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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네가 없잖아 (102/136)


102. 네가 없잖아
2022.10.21.


목이 쉴 정도로 울던 레이나는 끝내 실신하고 말았다. 레이나가 쓰러지던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흐으…… 테오…….”

레이나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한 번씩 테오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역시 충격이 큰 거겠지.’

내 마음은 더욱 심란해졌다.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한 걸까. 그래서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까지 해서 레이나에게 더 상처를 준 건 아닐까.

온갖 상념에 빠져 있던 그때,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어깨를 감쌌다.

시선을 옮기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피는 라크하가 보였다.


“그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레이나 님이 깨어나는 걸 보고 갈래요.”

“메이아.”

“그래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나를 위하는 라크하의 마음을 알겠으나, 그가 무어라 하든 방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아마 방으로 돌아가도 마음이 불편해서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꿋꿋이 침대맡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라크하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라크하야말로 바쁠 텐데 가보셔도 돼요.”

“그대가 다 죽어가는 사람 마냥 힘없이 있는데, 내가 어딜 가겠어.”

라크하가 저벅저벅 창가로 걸어가더니 내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말은 가 봐도 된다고 했지만, 라크하와 함께 있으니 어쩐지 안정감이 들었다.

힘들 때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고마우면 얼른 기운이나 차렸으면 좋겠군.”

라크하가 턱을 괸 채 레이나를 바라보더니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가 말을 안 했다면, 어차피 내가 말했을 테니까.”

“네? 무엇을요?”

“제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소리칠 자격도 없다고 말하려 했지.”

그걸 또 그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하려고 했다고? 어쩌면 내가 레이나와 다툰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속으로 안도하고 있던 때였다. 라크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대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아…….”

라크하도 이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라크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지금처럼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를 생각해주는 말과 다정한 눈빛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심 나도 누군가가 위로해주길 바랐던 걸까. 상황과 사람에 이리저리 치이느라 내 감정을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라크하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기 민망해서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레이나 님도 녹스에 대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요.”

내가 신전에서 지낼 때만 해도 레이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오늘은 테오의 몸에 들어 있는 마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결국, 그 사이에 누가 레이나에게 정보를 흘린 거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데미안과 만났다는 게 확실해지는 거지.”

“역시 그렇겠죠…….”

레이나에게 녹스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법한 사람은 몇 없으니까.


“오늘도 홀로 숲속에 있었다고 하더군. 꽃을 따러 갔다고 하던데 말도 안 되는 핑계이지. 혼자 갈 법한 곳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테오의 부고 소식을 듣기 전에 레이나가 데미안의 이름을 언급했던 것 같았다.

데미안과 함께 있다가 곧장 나를 만나러 온 거구나.


“그럼 이젠 서로 남매라는 건 알게 됐으려나…….”

아직은 몰랐으면 좋겠는데. 무심코 홀로 중얼거리던 나는 순간 흠칫했다.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냐고 외치던 레이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지만…….’

나는 슬그머니 레이나를 흘긋거렸다. 레이나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일단 오늘은 아니야.’

레이나는 이미 테오의 부고 소식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상태이다.

그런데 테오를 죽인 마물의 소환자가 제 동생이라는 것까지 알게 된다면?

레이나가 정신적으로 감당을 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이 녹스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지금 같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라크하가 내켜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라크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녹스가 더 이상 인간을 죽이지 않도록 데미안이 설득할 수 있다면, 어쩌시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하지만 대답이 들려온 쪽은 라크하가 아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레이나가 보였다.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남매라고 했던 말부터 들은 건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데미안이 그 마물을 설득할 수 있다니요?”

다행히 내가 혼자 중얼거렸던 말은 듣지 못한 듯했다.


“그게 말이죠…….”

나는 곧바로 대답해주지 못하고 망설였다.

테오의 부고 소식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레이나에게 말해줬을 것이다.

내가 레이나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도, 데미안에 대해 알리기 위해서였으니까.


“……저는 괜찮으니, 말해주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력감을 느낄 바엔 전부 알고 싶어요.”

레이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라크하가 나를 달래듯 내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괜찮을 거라고 북돋아 주는 것 같은 손길에 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데미안은 녹스, 라는 마물의 소환자예요. 그러니 데미안이 녹스를 제어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인명 피해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데미안은 나와 라크하를 피해 다니는 상황이어서 말을 해 볼 기회도 없었다.


“……만약 데미안이 그 마물을 제어할 수 없다고 한다면요?”

“소환자를 죽여야 녹스가 사라지니 데미안을 죽이는 게 불가피한 일이 되는 거지.”

라크하가 나를 대신해서 레이나의 질문에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데미안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레이나의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레이나가 뼈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이불자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레이나는 입을 열었다.


