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그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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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그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2022.07.01.
평안한 분위기인 아인티아 공작가와 달리 황궁은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미 해가 산등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키네스는 집무실에 남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키네스의 보좌관 비에고는 그의 곁에 남아 업무를 도왔다. 이만 퇴근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키네스가 밤늦게까지 일할 때는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줄곧 서류를 살피던 키네스가 심란한 한숨을 내뱉었다.
“폐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비에고의 질문에 키네스는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대다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신경이 쓰이는군.”
“아드리엔 영애 말입니까?”
“아니.”
키네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인이 아드리엔 영애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럼 무엇이 신경 쓰이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키네스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신경쓰이는 사람이 메이아인지 라크하인지 혼란스러웠던 탓이었다.
“폐하?”
“……생각을 더 해 봐야겠다.”
키네스는 불쾌한 감정들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시작은 분명 리베르탄에서 공작과 입을 맞추고 있던 메이아를 본 순간이었다.
그 순간, 키네스는 속이 뒤집힐 것처럼 몹시 불쾌했다. 당장이라도 저 둘을 떼어놓고 메이아를 제 옆에 데려오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든 거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왜 그렇게까지 감정이 요동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작과 메이아의 사이가 깊어진다고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원하는 건 메이아의 축복뿐이니까. 게다가 공작의 약혼자인 메이아를 완전히 제 곁에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고.
게다가 그녀에게 축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에겐 ‘레이나 아드리엔’이라는 대체 수단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키네스는 메이아를 대신하여 레이나를 곁에 두는 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대체 왜?’
키네스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져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옆에서 자신을 보좌해왔던 비에고라면 알지 않을까?
문득 드는 생각에 결국, 키네스는 비에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비에고.”
“부르셨습니까 폐하.”
“오늘 키스를 했다. 그런데 굉장히 기분이 나쁘더군.”
“크흡.”
갑작스러운 키네스의 키스 후일담에 비에고는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비에고는 헛기침을 하며 대꾸했다.
“사, 상대가 별로셨습니까?”
“아, 내가 누군지 말을 안 했군. 공작과 성녀가 키스하는 걸 보고 나서 기분이 불쾌했다는 말이다.”
뒤늦게 오해가 풀린 비에고는 괜히 열이 오른 제 뺨을 손으로 식혔다.
“그렇군요……. 그 일 때문에 심경이 복잡하셨던 겁니까?”
“그래, 둘을 떼어놓고 싶더군.”
“아드리엔 영애와 함께 계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랬다만, 이상하게도 아드리엔 영애는 안중에도 없었어.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비에고가 턱을 매만지며 눈가를 좁혔다. 이전부터 키네스가 메이아와 관련된 일로는 남다른 행동을 보이긴 했다.
키네스는 자신이 계획하고 목표를 세운 일에 대해 언제나 이성적으로 그것을 처리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밖으로 나갔던 날도, 탄신 연회 때 첫 춤 상대를 바꾼 것도. 전부 그가 알고 있던 키네스답지 않게 충동적이었다.
그래도 꾸준히 아드리엔 영애는 곁에 두려고 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키네스가 메이아에게 아쉬움과 미련이 남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드리엔 영애가 안중에도 없었다고 말한다는 건…….
비에고는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혹시 메이아 님에게 마음이 생기신 게 아닙니까?”
비에고가 내린 결론에 키네스는 일순 흠칫했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말도 안 되지.”
“하지만 메이아 님의 능력만 원하시는 거라면 아드리엔 영애로도 충분하시지 않습니까.”
“…….”
“폐하께서 아드리엔 영애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메이아 님이 신경 쓰이셨다면 저는 그보다 확실한 대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키네스는 쉬이 반론하지 못하고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키네스의 복잡한 마음을 대변하듯 그의 손에 쥔 서류가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보던 비에고가 키네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메이아 님을 따로 만나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혼자 고민할 바에는 그래, 차라리 그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비에고의 제안이 꽤 그럴싸하다고 느낀 키네스가 그의 말에 동의했다. 동시에, 키네스의 얼굴에 미약한 설렘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키네스의 모습에 비에고가 더욱 적극적으로 조언을 곁들였다.
“일전에 폐하를 경계하는 것 같다고 하셨으니 최대한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배제하고 대화를 나눠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폐하에 대한 메이아 님의 감정이 어떤지도 물어보고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미소까지 띠는 키네스의 얼굴을 보며 비에고가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아인티아 공작과 메이아 님은 약혼한 사이이지 않습니까.”
“약혼한 사이에 불과한 거지.”
