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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헛된 희망 (112/136)


112. 헛된 희망
2022.11.25.


라크하가 데미안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펠리르가 있는 짐마차를 찾아갔다.

기사의 말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요청했던 물품을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짐마차를 슬쩍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펠리르 씨, 계세요?”

우당탕! 누워 있던 펠리르가 화들짝 놀라며 허둥지둥 일어났다.


“어, 어…… 아가씨. 어쩐 일이야?”

“전에 제가 부탁했던 물품을 받으러 왔어요.”

“맞다, 그랬었지? 내 정신 좀 봐. 바빠서 잊고 있었네. 들어와 봐.”

“네,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바쁘기는커녕 누가 봐도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펠리르도 요 며칠 많이 피곤했던 거겠지. 나는 모른 척해주며 짐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있어서 그런지 짐마차 내부는 어두웠다.

바스락. 충격 방지를 위해서 깔아둔 지푸라기들이 걸을 때마다 발밑에 밟혔다.

펠리르는 가장 안쪽에 있는 상자를 꺼내오더니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자, 아가씨가 말했던 물품이야.”

상자에는 원통 모양의 신호 조명탄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 들어 있었다.

펠리르와 의논 끝에 폭죽을 조금 응용해본 결과였다.

피치 못하게 라크하와 떨어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도 쓸 수 있으니까.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건 당연지사였다.

이 세계에는 조명탄 같은 게 따로 없어서 곤란했는데, 정말 펠리르가 잘 이해해 만들었을 줄이야. 어쩐지 신기했다.


“아이디어가 괜찮아서 더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기간이 촉박하기도 하고 재료가 부족해서 한 개밖에 못 만들었어.”

“한 개라도 만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주머니를 열어 조명탄을 넣으려고 하는데, 펠리르가 조금 더 빨랐다.


“잘 봐. 간단하게 사용방법을 설명해 줄게.”

조명탄을 들어 올린 펠리르가 뿌듯한 얼굴로 바닥 부분을 보여 주었다. 바닥에는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 문양이 새겨진 쪽의 바닥을 세게 치면 발사되는 방식이야. 휴대성이 좋은 대신 지속 시간이 길진 않아.”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5분에서 길어 봤자 10분 정도? 테스트를 해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아.”

녹스와 만나게 됐을 때 그 정도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다행이었다.

이걸로 펠리르의 설명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펠리르는 그 뒤로도 물 만난 물고기라도 되는 양 열심히 입을 움직였다.

작동 원리부터 시작해서 재료의 성질, 그리고 자신의 고충까지.

도통 끝날 줄 모르는 펠리르의 설명에 정신이 혼미해지던 그때였다.

찌릿. 성물을 낀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무심결에 주머니 속을 바라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밝게 빛나던 마력석의 빛이 사라져 있었다.


“어라?”

나는 눈을 비비며 마력석이 든 주머니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마력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내가 제대로 본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마력석을 살펴보고 있자니 펠리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력석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마력석의 빛이 잠깐 사라져서…….”

펠리르를 바라보며 대답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던 말을 뚝 멈추었다.

잠깐, 펠리르의 가게에 갔던 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않나?

마력석으로 만든 촛불이 꺼졌고, 성물을 낀 약지에서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그날은…….


“……내가 처음 녹스와 마주했던 날이었어.”

그것도 녹스의 본체와 마주했던 날. 지금도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별안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며 긴장으로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쩌면 녹스가 이미 북쪽 숲으로 온 걸지도 몰랐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나는 고개를 돌려 짐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산등 너머로 넘어갔는지 하늘이 남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그런지 주위가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아가씨, 안색이 안 좋아. 왜 그러는 거야?”

“잠시만요.”

펠리르가 내게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녹스가 본체를 드러냈을 때 마력석의 빛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라크하에게 알려야 했다.

나는 서둘러 조명탄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재빨리 짐마차에서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기사들의 급박한 외침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얼른 공작님께 알려야…… 으아악!”

“사, 살려줘!”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검은 형체가 순식간에 두 명의 기사를 덮쳤다.

콰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거에 한차례 본 적이 있는 잔혹한 광경이었다.

녹스다. 기어코 녹스가 나타난 것이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큰 충격에 나는 들고 있던 조명탄을 그대로 떨어트렸다.

바닥에 떨어진 조명탄은 짐마차 안쪽으로 굴러 들어갔다.

나는 입을 막으며 벽에 등을 딱 붙여 몸을 숨겼다. 두려움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어째서…….”

녹스가 기사단들을 학살하고 있는 거야? 분명 데미안이 녹스를 회유해 보겠다고 했잖아.


‘설마…… 실패한 거야?’

그렇다면 라크하는 어디로 간 거지? 온갖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설상가상으로 녹스에게 쫓겼던 기억이 떠오르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가씨, 아가씨! 괜찮아?”

그때 곁으로 다가온 펠리르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펠리르가 보였다.


  


“……펠리르 씨.”

“대체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펠리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금방이라도 마차 밖으로 나가려는 듯한 모습에 나는 황급히 그를 붙잡으며 작게 외쳤다.


“안 돼요!”

조명탄도 없이 나갔다간 녹스에게 영락없이 당하고 말 것이었다.


“녹스, 녹스가 나타났어요.”

“뭐?”

내 입에서 나온 ‘녹스’라는 말에 펠리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런 거라면, 지금은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진 거야?”

