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유일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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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유일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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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유일한 배려
2022.10.31.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탄신 연회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라크하를 찾으려고 페르타 궁의 야외 정원을 돌아다녔던 그때 봤던 남자였으니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분명 내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었다.
‘그 남자가 왜 여기에 쓰러져 있는 거야?’
나는 당황해서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그런데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자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날렵한 눈매, 그리고 눈 밑의 점까지.
어째서 내가 지금껏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데미안의 외양과 비슷한 걸까.
얼떨떨하게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 손을 잡고 있는 델카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델카인! 야, 왜 그래?”
곧이어 들려오는 아이샤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델카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숙여 델카인의 상태를 살폈다.
“델카인, 어디 몸이 안 좋은 거야?”
“……사, 살려주세요.”
하지만 델카인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어딘가를 바라보며 숨을 헐떡일 뿐이었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나는 서둘러 델카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델카인은 겁에 질린 것 같은 눈으로 붉은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번갯불 같은 섬광이 지나갔다.
델카인이 이렇게까지 두려워할 법한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정말 데미안인 거야?’
데미안의 외양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델카인의 반응을 보니 그가 맞았다. 델카인은 데미안의 얼굴을 봤을 테니까.
데미안에게 납치를 당한 기억은 분명 어린 델카인에게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서둘러 델카인의 몸을 돌려세웠다.
“자, 델카인. 날 봐. 그렇지.”
그제야 델카인의 시선이 데미안에게서 떨어지고 내게 향했다.
하지만 여전히 델카인의 호흡은 불안정하고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써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델카인과 눈을 마주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델카인이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델카인, 괜찮아. 나랑 아이샤가 있잖아.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
“자, 심호흡하자. 이렇게 후, 하.”
나는 시범을 보이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델카인은 조금씩 나를 따라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몸의 떨림도 가라앉고 있었다.
“그렇지,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아.”
“맞아, 델카인 뭐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내가 다 날려줄게.”
내 말에 아이샤가 패기가 넘치는 얼굴로 허공에 주먹질하는 시늉을 했다.
“어때, 믿음직하지?”
“……바보처럼 굴지 마.”
나름대로 진정이 된 걸까. 델카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너, 나한테 뭐라고 했어?”
“아무런 말도 안 했어.”
한결 편안해 보이는 델카인을 보며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데미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사가 데미안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쌍둥이들을 두고 데미안을 살피는 게 망설여지지만, 방관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데미안은 녹스를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니까.
“우리 믿음직한 아이샤, 혹시 델카인을 부탁해도 될까?”
“응, 물론이지! 나만 믿어!”
믿음직하다는 말에 아이샤는 헤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델카인, 금방 다녀올게. 알겠지?”
“……응.”
나는 아이샤와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오자, 집사는 당황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연신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신원 파악도 안 되는 사람이 어찌 저택 내에 쓰러져 있는 건지…… 깨우려고 해봐도 도통 눈을 뜨지도 않습니다.”
“아뇨, 깨우려고는 하지 마세요.”
데미안이 눈을 떴을 때,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랐다. 혹여나 누가 다치거나 데미안이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곤란했다.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몸이 불덩이입니다.”
자세히 보니 열이 심한 듯 데미안의 얼굴은 불그스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쓰러져 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몸 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더운 숨을 뱉어내는 데미안의 이마 위로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그때 데미안이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으으…….”
“이것 참…….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치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픈 사람인데 쫓아내자니 마음에 걸리는군요.”
집사가 상당히 곤란한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의원을 부르기 꺼려질 법도 했다. 의원을 불렀을 때 감수해야 하는 금전적인 문제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물끄러미 데미안을 내려다보았다.
“…….”
방금 전 델카인이 덜덜 떨던 모습을 본 탓일까.
지금까지 데미안이 라크하와 쌍둥이들에게 해온 일들이 떠오르며 미운 감정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레이나 때문에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는데도 불구하고.
마음 같아서는 의원은커녕 이대로 데미안을 공작가로 데려가 라크하에게 넘겨버리고 싶지만…….
‘이대로 공작가로 데려갔다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겠지.’
라크하는 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냉정하고 칼 같은 사람이니까.
