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라크하와 혼담이 오고 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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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라크하와 혼담이 오고 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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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라크하와 혼담이 오고 간 여자
2022.04.25.
축제와 탄신 연회 준비로 제르디아 제국 수도는 어수선하고 활기를 띠었다.
특히 탄신 연회가 열리는 페르타 궁은 외부인과 귀족들로 붐볐다.
그리고 황궁 내부 지리에 대해 잘 모르는 외부인에게는 시종이 따라붙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관례대로 시종은 귀족을 연회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페르타 궁 입구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음?”
긴 복도에 조각상이 놓여 있는 자리. 그 앞에 붉은 머리 남자가 서 있었다.
다른 귀족을 데려다주는 길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남자였다.
‘길이라도 잃으신 건가?’
시종은 붉은 머리 남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물었다.
“혹시 연회장을 찾고 계십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붉은 머리 남자는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툭.
손바닥만 한 갈색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머리 남자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었다.
시종은 서둘러 몸을 굽혀 갈색 주머니를 주워 내밀었다.
“이거-.”
하지만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생기가 있던 시종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이미 지배당한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연회장이 술렁였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쌍둥이들도, 라크하도 아니었다.
“아인티아 공작님의 약혼자라고요?”
“대체 어느 가문의 여식인 거죠?”
그래, 바로 나였다. 연회장에 들어올 때 시종이 나를 약혼자라고 호명한 탓이었다.
뭐, 내가 다른 귀족들 입장이었어도 궁금할 법했다.
얼음 같고 잔혹하기로 유명한 공작에게 약혼자가 생겼다고 하니까.
‘그래도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네.’
얼굴이 뚫릴 것 같은 시선에 내 고개는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도무지 나를 보는 시선들이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눈을 뽑아버리고 싶군.”
옆에서 들려오는 섬뜩하기 그지없는 말에 나는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라크하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불길한 기운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라크하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원한다고? 그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아뇨…… 절대 사양이에요.”
내 순수한 눈망울을 보고 눈을 뽑아달라는 걸로 해석하는 것도 재주였다.
반쯤 질린 눈으로 라크하를 지켜보던 그때였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우렁찬 아이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영애들을 쏘아보며 길길이 날뛰고 있는 아이샤가 보였다.
아이샤는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영애들 앞에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왜 너한테 언니에 대해서 알려줘야 하는데!”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서 물은 것뿐이랍니다.”
뭐야, 내 얘기잖아?
“혹 말씀하시기 곤란한 이유라도 있으신 건가요?”
“맞아요, 비렐 양이 궁금해 하는데 곤란한 질문이 아니라면 알려주실 수 있잖아요.”
기세등등한 아이샤의 태도에 영애들은 수적으로 밀어붙였다.
아이샤의 눈빛이 점차 매서워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공작님, 잠시만 여기 계세요. 제가 가서 아이샤를 데려올게요.”
나는 라크하가 같이 가자고 하기 전에 빠르게 발을 옮겼다.
라크하는 아직 나를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건지 다른 곳을 쳐다볼 뿐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아이샤를 영애들 사이에서 꺼내주러 가던 때였다.
“우리 언니는…… 천사야!”
별안간 아이샤가 불끈 주먹을 쥐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 무언가 머리를 때린 것처럼 멍해졌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델카인이 어떤 영애에게 지나가는 척 주스를 쏟았다.
“꺄악!”
“이런, 실수.”
쌍둥이들과 살짝 떨어진 곳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본 나로선 당황스러웠다.
델카인이 의도적으로 다가가 흘렸던 거니까.
하지만 델카인은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영애의 드레스를 살폈다.
“미안합니다. 비렐 양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제가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네요. 제가 어떻게 하면 비렐 양의 마음이 풀릴까요.”
델카인은 또 저런 사탕 발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효과는 엄청났다. 비렐은 언제 눈을 치켜떴냐는 듯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흐, 흥. 괜찮아요. 드레스는 얼마든지 갈아입으면 되니까요. 다음부터 조심해 주세요.”
“마음까지 넓으시군요.”
델카인이 빙긋 미소 지으며 비렐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 뒤로 무어라 했는지 들려오진 않았다.
하지만 비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건 확연히 보였다.
“그럼 이만. 가자, 아이샤.”
비렐이 비틀거렸으나 미련 없이 등을 보인 델카인이 아이샤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쌍둥이들은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달려왔다.
“형수님, 내가 혼내주고 왔어.”
“언니, 봤어? 쟤, 드레스 엉망 된 거?”
순수한 쌍둥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한숨처럼 웃었다.
이걸 칭찬을 해 줘야 할지. 혼을 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지만 애들이 당하고 사는 것보단 나았다.
“응, 봤어. 잘 혼내줬더라고. 이리 와.”
우리 똥강아지들. 나는 아이샤와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해결하는구나. 이렇게 믿음직할 수가 없다.
아이샤는 그 뒤로도 영웅담이라도 늘어놓듯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가 질려갈 때 즈음, 델카인이 라크하의 행방을 물었다.
“형수님, 그런데 형은 어디 갔어?”
“공작님은 저기에…… 어라?”
라크하와 함께 있었던 자리를 가리켰던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분명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느닷없이 사라진 라크하를 찾으려고 눈을 굴리던 순간이었다.
