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북쪽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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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북쪽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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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북쪽 숲
2022.11.04.
방문이 살짝 열리더니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가 중간 상황을 보고했다.
“데미안이 깨어났습니다만, 아드리엔 영애가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10분. 그 이상은 안 돼. 허튼 행동을 하면 곧장 신호를 보내도록 하고.”
“예, 알겠습니다.”
라크하가 무작정 들어가려고 하진 않을까 걱정됐는데, 다행히 그는 인내심 있게 더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답답한지 라크하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목을 옥죄는 단추를 신경질적으로 풀어헤쳤다.
“성가시게 하는군. 대체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 거지?”
“염려 말아요. 그저 동생과 얘기를 나누는 것뿐일 거예요.”
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했으나, 솔직히 나 역시 초조했다.
데미안의 정체를 알게 되고 처음 대화를 나누는 걸 텐데, 괜찮으려나?
나는 착잡한 마음에 라크하에게 머리를 살짝 기대어 방문을 바라보았다.
라크하에게서 나는 화이트 머스크 향이 코끝을 맴도니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레이나를 기다린 지 얼마나 됐을까. 달칵, 문이 열리더니 레이나가 걸어 나왔다.
“레이나 님, 얘기는 끝났나요?”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문을 힐끔 바라보았다. 데미안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방문이 완전히 닫힌 후,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메이아 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데미안에게 얘기해 봤어요.”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요?”
“녹스를 회유해 보겠다고 하네요.”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묵은 걱정들이 내려가며 속이 한결 개운해졌다.
내 표정이 밝아지자, 라크하가 그런 나를 보며 가볍게 픽 웃었다.
“아직 좋아하긴 이르지 않을까. 데미안이 무슨 수로 녹스를 회유할지도 모르잖아. 뒤통수를 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긴 한데……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는 게 기뻐서요.”
만약 여기서 데미안이 못 하겠다든가,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면 참담했을 것이다.
상상도 하기 싫은 생각에 나는 부르르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일이 차근차근 풀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때, 레이나가 대화가 끊기는 흐름을 타 끼어들었다.
“그리고 데미안이 공작님께 할 말이 있다고 했어요.”
“먼저 날 보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군.”
무슨 대화를 하려는 걸까? 지금까지 데미안이 저지른 전과들이 있기에 불안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나는 라크하의 옷깃을 붙잡으며 물었다.
“괜찮을까요?”
“그놈이 미친 게 아니라면, 여기서 사고를 칠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하긴 기사들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감시를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데미안은 지금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래, 섣불리 위험한 행동을 하진 않겠지.’
나는 가까스로 걱정을 떨쳐내고 라크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네, 잘 얘기하고 와요. 저는 레이나 님과 같이 있을게요.”
“그래,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라크하가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고 뒤돌아섰다.
하지만 레이나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데미안이 동생인 걸 아는 건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도록 하지.”
라크하가 방으로 들어가고, 레이나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데미안은 레이나 님과 남매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직은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레이나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더 자세히 캐물을지 망설이던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레이나는 자세한 이유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 사연이 있겠지. 레이나에겐 예민한 문제일 텐데, 내 호기심을 위해 들춰내고 싶진 않았다.
***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던데.”
라크하가 데미안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데미안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녹스를 소환했다는 거, 네가 말했어?”
라크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악의와 복수심으로 물들어 있던 데미안의 눈빛이 원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변화가 레이나 아드리엔, 한 명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허탈했다.
선대 공작 부부에 대한 데미안의 집착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쌍둥이들의 납치, 그리고 녹스에게 위협을 당했던 메이아까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이라도 데미안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일을 크게 키웠다간,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었다.
‘앞서 데미안이 행한 일들에 대한 죗값은 녹스가 해결된 이후에 물으면 되는 일이다.’
라크하는 스스로 되뇌며 데미안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혔다.
“미련한 건 여전하군. 지금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할 때가 아닐 텐데. 아직 주제 파악이 안 되었나?”
기사들이 경계를 잔뜩 세운 채 매서운 눈으로 데미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튼 행동을 하면 언제든 검을 빼내어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그나저나 녹스가 더는 날뛰지 않도록 회유해 보겠다고 했다던데.”
라크하의 눈동자가 데미안을 천천히 훑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지?”
라크하의 질문에 데미안은 멈칫했다. 사실 회유할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말만 소환자일 뿐 지금까지 녹스에게 휘둘려 다닌 건 데미안, 자신이었으니까.
데미안은 그 사실을 레이나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레이나가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제게 작게 속삭였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어렵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꼭 그 마물을 회유할 수 있다고 해야 해요. 아니, 시도라도 해 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데미안이 죽어요.
데미안은 어째서 레이나가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테오를 죽인 마물을 소환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레이나는 그런 제 속을 읽었는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었다.
-저는 데미안이 밉지만, 그렇다고 죽길 바라진 않아요.