키네스는 턱을 괸 채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업무 책상의 나뭇결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쓸다가 살짝 파인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든 빈틈을 만들 수 있는.”
***
햇볕도 좋고 바람도 적당하고, 너무 덥지도 않은 날씨. 평온하기 그지없는 아침이었다.
리타에게서 무척이나 파격적인 소식을 듣지만 않았더라면.
“누가 왔다고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차라리 내가 잘못 들은 거였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폐, 폐하께서요?”
“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굳고 말았다. 설마 나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니야, 나를 보려고 했으면 차라리 황궁으로 불렀겠지.’
키네스가 나를 보려고 아인티아 저택을 방문하기에는 라크하라는 큰 걸림돌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라크하를 만나기 위해 방문했을 확률이 더 높았다.
“공작님을 만나러 오셨나 봐요?”
“시터님을 뵈러 오셨다고…….”
정말 나를 보러 왔다고?
“거짓말이라고 해줘요…….”
현실을 부정하는 나를 리타가 애잔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도무지 키네스가 무슨 생각으로 날 찾아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키네스와 레이나가 함께 있는 걸 내 눈으로 봤었다. 그리고 델카인을 찾으러 떠나는 우리를 보고도 따라오지 않았었지.
‘결국, 원작대로 레이나랑 불꽃놀이를 보러 갔다는 거잖아.’
원작대로라면 키네스는 레이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해야 했다. 그날 레이나의 능력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그러다가 진정으로 레이나를 사랑하게 되는 건데…….
‘레이나랑 시간을 보내도 부족할 시기에 나를 보러 온다고?’
심지어 사전에 기별 하나 없이 무작정 아인티아 저택을 찾아올 줄이야.
키네스의 방문에 라크하도 꽤 심기가 뒤틀렸을 게 뻔했다. 어쩌면 이미 키네스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공작님은 어디 계세요?”
“오늘 오전에 펠리르 님과 외출하셨어요. 얼핏 펠리르 님 가게에 간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결국, 펠리르가 라크하에게 같이 가게에 가달라고 조르는 데 성공한 듯했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냐…….’
타이밍도 참 거지같지. 속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우러나왔다.
리타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질문했다.
“어떻게 할까요?”
“후, 잠시만요.”
일단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나는 이마를 짚은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전에 만났던 키네스는 내 능력에 대해 깊게 대화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내가 경계를 하고 침묵을 고수한 탓에 직설적으로 얘기를 꺼내지 못한 것 같지만.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랐다. 그때는 어떻게든 원작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지금은 맞서기로 했고 도망칠 계획도 접은 상황이니까.
‘그래, 이번 기회에 키네스와 한번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자.’
내 자초지종을 설명해서 키네스를 설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마침 키네스가 레이나의 능력을 알게 됐을 테니 시기도 적절했다.
키네스가 계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대화를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으니까.
“폐하께서는 응접실에 계시는 건가요?”
“아뇨, 시터님을 마차로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주인이 없는 저택에 있을 수는 없다고…….”
이 정도면 일부러 라크하가 없는 걸 알고 온 거 아니야?
***
저 멀리 화려한 마차와 수많은 호위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사람들 사이에서의 키네스의 존재감은 뚜렷했다.
기필코 오늘 키네스와 나의 관계를 청산하리라.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발걸음을 옮겼다.
키네스의 앞에는 허리를 숙인 채 곤란해하는 시롬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씩 들려왔다.
“최근에 아가씨와 도련님의 일도 그렇고, 아인티아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있어 메이아 님의 외출이 염려됩니다.”
“황실의 호위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해가 지기 전에는 무사히 메이아 양을 저택으로 돌려보낼 테니 염려 말도록.”
불쌍한 시롬. 이젠 키네스에게 치이고 있구나. 하지만 애석하게도 키네스는 나를 데려가겠다고 작정하고 찾아온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호위들을 이렇게 많이 데리고 방문할 리가 없었다.
“아, 메이아 양.”
키네스가 나를 발견하고는 어쩐지 밝아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시롬의 낯빛은 무척이나 어두워졌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갑작스럽게 방문해서 놀랐겠군.”
“네, 조금요.”
조금은 무슨, 놀라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은 그대와 긴밀히 나누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다. 일전에 함께 식사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으니.”
“그렇군요. 마침 잘됐네요. 드릴 말씀이 있던 참이었거든요.”
“시기가 딱 맞았군.”
칼을 갈고 있는 내 속도 모르고 키네스가 붉은 눈동자를 휘며 웃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자 그의 금빛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남자 주인공답게 확실히 외모 하나는 뒤지지 않았다.
