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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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2022.11.21.
데미안이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기사들이 데미안을 툭 치면서 데려가 자연스럽게 시선이 떨어졌다.
‘데미안이 내 이름을 부른 거 맞지?’
의아해서 멀뚱히 데미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펠리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머릿속에서 데미안을 지운 나는 다시 식량을 나눠주는 데 집중했다.
배급을 끝내고, 정리까지 마쳤을 때는 이미 시간이 꽤 오래 흐른 후였다.
나는 막사 앞에 앉아 뻐근한 다리를 통통 두드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교대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별다른 소식이 없어 평소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듯했다.
“……녹스랑 해가 지면 만난다고 했었지.”
나는 아직 해가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뱉었다.
한적하게 떠다니는 구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괴리감이 들었다.
곧 녹스를 만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이렇게나 한적하고 고요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내 이마 위를 덮으며 햇살이 가려졌다. 슬쩍 시선을 옮기니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앉아 있는 라크하가 보였다.
“언제 왔어요?”
“방금. 여기까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그냥 쉬고 있지 그랬어.”
“음…… 뭐라도 하고 싶어서요. 이곳에 온 게 어떻게 보면 저 때문인 거니까…….”
막상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니 기분이 씁쓸했다. 내가 라크하를 말리지 않았다면, 북쪽 숲으로 올 일이 없었을 테니까.
북쪽 숲이 라크하에겐 들춰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는 곳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마음이 안 좋았다.
“미안해요. 이제 와 이런 말을 하긴 너무 늦긴 했지만.”
더 일찍 해야 했던 말이었는데. 내 사과에 라크하는 잠시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네?”
“그대의 일이 곧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라크하가 내 이마를 덮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쏴아아. 바람결에 잔머리가 흩날렸다. 이상하게도 그 바람이 내 마음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순간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롭고 한적한 지금 이 순간이 좋아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위안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나도 라크하의 일이 내 일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 라크하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부디 오늘 위험한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선발대로 다녀오셨잖아요. 혹시 녹스의 행적이라도 발견되었나요?”
“아직은 없어. 최근 일주일간 북쪽 숲 근방을 얼쩡거리는 외부인은 없었다고 하더군. 녹스의 본체를 목격한 사람도 없고.”
데미안과 녹스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일주일 전이라고 했으니 그 기간을 중점적으로 살핀 듯했다.
“이미 기사들 속에 숨어든 건 아니겠죠?”
“그래서 오늘 새벽에 데미안을 선발대와 함께 보내서 북쪽 숲에 있던 기사들을 전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어.”
나는 어제 라크하와 말을 타고 오면서 들었던 얘기를 되새겨 보았다.
하긴 데미안이 사람의 몸에 들어가 있는 녹스를 구분할 수 있다고 했었지.
‘그래서 라크하도 새벽부터 선발대와 함께 북쪽 숲을 다녀왔었던 거구나.’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녹스를 발견했다면, 제가 없는 사이에 큰일이 터질 뻔했던 거잖아요?”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으니…… 모른 척 넘어가는 건 어떨까.”
라크하가 보기 드물게 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이 남자가 정말. 내 안전을 우선시하는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그만큼 나도 라크하의 안위를 걱정한다는 걸 알아주면 좋으련만.
눈을 가늘게 뜬 채 쏘아보고 있자니, 라크하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잊은 게 있군.”
“선발대로 가실 때 절 두고 가신 거요?”
“……그대는 이상한 부분에서 집요하단 말이지.”
“저도 공작님을 닮아가나 봐요.”
나는 새침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이었다. 집요한 성격은 라크하도 나 못지않으니까.
하지만 라크하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좋은 건가?”
이걸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이야? 잊을 법하면 나오는 라크하의 엉뚱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글쎄요, 그래서 원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예요?”
“아, 그대에게 줄 게 있어서.”
라크하가 내게 손바닥만 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 안에는 반딧불이처럼 형광색의 빛을 내는 돌멩이가 있었다.
“이건…….”
며칠 전 펠리르가 내게 보여줬던 돌멩이였다.
“마력석이야. 녹스한테 기습을 당할 수도 있으니 지니고 있어.”
나는 빛나는 돌멩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양손으로 조심히 받았다.
일반적인 돌멩이치고는 범상치 않긴 했는데, 마력석이었구나.
라크하가 준 마력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불현듯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펠리르의 상점에 갔을 때 마력석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마력석은 흑마력과 충돌했을 때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않나요?”
“어차피 내가 흑마법을 쓰는 건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뿐이야.”
라크하는 그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태연했다.
최악의 상황이라 하면, 아마 데미안과 녹스가 힘을 합쳐 작정하고 공격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전에 걸리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데미안이 흑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잖아요.”
“데미안에겐 마법 제어 팔찌를 채웠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럼 다행이긴 한데……. 나는 데미안이 있는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데미안이 무어라 한 건지 몰라도, 기사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데미안과 실랑이를 벌이던 기사가 우리 쪽을 바라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묵례했다.
“무슨 일이지?”
“데미안이 공작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무슨 용무인지 먼저 확인해보려고 했으나, 도통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귀찮게 하는군.”
라크하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라크하에게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갑자기 왜 라크하를 부른 건지 궁금하긴 하지만, 나중에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
데미안은 메이아가 있는 쪽을 흘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여자가 메이아라고 들었어.”
“네가 함부로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야.”