펠리르의 말마따나 짐마차 밖이 고요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목격했던 나로서는 이유를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전진 기지에 있던 기사들이 전멸……한 걸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은 이상 이렇게까지 조용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전진 기지에는 기사의 수가 많지 않았다. 데미안을 감시하는 기사들만 남아 있었으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 라크하는 대체 어디로 간 건데? 설마 라크하도…… 당한 건 아니지?”

펠리르가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크하가 당한 게 아니냐는 질문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며 손이 바르르 떨렸다.

기사들이 마지막까지 라크하에게 알려야 한다고 외쳤으니 그가 이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닐 거예요.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지만, 녹스가 나타났다는 걸 알려야 해요.”

이렇게 충격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힘이 풀린 다리에 가까스로 힘을 주고 일어났다.


‘조명탄을 챙겨야 해.’

어디선가 기사들을 공격하고 있을 녹스를 저지하기 위해서든.

혹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라크하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든.

떨어트린 조명탄을 챙기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 집중해야 들릴 법한 말소리였다.


“데미안, 내가 없는 사이에 이 꼴이 뭐야. 기다려 봐. 풀어줄게.”

나는 멈칫하며 펠리르를 돌아보았다. 펠리르도 말소리를 들었는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짐마차에 달린 창문의 커튼을 살짝 걷어 바깥 상황을 바라보았다.

데미안, 그리고 녹스로 추정되는 기사 한 명이 전진 기지에 있었다.


“이제 단둘이서 대화할 맛이 나네. 그치?”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아직 화가 안 풀린 거야? 약속대로 아인티아 공작 부부를 만나게 해준다니까.”

공작 부부를 만나게 해주기로 했던 게 녹스와 데미안의 거래였던 것 같았다.


‘녹스를 회유하겠다고 했던 건 전부 거짓말이었던 거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데미안의 표정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지? 데미안은 무언가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나와 달리 녹스는 마지못한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전에는 내가 장난이 좀 지나쳤어. 한 가지에 꽂히니 그것밖에 안 보이더라고.”

“…….”

“아, 그렇지. 공작 부부한테 걸려 있는 금기의 흑마법을 푸는 방법도 알려줄게. 시전자를 죽이면 돼. 됐지?”

“……그런 방법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어?”

“예전에는 내가 힘이 약했었잖아. 나에게도 패를 남겨놔야지.”

태연하게 답한 녹스가 손을 뻗어 데미안의 어깨를 잡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음……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지금 정도의 힘이면 금기의 흑마법을 쓸 정도의 실력자라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거야.”

녹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정적이 흘렀다.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심장이 철렁 아래로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시전자는 라크하였으니까.

만약 선대 공작 부부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다면, 분명 데미안은 라크하를 죽이자는 말에 동의할 것이었다.


‘……절대 안 돼.’

쿵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라크하가 죽는다면……. 그런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때였다. 데미안이 제 어깨를 잡고 있는 녹스의 손을 떨쳐냈다.


“됐어. 공작부부 따위 필요 없어. 이런 식으로 계속 살 바에는 그만하고 싶어.”

“뭐?”

“오늘 내 모습을 봐. 지금 공작님을 다시 만난다 한들 도망 다니는 건 한계가 있어. 너도 이제 쓸데없는 살육은 그만두는 게 어때?”

“쓸데없는 살육이라고?”

헛웃음을 지은 녹스가 별안간 배를 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괴하게 느껴지는 웃음소리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친 녹스가 데미안에게 반걸음 가까이 다가가더니 검지로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이봐, 데미안. 나한테 살육은 네가 한 끼를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야.”

“황실에서도, 황실 다음으로 막대한 군사를 지닌 아인티아 가문에서도 전부 너를 노리고 있어.”

“답지 않게 웬 내 걱정이야. 제르디아 황가가 이룬 모든 걸 빼앗으면 그만이지.”

“뭐?”

“좋은 생각이지 않아? 그런 다음에 공작 부부를 꺼내면, 도망을 안 다니고 지낼 수 있잖아.”

나는 그제야 내가 헛된 희망을 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성이 있는 마물은 무슨, 녹스는 감당이 안 되는 폭주 기관차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도 네 것이 될 거야. 어때, 다시 나와 함께할 생각은 없어?”

녹스가 씩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망설일 필요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데미안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데미안은 거절하지 않고 녹스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나는 잡고 있는 커튼을 꽉 쥐었다.

그리고 조금 뒤,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데미안이 손을 뻗어 녹스의 손을 잡은 것이었다.


“……알겠어. 너랑 함께 갈게. 그러니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만 기분 나쁜 곳에서 나가자.”

“그래, 좋은 생각이야.”

“……저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그때 살벌하게 중얼거린 펠리르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마차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조명탄을 주워 나에게 내밀었다.

엉겁결에 조명탄을 받게 된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펠리르를 바라보았다.


“뭘…… 하시려고요?”

“여기서 끝판을 내야 해. 데미안, 저 놈을 죽이면 녹스도 죽는 거잖아.”

펠리르가 다른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단도를 챙겼다.


“펠리르 씨, 잠시만 기다려 봐요. 아직 나설 때가 아니에요.”

나는 펠리르를 붙잡으며 차분하게 말렸다. 데미안의 구속구도, 마력 제어 팔찌도 녹스가 풀어준 상태였다.

게다가 전진 기지에 있는 건 나와 펠리르뿐이었다. 무턱대고 덤볐다가 결과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먼저 녹스와 데미안이 완전히 떠나고 난 뒤에 조명탄을 써서 라크하를 부르는 걸로 해요.”

“아니, 그땐 이미 늦어.”

펠리르가 내 손을 떨쳐내더니 짐마차 입구 쪽으로 걸어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붙잡을 새도 없었다.


“펠리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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