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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이곳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하거든 (72/136)


72. 이곳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하거든
2022.07.08.


라크하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얼굴을 잔뜩 구겼다. 황제가 메이아를 황궁으로 데려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시, 식사만 하신다고 했으니 곧 있으면 오실 겁니다. 그러니 기다리심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롬은 라크하의 눈치를 보며 어렵게 말을 끝맺었다. 라크하는 외투를 시롬에게 건네준 뒤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직접 황궁까지 찾아가고 싶었지만, 라크하는 충동을 꾹 눌러냈다. 어차피 황궁에 찾아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손을 들어 이마를 짚은 라크하는 긴 한숨을 뱉어냈다.

키네스가 억지로 메이아를 끌고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롬이 전달한 보고는 뜻밖이었다.

메이아도 동의해서 황궁으로 따라간 것일 줄이야.


‘더 거슬려.’

이럴 줄 알았다면 메이아에게 진작 얘기를 꺼내 봤어야 했다. 화려한 불꽃이 새카만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그날, 어째서 밀어내지 않고 키스를 받아들인 거냐고.

상황과 타이밍이 여의치 않아 대화를 미룬 게 결국 라크하의 발목을 잡았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메이아 님을 돌려보낸다는 확답을 받았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한껏 가라앉은 집무실 분위기에 시롬이 말을 덧붙였으나 라크하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라크하는 더욱 초조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황제는 메이아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 분명 그녀에게 달콤한 제안을 할 것이다.


‘만에 하나 메이아가 황제의 제안에 응해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매번 손에 잡힐 듯하면 금방이라도 다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슬그머니 창문 밖을 바라보던 시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황실 마차가 오는 것 같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라크하가 시롬이 서 있던 창가로 향했다. 마차에 새겨진 늑대의 문양, 황실 마차였다.


“나가봐야겠군.”

하지만 라크하는 곧장 집무실을 나가지 못하고 창틀을 붙잡았다.

메이아가 마차에 내리고 나서도 키네스와 몇 마디 더 주고받는 듯하더니 이내 마차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홀린 것처럼.

그 모습에 라크하는 메이아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할 새도 없었다. 머릿속이 뜨겁게 물들며 질투심이 들끓었다.


 

***

나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곧장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작 키네스와 대화를 한 것뿐인데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냥 이대로 방으로 들어가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더 빨리 걸음을 재촉하는데 사용인들의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왜 그러는 거지?’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 싶어서 괜히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것도 잠시, 금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내 방문 앞에 서서 살벌한 기운을 폴폴 풍기는 라크하가 보였다.


“공작님?”

내 부름에 라크하가 나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메이아, 뭘 하다가 이제 오는 거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아, 그게…….”

사용인들이 흘긋대는 시선 때문에 섣불리 말하기 꺼려졌다. 황제와 관련된 얘기이기도 했으니까.


“음…… 일단 방에 가서 얘기할까요?”

내가 슬그머니 사용인들을 눈짓하며 묻자, 라크하가 후, 하고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내 손목을 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라크하는 나를 두고 머리를 헝클었다.

평소와 달리 조금 거친 행동을 보니 라크하가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은지가 느껴졌다.


“내 인내심이 끊어질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나를 향한 보라색 눈동자가 고요하게 들끓고 있었다.


“그놈과 무슨 일이 있었어?”

“그냥 딱 식사만 하고 왔어요. 별일 없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라크하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 그놈이랑 단둘이 있었다는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심기가 잔뜩 꼬인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흉흉한 그 기세에 나는 라크하의 손을 토닥이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냥 공작님께서 잘해주시냐, 쌍둥이들은 무사하냐…… 뭐, 이런 안부 인사들만 나누고 왔어요.”

나름 잘 둘러댄 것 같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아득, 라크하가 이를 악무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그렇다고 ‘황제가 공작님 대신 자기는 어떠냐는데요?’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눈과 마주한 순간 나는 더욱 진실을 숨겨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정말 그 외에 어떠한 일도 없었다고?”

라크하가 힘줄이 불거진 손으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나도 모르게 키네스와 손을 잡았던 일을 떠올리고 흠칫하자 라크하의 표정이 삽시간에 살벌해졌다.


“그래, 그놈이 가만히 둘 리가 없지. 여기에 손을 댔어?”

“아…….”

내가 대답이 없자 라크하가 낮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고는 내 손등 위로 제 입술을 거침없이 가져다 댔다.

촉, 하는 다소 선정적인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손바닥에, 그리고 손목 안쪽까지 그의 입술이 살결을 타고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뜨거운 숨결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정전기라도 일어난 듯 몸이 움찔거렸다. 제 흔적을 남기듯 집요한 입맞춤이었다.