자칫 상황이 틀어진다면 데미안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일단, 의원을 불러주세요. 그리고.”
나는 마차 앞에서 인사를 나눴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방해되지 않도록 아드리엔 남작가 주변에서 경비를 서고 있겠다고 했으니 아래층에 있을 것이었다.
“저와 함께 온 기사님에게 아인티아 공작가로 연락해달라고 해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내 부탁에 허겁지겁 일어난 집사가 무언가 떠오른 듯 나를 돌아보았다.
“무어라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장황한 말을 담을 필요는 없었다. 딱 한 가지만 언급해도 라크하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올 테니까.
“데미안이 여기 있다고 해주세요.”
***
“메이아!”
한달음에 달려온 라크하가 바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떨리는 보라색 눈동자로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생각까지 했었던 건지 라크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는…….”
델카인이 데미안과 마주쳤을 때 상태가 안 좋았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형, 왔어?”
델카인이 불쑥 나와 라크하의 사이에 끼어들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절레절레 저었다.
‘라크하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건가?’
델카인이 원치 않는다면 말을 하진 않겠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델카인이 어리광도 부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눈치 빠른 라크하가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내 말을 되읊었다.
“저보다는?”
“저보다는…… 데미안의 상태가 안 좋다고요.”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 녀석을 위해 의원을 부를 필요는 없었어. 과한 처사야.”
라크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데미안과 관련된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라크하의 옷소매를 가볍게 당겼다.
“잠시 나가서 대화해요.”
델카인이 괜찮은 척을 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델카인의 앞에서는 데미안과 관련된 얘기를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복도로 나온 후에야 나는 편안하게 말을 꺼냈다.
“얼른 깨어나야 대화라도 나눠보지 않겠어요.”
“녹스를 회유해 보라는 대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난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되는군.”
라크하는 기사 여럿이 지키고 있는 방을 바라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라크하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이미 다잡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지켜보란 꼴과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라크하의 극단적인 결정은 막고, 다른 평화적인 방법도 모색해보고 싶었다.
그게 죄책감을 갖고 살고 싶지 않다는 내 이기적인 마음일지라도.
“그래서 레이나 님이 필요한 거예요. 레이나 님이라면, 데미안을 붙잡아 둘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라크하는 한숨을 내뱉으며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 여자는 대체 언제 오는 거지?”
“1시간 내로 온다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늦네요.”
진작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슬슬 걱정되려던 참에 아래층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옮기니 계단을 올라오는 레이나가 보였다. 레이나는 나와 라크하를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메, 메이아 님과 공작님께서는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나는 서둘러 레이나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반겼다.
“편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으시기에 걱정되어서요.”
“아…… 죄송해요. 제가 며칠 동안 경황이 없어서……. 저는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새 핼쑥해진 레이나가 나를 보며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울고 오기라도 한 건지 눈 밑이 붉었다.
아직 많이 힘들어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기사님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가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데미안 때문이에요.”
“…….”
데미안의 이름이 언급되자, 레이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레이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데미안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데미안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피부는 퍼석하고, 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말라 갈라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던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제 친구의 죽음에 간접적으로나마 일조한 데미안이 미웠다. 동시에 제 동생인 단테가 안쓰러웠다.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조소를 흘린 레이나는 데미안을 향해 손을 뻗어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차라리 아프지나 말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면, 실컷 미워하기라도 했을 텐데.
레이나는 침대 옆에 앉아 데미안의 손을 잡고 그 위로 제 이마를 묻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잃고 싶진 않았다. 그러려면 데미안이 녹스라는 마물을 회유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했다.
데미안이 협조를 해야 공작님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
그때, 맞잡고 있는 데미안의 손이 미동했다.
혹여나 잘못 느낀 건가 싶어 레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거리를 두는 듯한 데미안의 호칭에 레이나는 맥이 탁 풀렸다. 이전에 동생 얘기를 꺼냈을 때 데미안은 자신이 누나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데미안은 그동안 내색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마치 자신이 단테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다는 듯이.
그 사실을 깨달은 레이나는 쓰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데미안.”
레이나는 울컥거리는 감정들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데미안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원한다면, 나도 모른 척해줘야겠지?’
그게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