에 졸음은 깼네.”
초여름이라서 그런 걸까. 담요를 덮고 있을 땐 몰랐는데, 따뜻한 낮과 달리 밤이 되니 쌀쌀했다. 하필 얇은 잠옷을 입고 있는 탓에 더욱 한기가 돌았다.
얼른 담요를 되찾아 돌아가야지.
나는 나무 위로 손을 뻗어 보았다. 담요가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하지만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닿을 것 같으면, 바람이 불어 담요가 휙 더욱 위로 휘날렸다.
이거…… 어쩐지 오기가 생기는데. 후, 하고 긴 숨을 뱉은 나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내가 꼭 되찾아 방으로 돌아가고 만다.”
본격적으로 담요를 잡아채기 위한 준비를 마친 뒤 다시 나무 위로 손을 뻗으려던 그때였다.
등 뒤로 나타난 커다란 손이 내 담요를 손쉽게 잡아챘다.
“감사합니다…… 아?”
내 담요를 꺼내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던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크하?”
담요를 꺼내는 데 집중하느라 라크하가 가까이 온지도 몰랐다. 라크하가 담요를 넓게 펼치더니 내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늦은 밤에 어딜 가려고 한 거야?”
“어딜 가려고 했다기보다는 그냥 산책하러 나온 것뿐이에요.”
“아직 날씨가 쌀쌀한데 그런 차림으로?”
“담요를 덮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은걸요.”
나는 라크하가 덮어준 담요를 잡으며 활짝 웃었다. 걸려 있는 담요를 붙잡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며 몸에 열도 난 참이었다.
하지만 라크하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더니 내게 반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몸을 숙인 라크하가 담요를 잡고 있는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밖에 있으면서 체온이 조금 식긴 한 걸까.
손등 위로 느껴지는 라크하의 손이 따뜻했다.
“줘 봐. 묶어줄게.”
라크하가 담요 끝을 움켜쥐더니 꽁꽁 묶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라크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방금 막 씻고 온 건지 라크하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늦은 밤. 회랑 주변에 핀 꽃들.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에 묻어나는 라크하의 향기.
달빛 아래에서 보는 라크하는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어쩐지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에 취한 기분이 들며 심장이 잘게 떨렸다.
커다란 손으로도 섬세하게 담요 끝을 꽉 묶은 라크하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묘한 기류가 흐르는 시선이 교차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하고 싶은 얘기도 못 할 것 같은 느낌이 든 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붙들었다.
“이, 일단 우리 좀 걸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