“……제 친구를 죽인 마물을 소환한 사람이 죽어야 해결된다니 잘됐네요. 차라리 그게 낫겠네요.”

입술을 빼뚜름하게 끌어올린 레이나가 조소하듯 중얼거렸다.

데미안을 남처럼 생각하며 냉정하게 말하는 레이나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데미안이 동생인 걸 몰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 테니까.

죄책감이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내 숨통을 옥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얘기를 마무리할 순 없었다.


“데미안이 레이나 님의 동생이라고 해도요?”

“메이아!”

내가 지금 같은 상황에 데미안이 레이나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밝힐 줄 몰랐는지 라크하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라크하의 마음은 알겠다. 데미안이 제 동생이라는 걸 레이나가 알게 된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레이나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상황을 마무리 짓는다면 평생을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갈 것 같았다.


“마, 말도 안 돼요. 데미안이…… 제 동생이라니요?”

충격을 받은 듯 레이나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라크하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그쪽이 들은 그대로야.”

“…….”

후두둑. 투명한 눈물이 방울진 채 아래로 떨어졌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레이나의 모습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요란하게 내리던 비가 조금씩 그쳐갈 때 즈음, 레이나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레이나의 얼굴은 큰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 공허해 보였다.


“……이제야 전부 이해가 되네요.”

레이나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레이나의 충격이 얼마나 큰지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데미안이랑은…… 제가 기회가 된다면 대화를 해볼게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든 레이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레이나가 감정을 가다듬는 듯 숨을 길게 내뱉더니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오늘 추태를 부려서 죄송해요, 메이아 님. 그리고…….”

레이나가 말끝을 흐리더니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을 꺼냈다.


“공작님께선 데미안을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데미안의 처분에 대한 건 보류하도록 하지.”

라크하라면 가감 없이 죽이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대신 데미안을 만난다면, 우선 공작가로 데리고 와. 나 역시 그놈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말이야.”

그저 데미안을 불러오기 위한 속임수일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까.

레이나를 바라보는 라크하의 눈빛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분간하기 어려웠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할게요. 오늘 신세를 많이 졌어요.”

대답을 미룬 레이나가 라크하와 나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러자 라크하가 줄곧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트라슈를 향해 눈짓했다.

단번에 라크하의 눈짓을 알아들은 파트라슈가 비틀거리는 레이나를 부축했다.


“아드리엔 영애, 저택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이나는 비틀거리며 기사와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걸어나가는 레이나의 뒷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항상 밝았던 레이나의 다른 모습에 마음이 쓰라렸다.

***

아인티아 저택에서 돌아온 이후로, 레이나는 제 방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레이나는 테오의 장례식만큼은 참석하고 싶었지만, 데미안과 메이아의 경고 때문이라도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테오의 장례식은 레이나 없이 씁쓸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나는 방 밖을 나섰다. 주기적으로 입궁하기로 했던 날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황궁에 갈 힘도 없었지만,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이미 한차례 날짜를 미루기도 했었기에 더는 입궁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레이나는 곧 쓰러질 듯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검은색 드레스가 나풀거렸다.

입궁할 때 입는 드레스라기엔 칙칙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레이나는 장례식을 참석하지 못한 대신 이런 식으로라도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었다.

레이나가 황실 마차 쪽으로 다가가자, 황실 기사단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틀만이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레이나 님?”

그저 인사를 하는 것뿐인데, 레이나는 순간 가슴이 울컥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실컷 슬퍼하고, 울면서 마음을 추슬렀다고 생각했는데, 황실 기사의 복장을 보니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황실 기사단의 얼굴 위로 테오가 겹쳐 보였다. 테오 역시 황실 기사단이었으니까.


“레이나 님?”

기사가 의아한 목소리로 레이나를 불렀다. 하지만 레이나는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밀었던 기사를 두고 홀로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해요.”

“네, 알겠습니다.”

쿵 하고 마차 문이 닫히자 레이나는 몸을 숙여 무릎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눈을 질끈 감자, 테오와 지냈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그의 목소리가 귓속에 웅웅 울렸다.
 


-멍청아, 울지 마. 내가 꼭 황실 기사단이 되어서 꼭 네 동생을 찾아줄게!


-봐, 내가 황실 기사단이 꼭 되겠다고 했지? 이제 네 동생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멍청이는 너야, 테오.”

동생을 찾으면 뭐 해. 이번엔 네가 없잖아.

레이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곧 황제 폐하를 뵐 텐데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갈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든 레이나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마차 창문을 열었다.


“후우.”

레이나는 바람을 맞으며 긴 숨을 뱉어냈다. 최근에 비가 온 탓에 서늘한 바람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한결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때,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던 레이나의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레이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자, 잠시 마차를 세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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