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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선물 (103/136)


103. 선물
2022.10.24.


황제의 친필 편지를 받은 이후, 레이나가 세 번째로 입궁하는 날이었다.

이틀에 한 번 오후 1시, 황제의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입궁한다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귀족 영애가 늦은 시간에 입궁하기에는 추문이 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레이나가 약속한 시간에 맞춰 입궁하면 하는 일은 간단했다.

황제의 침실로 가서 발라이 식 마사지를 하는 척 능력을 쓴 뒤 저택으로 귀가하는 것.

그러다 보니 황궁에 머무르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레이나는 오늘도 평소와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는 길에 붉은 머리의 남자를 쫓아갔다지.”

레이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평소와 달리 차를 마시자고 할 때부터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 같았으나, 입궁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꺼낼 줄은 몰랐다.

잠깐 머뭇대던 레이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착오로 약속했던 시간보다 늦게 되어 죄송합니다.”

키네스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레이나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마차를 세우고 붉은 머리의 남자를 쫓아간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더 정확히는 차분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 사람이 데미안인 줄 알고 쫓아갔던 거였으니까.


“착오라…….”

낮고 우아한 키네스의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나직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레이나는 설명을 덧붙이기보다는 한 번 더 사죄했다.

사실 무작정 마차에서 내려 뛰쳐나간 건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 사람과 데미안과 닮은 점이라곤 고작 붉은 머리카락뿐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데미안이라고 확신하고 뛰쳐나갔다. 여전히 감정적으로 쇠약해져 있는 탓이었다.

이미 데미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역시 무례를 범하더라도, 입궁 날짜를 한 번 더 미뤄달라고 하는 게 나았을까?’

자그마한 자극에도 풍랑을 만난 배처럼 감정이 이렇게까지 요동치니 말이다.

레이나는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아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

레이나가 입을 다물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레이나는 그사이에 어떻게든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애를 썼다.

절대 깨질 것 같지 않던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키네스였다.


“그러다 차가 식겠군.”

“네?”

“그대를 위해 따로 준비하라 명한 차이니 맛이라도 봤으면 좋겠는데.”

“죄, 죄송합니다.”

레이나는 그제야 자신이 차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찻잔을 들었다.

시원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감돌았다. 황제의 침실로 들어온 이후로 계속 나던 향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향인데. 레이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루메니안 차……인가요?”

“루메니안 차를 알고 있나?”

레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께서 자주 마시던 차였으니까.

그리고 제 기억이 맞는다면……. 레이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역시 혀가 찌르르 저릴 정도로 쌉싸름했다.

키네스는 레이나를 따라 찻잔을 들며 말을 덧붙였다.


“씁쓸한 맛을 싫어하진 않을까 우려가 됐는데 다행이군. 그대에게 필요할 것 같았거든.”

“네?”

“최근에 있었던 일로 상심이 크지 않았나. 심신 안정에 좋은 차이니 조금 마음이 진정이 될 거다.”

“……그렇군요.”

레이나는 찻잔을 꽉 쥐었다. 심신 안정에 좋은 차였다니.

부모님께서도 어째서 갑자기 이런 쌉싸름한 차를 마시기 시작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주로 달달하고 부드러운 차를 즐겨 마시던 분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단테 때문이었구나.’

맑은 찻물에 비치는 레이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단테를 잃어버린 이후, 마음이 불안정한 탓에 마셨던 것이었다.


“그대의 입맛에 맞는다면, 따로 챙기라고…….”

키네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레이나가 눈물을 뚝 떨어트린 탓이었다.


“……레이나 양?”

“죄송해요…… 흑, 제가 주책맞게 흐윽…….”

레이나는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 보려고 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석상처럼 굳은 채로 레이나가 우는 모습을 바라보던 키네스는 뒤늦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괜한 얘기를 꺼냈구나. 미안하다.”

우는 사람을 달래본 적이 없기에 키네스의 손길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홀로 슬퍼하며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탓일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져서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데미안, 왜 그랬던 거야. 흐어엉.”

레이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선 이름에 키네스는 그녀를 달래다가 멈칫했다.

레이나에 대해서 웬만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데미안이라는 이름은 키네스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

데미안은 남작가를 드나드는 마차를 살펴보기 위해 몸을 숨겨 남작가 정문을 지켜보았다.

레이나가 테오의 장례식을 참석할 것 같아 걱정되었다. 그리고 녹스가 레이나를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잠복이 어느덧 며칠이 흘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데미안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그날 이후로 레이나가 외출을 하지 않긴 했다.

다만 녹스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모르기에 불안했다.

데미안은 비가 세차게 쏟아졌던 그날의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왜 이렇게 화났어? 그 여자의 몸만 차지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니까?

 
함께하는 건 여기까지라는 말에 녹스는 조금은 당황한 듯해 보였다. 그 모습에 데미안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녹스는 소환에 대한 보답으로 저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를테면, 제 몸이라든가.