이를 악문 라크하가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데미안이 메이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만큼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이전에 한차례 사람을 매수해서 메이아를 공격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험악한 라크하의 기세에 움찔하면서도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저 여자, 북쪽 숲에서 내보내거나 녹스의 눈에 띄지 않게 숨기는 게 좋을 거야.”
라크하는 구속구에 묶여 있는 데미안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데미안이 도통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 메이아를 북쪽 숲에서 내보내는 건 위험성이 컸다. 언제, 어디서 녹스와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니까. 게다가 데미안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무슨 속셈인 거지?”
“속셈 따윈 없어. 이전에 고마운 일이 있어서 한 말이야.”
아드리엔 저택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건가? 라크하는 미심쩍은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못 들은 척 넘기기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라크하는 옆에 있는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메이아에게 짐마차나 막사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해.”
라크하는 다시 데미안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고개를 내저은 데미안이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녹스가 오기 전에 그분들을 만나보고 싶어.”
데미안이 말하는 그분들이라 하면, 선대 공작 부부였다. 어처구니없는 데미안의 부탁에 라크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주제 파악이 덜 됐군.”
“마지막으로 그분들을 보고 마음의 정리를 하려는 거야. 그래야 내가 녹스에게 휘둘리지 않을 테니까.”
라크하는 몸을 낮춰 데미안과 눈을 마주했다.
선대 공작 부부와 관련된 일은 누구보다 감정의 동요를 크게 보이던 데미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데미안은 차분했다. 라크하에겐 잘된 일이었다. 이전과 달리 대화가 통할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잘 들어. 선대 공작 부부는 네 가족이 널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숨겼어.”
“…….”
“그 인간들은 흑마법에 미쳐 있었거든. 제 자식마저도 아인티아의 힘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을 정도로.”
선대 공작 부부에 대한 데미안의 미련을 떨쳐내려고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말을 이어갈수록 도리어 라크하의 기분이 아래로 추락했다. 가슴 깊숙이 새겨진 선대 공작 부부에 대한 증오가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 인간들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소중히 여긴 적도, 인간으로서 대우해 준 적도 없었어.”
이전과 달리 데미안은 선대 공작 부부를 향한 모욕에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젠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고, 이런 쓸데없는 일로 날 부르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군.”
할 말을 마친 라크하는 불쾌한 기분을 애써 떨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공작님!”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기사가 라크하의 곁으로 달려왔다. 북쪽 숲 동쪽 경계에서 보초를 서는 기사였다.
“저, 저희 쪽 기사들과 제4 기사단이 시비가 붙었습니다. 저희 선에서 처리를 해 보려고 했는데 도통 수습이 안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따로 전해들은 소식이 없으니 수색을 하려면 황제의 직인이 찍힌 서류를 들고 오라 하였는데, 황명을 들먹이며 도통 물러나지 않습니다.”
라크하는 잇새로 터져 나오는 욕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불안하다고 했는데, 황실에서 북쪽 숲에 대해 무언가 냄새를 맡고 수색 명령을 내린 게 틀림없었다.
라크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지기 전까지 조금 시간이 남아 있었다.
동쪽 경계까지 말을 타고 가면 얼마 걸리지 않으니 수습하고 돌아오기엔 충분할 것 같았다.
“내가 직접 가보도록 하지.”
***
제4 기사단의 등장으로 발칵 뒤집힌 동쪽 경계와 달리 서쪽 경계는 평화로웠다.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출입하려는 자가 있다면 즉시 보고하라.
북쪽 숲 서쪽 경계의 기사들이 받은 명령은 평소의 임무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서쪽 경계는 마을과 인접한 곳으로, 외부인의 왕래가 잦기 때문이었다.
다만, 평소와 달리 사람의 탈을 쓴 마물이 출입하려고 할 수도 있다는 소식은 기사들에게 긴장감을 조성했다.
“여기로는 안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 마물, 약점이 빛이라며? 마력석도 받았으니 큰 문제없겠지. 아직 해가 지지 않기도 했고.”
기사들은 아직 산등 너머로 넘어가지 않은 해를 보며 긴장을 달랬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사들의 눈에 홀로 두리번거리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장미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은 지나가다 마주치면 누구나 돌아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길이라도 잃었나?”
“저 예쁜 아가씨한테 말이라도 한번 걸고 싶어서 길을 잃었길 바라는 거 아니야?”
“흠흠,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내가 반 년째 여기서 보초를 서 봐서 아는데, 근방에 마을이 있어서 이쯤에서 길을 헤매는 사람이 은근히 많아.”
하지만 말과 달리 덩치 큰 기사의 눈은 여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여인을 바라보던 덩치 큰 기사는 결국 제 동료에게 잠시 다녀온다고 말한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레이디,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안 그래도 곤란했는데…… 마침 기사님께서 물어봐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여인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뱉더니 가까운 거리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그런데 혹시 저기 나무 아래로 가서 대화를 나눠도 될까요? 기사님께서 키가 워낙 크셔서 올려다보려니 눈이 부셔서요.”
여인의 은근한 눈빛과 달콤한 말에 기사는 순순히 나무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로 들어가자, 커다란 그림자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말씀하십시오.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머, 고마워라. 하지만 어쩌죠?”
기사의 앞으로 반걸음 다가간 여인이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난 당신의 몸이 필요한 거라.”
여인의 발밑에서 검은 형체가 솟아오르는 순간, 기사가 들고 있던 마력석이 빛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