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제발 이곳에 오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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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제발 이곳에 오지 말기를
2022.06.10.
갑작스러운 접촉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나와 라크하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펠리르 씨?”
일전에 깔끔하게 꽁지 머리를 하고 있던 머리가 완전히 흐트러지고, 복장도 어딘가에 찢긴 듯 엉망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 역시 아가씨였구나! 아가씨, 라크하! 라크하는 어디 있어? 저택에 있어?”
펠리르가 감격한 얼굴로 내 팔을 더욱 세게 잡았다.
로브를 쓰고 있어서인지,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라크하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내 앞을 가리켰다.
“여, 여기요.”
“라크하!”
휙 돌아본 펠리르가 순식간에 내 팔을 놓더니 라크하를 껴안을 듯이 양팔을 뻗었다.
흡사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라크하가 펠리르의 이마를 꾹 눌러 밀어내며 눈물겨운 조우는 저지되었다.
그래도 펠리르는 제 이마를 누르는 라크하의 손을 꼭 부여잡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친구야…… 너무 보고 싶었어. 나 죽을 뻔했다고.”
“또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정말이란 말이야!”
“내가 그 소리에 몇 번이나 속아 넘어갔더라.”
이러다 정말 펠리르가 울겠다, 싶을 때 즈음이었다.
주르륵. 글썽이던 펠리르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난데없는 펠리르의 눈물에 나는 입을 뻐끔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펠리르는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지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내 조수 어떡해. 어떡하냐…… 나 좀 도와줘…….”
펠리르가 라크하의 팔에 매달린 채 대성통곡을 했다.
성인 남자가 아이처럼 울고 있으니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레 우리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럴수록 라크하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갔다. 하지만 펠리르는 라크하의 표정 따위를 볼 여력이 없는 듯했다.
결국, 나는 마지못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 우리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를 나눌까요?”
***
얼떨결에 급하게 들어온 디저트 카페.
계속해서 흐느끼는 펠리르 때문에 어떤 정신으로 주문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자마자 눈물바람인 거지?
펠리르가 진정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참 후, 펠리르는 제 앞에 과일주스를 한 번에 들이켠 뒤 긴 숨을 뱉어냈다.
그제야 안정을 되찾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보통 일이 아닌 거겠지?’
조수와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
안쓰럽게 펠리르를 바라보는 나와는 달리 라크하는 줄곧 표정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친구 사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심한 모습이었다.
펠리르한테 조금만 더 다정하게 대해주지. 라크하도 참 매정하다니까.
저런 사람이 나한테는 다정한 게 신기하기도……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마터면, 또 라크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힐 뻔했다. 나는 고개를 힘차게 내저으며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많이 말랐어?”
“큽.”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라크하의 다정한 물음에 나는 음료를 뿜을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흠흠, 갑자기 목이 타서요.”
“더 시켜줄까?”
그 관심은 펠리르한테나 주라고!
펠리르가 신기한 생명체라도 본다는 듯 라크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더 민망해져 나는 황급히 화제를 꺼냈다.
“그, 그나저나 펠리르 씨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그 와중에도 나만 쳐다보는 라크하를 향해 나는 펠리르와 대화를 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결국, 라크하는 내 채근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선뜻 말하기 어려운 건지 펠리르는 심호흡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내 조수가 녹스에게 당한 것 같아.”
녹스가 뭐지?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도록 해.”
하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태연하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 모습에 펠리르가 입술을 깨물더니 쾅,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펠리르의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정말이라고! 내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치겠어!”
“……그건 전설에 불과해.”
아니, 그런 척을 하는 걸까?
테이블 아래로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게 분노로 인한 건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대체 녹스라는 게 뭐기에?
도무지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끼어들기에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각했다.
“내가 봤다면? 그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면? 겨우 도망쳐 나온 거라고!”
“잘못 본 거겠지.”
“직접 제 입으로 말했어, 녹스라고!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솟아오르는……!”
흥분해서 목소리를 키우던 펠리르가 일순 입을 다물더니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러고는 후, 하고 숨을 길게 내뱉으며 털썩 자리에 앉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도 북쪽 숲에서 들고 온 검은 생명체가 녹스일 줄 어떻게 알았겠어…….”
녹스는 모르지만 검은 생명체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펠리르의 가게에 갔을 때 조수가 그걸 잡으려고 실랑이를 벌였으니까.
‘그 이상한 생명체한테 당했다고?’
입안이 씁쓸했다. 나는 안타까운 얼굴로 펠리르를 바라보았다.
조수가 당했다. 그게 죽음을 의미하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섣불리 위로하기 망설여졌다.
그런데 돌연 펠리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가씨.”
“네?”
“아가씨라면 내 조수를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
펠리르가 내게 몸을 바짝 들이밀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라크하가 나를 보호하려는 듯 내 앞에 팔을 뻗었다.
“메이아까지 휘말리게 하지 마.”
“어차피 그놈, 이미 아가씨에 대해 알고 있어. 그리고 전설대로라면 아가씨를 가만히 둘 것 같아?”
다시 몸을 뒤로 물린 펠리르가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
무어라 할 줄 알았던 라크하는 예상 외로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잠자코 있는 건데?’