하지만 그 의심은 뒤이은 녹스의 말에 잠시 흔들렸다.
 


-일주일 뒤, 북쪽 숲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정말 북쪽 숲에 있는 선대 공작 부부를 구하는 걸 도와줄 생각인 건가?

녹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윽.”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던 데미안이 얕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날 비를 맞은 탓일까. 머리가 지끈거리며 몸이 무거웠다.


“감기인가…….”

감기 정도는 데미안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보다 더 힘든 일이 많았으니까.

데미안은 휘청거리는 몸을 금세 추스르고 다시 아드리엔 남작가 쪽을 주시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아드리엔 남작가의 앞에 멈춰서 있었다.


“뭐지?”

데미안이 의아한 눈으로 황실 마차를 바라보던 때였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레이나가 저택에서 걸어 나오더니 순순히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차는 순식간에 떠나갔다.


“…….”

데미안은 떠나가는 마차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레이나가 황실 마차를 타고 갈 곳은 황궁밖에 없었다.

그러니 레이나가 돌아올 때까지 안심하고 평소처럼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마차에 올라타던 레이나의 얼굴이 데미안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새 살이 빠진 듯 핼쑥해진 볼, 붉은 눈가. 밝았던 레이나의 표정은 무척 어둡고 암울했다.


‘많이 힘들었던 거겠지.’

그 모습에 데미안은 가슴이 찌그러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녹스만 막았더라면, 레이나가 슬펐을 일은 없었을 텐데.

데미안은 안개꽃을 받고 기뻐하던 레이나를 떠올렸다.


“선물을 주면 기운을 조금이라도 차리려나……?”

데미안의 시선이 아드리엔 남작가로 향했다.

***

테오의 장례식이 이루어지는 동안 나는 레이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꾸준히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혹시나 편지가 잘못 보내진 건 아닐까 확인해 보았지만, 문제는 없었다.


‘레이나가 읽고 답을 주지 않거나 혹은 읽지도 않았다는 건데…….’

마지막에 본 레이나의 모습이 신경 쓰였던 나는 결국 직접 방문해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침 오늘 일정도 비어 있는 참이었다.

그렇게 오늘 레이나를 만나러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집무실을 먼저 들렸다.

이전에 쪽지만 남기고 외출했다가 오해가 생긴 적이 있으니 직접 말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라크하, 혹시 바빠요?”

“나가.”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라크하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타이밍이 안 좋았나? 오랜만에 듣는 라크하의 차가운 말투에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여, 역시 너무 무작정 찾아…….”

“네, 네! 알겠습니다!”

라크하에게 사과하고 나가려는데, 시롬이 허리를 숙이더니 서둘러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아, 시롬에게 한 말이었구나.’

라크하가 나에게 차갑게 말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아무래도 아직 라크하의 다정한 모습이 적응되지 않은 모양이다.

괜히 머쓱해서 나는 볼을 긁적이며 쭈뼛쭈뼛 라크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라크하가 서류를 탁 내려놓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대가 아침부터 올 줄은 몰랐는데, 어쩐 일이야?”

“음,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데 라크하가 시롬을 내쫓기까지 한 탓에 더 머뭇거리게 되네.

하지만 라크하는 차분하게 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나는 후, 하고 심호흡한 뒤 천천히 말을 꺼냈다.


“오늘 레이나 님을 만나고 오려고요.”

“그러도록 해.”

“네?”

나름 적절한 이유까지 준비해왔던 나는 예상치 못한 라크하의 답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순순히 가라고 한다고? 아니, 애초에 허락받을 생각으로 온 건 아니지만…….’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라크하라면 적어도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아드리엔 영애가 만나주려고 할까?”

레이나가 나를 안 만나줄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구나.

하지만 레이나가 방에만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은 나 역시 내 편지를 전달해준 하녀를 통해 들은 참이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레이나에게 돌려줄 것이 있었다.

바로, 레이나가 응접실에 두고 갔던 어설프게 만들어진 꽃다발이었다.


‘그날 데미안을 만나고 날 보러 왔던 거라면, 그 안개꽃은 데미안에게 받은 거겠지.’

테오의 죽음 이후로 레이나가 데미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분명 뜻깊은 선물이긴 할 것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동생이 준 선물일 테니까.


“네, 걱정 마세요. 아마 절 만나주실 거예요.”

확신에 담긴 내 대답에 라크하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손을 뻗어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나를 제 허벅지 위로 앉힌 라크하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글쎄, 난 그대가 괜히 헛걸음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야.”

등 뒤로 단단한 그의 몸이 느껴지며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스쳤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야릇한 기분이 들어 몸에 힘이 들어갔다.


“허, 헛걸음하면 어때서요.”

“이렇게 연약한 다리로 헛걸음을 하는 건 내가 못 보겠는데.”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허벅지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더니 얇은 드레스 자락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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