데미안의 침묵이 길어지자, 라크하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목숨이라도 연명하기 위해 무작정 해보겠다고 한 말인가?”
“아니, 그게 가능성을 따질 수 있는 일인가 싶어서. 일단 녹스와 대화를 해 봐야 아는 거지.”
데미안은 일부러 모호하게 답했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면, 라크하는 기회를 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라크하의 의심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네가 녹스를 막을 수 있다면, 테오 네리스는 왜 죽게 내버려 둔 거지?”
녹스가 테오를 죽이고 다른 몸으로 나타났던 날을 떠올린 데미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막으려고 하기도 전에 일을 저질렀으니까.”
레이나에게 위험을 먼저 알린 뒤 녹스를 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녹스가 테오를 죽인 후였다.
“레이나 아드리엔이 네 누이라는 걸 알고 있나 보군.”
물끄러미 데미안을 바라보던 라크하가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했으나, 그 파장은 컸다.
“설마 그것도 말한 거야? 아니, 분명 아직 모르는 것 같았는데…….”
안절부절못하는 데미안을 보며 라크하는 오호, 하고 작게 탄성을 흘리더니 입매를 틀어 올렸다.
“네가 하는 태도에 따라 정하려고. 그러니 내일 당장 그 빌어먹을 마물을 회유해 보도록 해.”
“……내일은 못 해.”
“잔머리를 굴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정말이야!”
쇠를 긁는 것처럼 거친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그러자 방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검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데미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테오가 죽은 이후로 녹스와 따로 지내고 있어서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몰라.”
“결국, 녹스를 회유해 보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었군.”
“아니, 3일 뒤에 녹스와 만나기로 한 장소가 있어.”
테오가 죽었던 날, 녹스가 일주일 뒤에 북쪽 숲에서 보자고 했었다.
그날 이후로 4일이 지난 지금, 녹스가 말한 날짜까지 3일이 남아 있었다.
“그곳이 어디지?”
라크하의 물음에 데미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북쪽 숲.”
“뭐?”
라크하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데미안은 길게 숨을 내뱉은 뒤 라크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북쪽 숲이야.”
***
후원에 있는 전망대로 나온 키네스는 긴 한숨을 뱉으며 석양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할 겸 나왔으나, 여전히 어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상하단 말이지.”
분명 레이나는 동생이 생각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데미안’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단 말인가?
키네스가 알기론 레이나의 동생의 이름은 ‘데미안’이 아니었다. ‘단테 아드리엔’이었지.
결국, 키네스는 그의 보좌관인 비에고에게 데미안과 레이나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레이나의 뒷조사를 하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계속 곁에 두려면 확실히 파악해야만 했다.
“폐하.”
그때, 비에고가 키네스의 옆으로 다가와 묵례를 올렸다. 키네스가 의아한 눈으로 비에고를 바라보며 물었다.
“벌써 조사를 끝냈나?”
데미안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조사가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랐다.
“아드리엔 영애와 데미안의 관계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미리 보고를 드려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황실 경비병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데미안이라는 인물을 특정 지으려다 의외의 인물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비에고는 비스퇴르가에 배치된 황실 경비병들의 증언을 정리한 문서를 키네스에게 내밀었다.
문서를 살펴보던 키네스는 뜻밖의 내용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붉은 머리카락에 눈 밑의 점이 있는 남자를 찾고 있는데, 이름이 데미안이라고 하였다.>
아인티아의 기사들은 어째서 데미안을 찾고 있단 말인가? 데미안이 아인티아와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소식은 꽤 파격적이었다.
키네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증언을 읽어 내려갔다. 그 외에 기재된 다른 증언들 역시 보통 사안이 아니었다.
“아인티아 기사들이 데미안과 아드리엔 영애를 쫓고 있었다고?”
“예, 그게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잠깐 머뭇대던 비에고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아인티아의 하녀에게 자백을 받아냈는데, 그 하녀가 언급한 이름도 데미안입니다.”
“아인티아 쌍둥이들의 납치 사건과 연루되어 있던 하녀를 말하는 건가?”
“예, 조만간 자백을 받은 내용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비에고의 보고를 듣던 키네스는 실소를 흘렸다.
레이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조사를 지시했는데, 아인티아와 얽혀 있다니.
레이나가 어째서 그런 자를 동생이라 불렀던 것인지 의아했다.
“행적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 봤나?”
“과거 행적이 묘연해서 더 조사를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5년 전쯤 북쪽 숲에서 목격되었다는 정도입니다.”
북쪽 숲이라면, 아인티아 가문의 사유지였다.
그런 곳에서 목격되었다는 건 단순한 납치범이 아니라 안면이 있던 관계라는 걸까? 혹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걸까.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엔, 하필 선대 아인티아 공작 부부의 실종되었던 시기와도 겹쳤다.
“이거…… 참 공교로운 일이군.”
석양빛을 담은 키네스의 붉은 눈동자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