지금 같을 때 헛소리는 하지 말라고 으르렁대야지!
펠리르의 말을 암묵적으로 긍정하는 듯한 모습에 가슴이 서늘했다.
녹스라는 게 뭔데 나를 알고, 나를 가만히 둘 것 같지 않다는 건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펠리르에게 질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설명이라도 조금 해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이지.”
내가 관심을 보이자 펠리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펠리르는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차분하게 내게 설명을 해주었다.
“녹스는 흑마법의 기원지에서 태어난 존재야. 몇천 년 전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제국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테리투스의 힘으로 봉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데미안의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모두 생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뭐, 데미안은 라크하와 깊게 얽혀 있으니 내가 모를 수도 있었다. 원작에서 라크하가 나온 부분은 거의 읽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했으니까.
이건 원작에 숨겨져 있던 내용이거나 일어나지 않았던 일인가?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는데 돌연 다른 가정이 떠올랐다.
‘아니지, 녹스가 마물일 수도 있잖아.’
원작에서 레이나와 키네스를 괴롭혔던 건 라크하와 마물이다.
나는 녹스가 마물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물었다.
“그럼 그…… 녹스라는 게 마물인 건가요?”
“응, 마물이라고도 생각하는 게 쉬울 거야. 지금 그 마물이…….”
펠리르는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울먹이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내 조수의 몸에 들어앉아서 조종을 하고 있는 것 같고.”
펠리르의 대답을 들은 순간, 충격으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원작의 후반부 즈음, 라크하가 했던 행동이 떠오른 탓이었다.
마물 떼를 끌고 와서 황실을 공격했던…… 무모한 행동이.
‘설마…… 그때의 라크하도 조종을 당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
델카인이 세웠던 계획은 리베르탄으로 같이 뛰어 들어간 다음에 갈라지자는 것이었다.
골목길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잠복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델카인이 뛰자는 신호를 보내자마자 아이샤는 곧장 발을 돌려 왼쪽 골목길로 뛰어갔다.
“야, 어디가!”
경악한 델카인이 외쳤으나 이미 아이샤는 최선을 다해 뛰어가는 중이었다.
“도망친다! 잡아!”
곧이어 들려오는 분주한 발걸음 소리에 델카인도 황급히 홀로 리베르탄으로 달렸다.
그래도 아이샤라면 어떻게든 잘 빠져나가 시계탑으로 올 거라고 믿으면서.
‘일단 붙잡히지 않는 게 우선이야.’
누가 쫓아오는지, 몇 명이 따라오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주먹을 꽉 말아쥔 델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어른보다 빠를 수는 없다.
델카인은 달리면서혹시 모를 도움이라도 요청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뛰고 있기도 하고 소란이 아직 크지는 않은 것 같아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결국, 최선을 다해서 죽기 살기로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쪽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애석하게도 발걸음 소리도, 목소리도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델카인은 숨을 헐떡이며 시계탑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작게 보이던 시계탑이 가까워진 것 같기도 했다. 시계탑까지 거리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달리면 돼.
목에서 피맛이 느껴질 정도로 숨이 가빠왔지만 델카인은 꾹 참고 달렸다.
그리고 시계탑에 가까워진 델카인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도와주세요!”
하지만 시계탑은 고요했다. 분명 황실 경비병이 있을 텐데.
이상함을 감지한 델카인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천천히 느려지던 발걸음은 이내 뚝 멈추었다.
델카인은 허망한 표정으로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아…….”
없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델카인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속으로 빌었다.
아이샤는…… 제발 이곳에 오지 말기를.
반항기 넘치고 엉뚱하던 평소의 아이샤의 모습이기를.
이윽고 델카인의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
뒤에서 어디 가냐는 델카인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온 것 같은데?
아이샤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쫓아오는 여러 인기척에 금세 그 생각을 지웠다.
‘뭐든 시계탑 앞에서 만나면 되는 거 아니야!’
굳이 왜 거기서 만나자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델카인의 말대로 행동해서 나빴던 적은 없었다.
재빠르게 골목 사이를 누비던 아이샤는 시계탑 쪽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너무 돌아가는 것 같은데…….”
차라리 델카인이랑 같은 방향으로 뛰다가 갈라질 걸 그랬나? 델카인의 계획을 제대로 몰랐던 아이샤는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도 그쪽으로 갈까?’
아직 체력이 남아돌던 아이샤가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던 때였다.
“히익!”
바로 옆에 있는 골목에서 튀어나온 괴한에 아이샤가 식겁하며 몸을 아래로 숙여 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냥 델카인 혼자 시계탑에서 기다리라지!’
거기가 안전한 곳이라면 얼마든지 혼자 기다려도 괜찮을 테니까.
아이샤는 다른 방향으로 꺾어 날쌔게 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아이샤의 눈앞에 골목 끄트머리가 보였다.
‘골목만 빠져나오면 여유롭게 시계탑으로 갈 수 있을 거야!’
아이샤가 있는 힘껏 달려 골목 바깥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방심한 아이샤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뭐, 뭐야!”
달랑.
공중에 몸이 들린 아이샤가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괜찮니?”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아이샤의 행동이 일순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