“흡.”

나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미묘한 신음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욕구로 일렁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정확히 나에게 향했다. 불그스름한 입술이 호를 그리며 우아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휘감아 안은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또, 어디에 손을 댔어?”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이었다. 흥분한 듯이 거칠어진 숨소리에 내가 그의 품을 밀어내며 다시 입을 뗐다.

몸이 달뜨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이, 이제 정말 없어요.”

“여기는?”

라크하가 내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이미 열이 오른 탓인지 은근한 손길만으로도 뱃속이 간질거리며 뜨거워졌다.

나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손을 꽉 말아쥐었다.


“……전혀요.”

“다행이네.”

그의 목소리가 한결 느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먹잇감을 탐하는 맹수의 눈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곳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하거든.”

입술을 훑는 손길만으로도 절로 발끝이 곱아들었다.

두근, 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살짝 뒤로 뺐지만 등 뒤로는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내 표정을 샅샅이 훑은 수려한 그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보라색 눈동자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가 느릿하게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서로의 코끝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호흡이 떨리며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그의 가슴팍 위를 짚었다.


“그대가 손을 둘 곳은 거기가 아니라…….”

내 손목을 부드럽게 거머쥔 그가 자신의 목을 감싸 안게 했다. 불그스름한 입술이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혹적으로 휘었다.


“여기야.”

“지, 지금 무슨…….”

화끈, 얼굴에 열이 잔뜩 올랐다. 발갛게 물든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나와 라크하의 거리는 피하기 힘들 정도로 가까웠다.


“왜? 그때 싫었어?”

라크하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려 내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입술을 훑듯 노골적인 시선에 입을 맞췄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뜨겁고, 부드럽고, 달콤하던 그 순간이.

싫었을 리가 없다. 그때의 나는 라크하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고, 그를 원했다.


“……싫지 않았어요.”

입술이 맞붙는 건 한순간이었다. 맞닿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몸과 달리 입술은 부드러웠다.


 
곧이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듯한 감각에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눈앞의 맹렬한 포식자는 입술이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나를 휘감았다.

라크하는 제 존재감을 과시하듯 축축한 살갗을 거침없이 헤집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한지 그는 오랫동안 갈증을 참아온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남김없이 탐했다.

뜨겁고 달콤한 감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리자 라크하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몸이 빈틈없이 겹쳐지며 그가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 완전히 그에게 몸을 맡기던 그 순간, 그가 나를 가볍게 안아올렸다.


“내, 내려주세요!”

깜짝 놀란 내가 라크하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라크하를 꽉 껴안는 내 몸짓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렇지.”

당황해하는 나를 달래려는 듯 라크하가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방금 전까지 나누었던 뜨거운 열기가 볼에 닿자 몸이 움찔거렸다.


“그만…….”

“아, 볼보다는 입술이 낫다는 건가?”

“아뇨!”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쏘아보았다. 라크하가 짓궂게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럼 나와 한 키스가 별로였다는 의미였군.”

“공작님!”

이 남자가 정말!


“알겠어.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노력해 보려고.”

“……!”

라크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침대에 눕혀졌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지며 수려한 그의 얼굴이 눈에 담겼다.


“싫으면 밀쳐내.”

그의 입술이 또 한 번 나를 뒤덮었다. 이미 한 차례의 진한 키스로 입술이 부풀어 올라 느껴지는 감각은 더욱 선명했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베어 문 그가 더욱 깊게 스며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숨결이 뒤엉켰다.

숨이 가빠질 때 즈음, 얽힌 입술이 떨어지며 고요한 방에 야릇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입술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후끈 공기가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공작님, 여기까지만-.”

“라크하.”

내 말허리를 부드럽게 자른 그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목덜미 위로 흩어지는 뜨거운 숨결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라크하라고 불러줘.”

종종 무심코 부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불러보라고 하니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좀…….”

“응?”

라크하가 다정한 음성으로 나를 채근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욕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얼른.”

나를 조르듯 바라보는 얼굴이 야릇했다. 나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입술을 뗐다.


“라, 라크하.”

“다시 불러줘.”

“……라크하.”

“미치겠군.”

라크하가 낮게 중얼거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더니 긴 한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끙, 하는 침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라크하?”

내 부름과 함께 라크하가 벌떡 일어나더니 휙 내 머리 위로 이불을 덮었다. 그러면서 눈앞이 어두컴컴해졌다.


“가, 갑자기 이불은 왜…….”

이불을 내리려고 바르작거리던 때였다.


“잠시 그대로 있어.”

“네? 왜요?”

“……참기 힘드니까.”

“아.”

나는 이불을 움켜쥔 채 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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