키네스가 내 시선에 맞춰 살짝 몸을 숙이더니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마차에 타지.”
***
키네스와 식사를 한다면 얼마 먹지도 못하고 대화만 간신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황궁에서의 식사는 내가 잠시 여기 온 목적을 잃을 만큼 근사했다.
‘와, 어쩜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스테이크와 함께 곁들인 와인은 와인 맛을 모르는 나도 인정할 만큼 환상적이었다.
그 맛에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음식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메이아 양.”
차분한 키네스의 목소리에 신나게 고기를 썰어 먹던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정신 차려! 메이아. 넌 식사하러 온 게 아니라고.’
먹을 거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더니. 하마터면 이대로 무장해제가 될 뻔했다.
나는 언제 흥분해서 먹고 있었냐는 듯 차분히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네, 부르셨나요?”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를 꺼내려는 거겠지?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이어질 키네스의 말을 기다렸다.
키네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면 조금 실례가 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군.”
“아뇨,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돼요.”
역시, 내 능력에 관한 얘기를 꺼내려는 게 틀림…….
“그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기색을 숨길 새도 없이 키네스를 쳐다봤다.
뭘 마시거나 먹고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사레가 걸리거나 와인을 뿜을 뻔했다.
나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고, 키네스를 향해 입을 뗐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솔직하게 얘기해줬으면 좋겠군.”
키네스의 얼굴에 약간의 불만이 서려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키네스를 무척 싫어하는 티를 내고 다닌 줄 알겠네. 아니, 잠깐. 내가 그랬던가?
생각해 보니 찔리는 구석이 몇 개 있긴 했다. 피하는 건 기본이었고, 호의를 거절하거나 철벽을 치기도 했으니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키네스의 입장에서는 조금……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싫어하든 말든 키네스가 신경 쓸 이유가 있어?’
차라리 능력 얘기를 먼저 꺼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키네스도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지금 키네스가 한 질문은 무어라 대답하기에 곤란했다.
내 대답이 늦어지자 키네스가 쓰게 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
“듣지 않아도 대답을 알 것 같군. 이유라도 말해줄 수 있나?”
이제야 정말 본격적으로 얘기할 때가 온 것 같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제 능력 때문이에요.”
와인을 마시려던 키네스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키네스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능력 얘기에 호기심을 보일 줄 알았던 키네스는 오히려 입을 꾹 다물었다.
키네스는 어떤 말을 꺼낼지 고민하는 듯 한참 동안 와인잔만 흔들다가,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내키지도 않는 얘기를 억지로 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오늘 이 얘기를 하러 온 거예요.”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가 나에게 향했다. 내가 미끼를 던졌으니 얼른 잡아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키네스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이미 그대의 능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 그러니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돼.”
“제가 축복을 드리지 않고 신전을 도망쳤던 이유에 대해서도요?”
그 순간, 키네스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원작에서도 메이아가 키네스에게 마지막 축복을 내려주기 전까지 아무도 몰랐던 내용이었다. 그러니 키네스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내게 그런 얘기들을 꺼내는 이유가 뭐지?”
내가 생각했던 키네스의 반응과 달랐다. 분명 뭐 하나라도 알아내려고 일부러 내 능력을 언급하던 사람이었는데.
“폐하께서 늘 궁금해하시던 내용이지 않나요?”
“그렇긴 하다만…… 여태껏 나를 피하다가 능력 얘기를 꺼내는 게 갑작스럽군.”
“폐하께 한 번쯤은 꼭 해야 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키네스와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완고하게 쳐다보자 키네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궁금하던 얘기이긴 했으니 말해 봐.”
“그전에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어요.”
“무엇을?”
“불면증 말고 다른 증상은 없으신가요?”
원작이 뒤틀리면서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면 곤란했다. 그땐 빼도 박도 못하게 내 능력이 필요하게 될 테니까.
키네스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내가 직설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다른 증세를 묻는다는 건 앞으로 다른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역시 남주인공이 아니랄까 봐 눈치 하나는 빨랐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신력의 부작용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건 불면증만 겪고 있다는 의미인 거니까.
“네, 그러니 앞으로 신력을 쓰는 일은 자제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걸 알면서도 내게 축복을 내리지 않고 신전에서 도망친 이유는 뭐지?”
“그건…….”
여태껏 숨겨왔던 얘기를 꺼내려고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폐하께 축복을 내리게 되면 제가 영원한 잠에 빠지기 때문이에요.”
“영원한 잠이라고?”
“네, 다르게 말하면…….”
나는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킨 뒤 차분히 말을 끝맺었다.
“죽음이요.”
붉은 눈동자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