“!”
이제 막 연회장으로 들어온 레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황급히 다른 곳으로 돌린 나는 쌍둥이들을 향해 물었다.
“얘들아, 일단 저기 디저트를 먼저 먹으러 갈까? 그럼 공작님께서 오실 거야.”
“좋아! 언니는 내가 디저트 좋아하는지 또 어떻게 알고. 역시 최고야.”
“하긴 조금 출출하긴 하네.”
“델카인, 너도 뭘 좀 아네. 출출할 땐 디저트지. 얼른 가자!”
아이샤가 델카인의 팔을 이끌며 빠르게 디저트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샤가 디저트에 많은 관심을 보여서 다행이었다. 쌍둥이들도 최대한 레이나와 엮이지 않는 게 좋으니까.
그렇게 쌍둥이들을 뒤따라가는데, 나를 험담하는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어느 가문의 여식이 아니라 그 노예 출신 시터인가 봐요.”
“어쩐지 빈티가 나는 것 같더니만.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도 숨길 수는 없죠.”
“공작님도 곧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으실 거예요.”
아이샤가 다른 영애들과 내 얘기를 하면서 약혼자라고만 소개됐던 내가 시터라는 게 탄로 난 듯했다.
그런데 아직도 노예 출신 시터라고 알려져 있을 줄이야.
‘내가 쌍둥이들 때문에 참는다.’
쌍둥이들까지 끼어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질 게 뻔하니까.
그럴 바엔 저들끼리 알아서 떠들게 두는 게 나았다.
“아인티아 공작님께서 곧 샤론 양에게 돌아오실 거예요.”
“맞아요. 원래 샤론 양이 아인티아 공작님과 혼담이 오고 갔었잖아요.”
하지만 내 걸음은 뒤이어 들려온 대화에 우뚝 멈췄다.
‘라크하와 혼담이 오고 갔었다고?’
대체 누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달콤한 솜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칼을 지닌 여자를 중심으로 여러 여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여러분이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마음이 놓이네요.”
분홍 머리의 여자가 두 볼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저 여자가 샤론인 것 같았다.
얼핏 봐도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여자였다.
의식할 새도 없이 주먹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
라크하는 눈가를 좁혔다. 얼핏 데미안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금방 인파 속에 묻혀 제대로 본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라크하는 잔뜩 경계를 세운 채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때 라크하의 곁으로 붉은 머리의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라크하.”
“…….”
그에게 뻔뻔하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데미안이었다. 라크하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그러든 말든 데미안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잠시 자리를 옮겨서 대화 좀 하는 건 어때?”
데미안의 물음에 라크하는 메이아가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 메이아는 쌍둥이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지.”
어차피 데미안이 연회장에서 소란을 일으킬 일은 없을 것이었다. 황제의 탄신일을 망치는 건 그야말로 자살을 하는 꼴과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라크하는 데미안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는 중이어서 야외 정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잘 지냈어?”
“그런 자질구레한 대화는 생략했으면 하는데.”
“나를 무시하는 그 태도는 한결같네. 내가 쓴 금기의 흑마법을 얼마 전에 봤으면서도 말이야.”
데미안은 선대 아인티아 공작의 눈에 띄려고 흑마법을 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분께서 그걸 보셨다면 무척이나 기뻐하셨겠지. ‘데미안, 역시 네게 그런 자질이 있는 걸 알았단다.’라고 칭찬을 해주시면서.”
즐겁게 말을 늘어놓던 데미안이 별안간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네가 모든 걸 망쳤지.”
“난 내 사람을 건드리는 걸 용납하지 않으니까.”
라크하는 무감각한 눈으로 데미안을 응시했다.
선대 아인티아 공작부부 때문에 쌍둥이들도, 자신도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가.
그 와중에 데미안을 내버려 둔 이유는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큰 그에게 약간의 동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쌍둥이들과 메이아를 건든다면 가만히 둘 마음은 없었다.
“지금 네놈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니 자각하고 헛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군.”
“너무 경계하지는 마. 오늘은 그저 몇 가지 시험만 해보려고 온 거라서.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가 봐야 하거든.”
별안간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라크하가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라크하는 반사적으로 흑마력을 끌어올려 그것을 쳐냈다.
그 순간, 라크하는 신음을 흘리며 심장 쪽을 잡고 비틀거렸다.
“윽!”
“음, 역시 마력 증폭석인가. 닿지 않았는데도 저릿거리네.”
데미안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마력 증폭석을 내려다보았다.
마력 증폭석은 흑마법사에게 독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흑마법사가 지니고 있는 마력은 시전자를 삼킬 수도 있는 파괴적인 힘이니까.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어.”
숨어 있던 시종에게 명령한 데미안은 몸을 숙여 라크하와 시선을 맞추었다.
“마력 증폭석 근처에서 흑마법을 쓰면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던데. 정말 그래?”
“……닥쳐.”
라크하는 쇳소리가 나는 숨을 뱉어내며 말없이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정말 그런가 보네.”
“…….”
“자, 여기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할게. 만약 네가 그분께 건 금기의 흑마법을 거두면 앞으로 아플 일은 없게 해 줄게. 네 주변 사람들도.”
“……웃기, 는군.”
아직은 협상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라크하를 보며 데미안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라크하에게 등을 돌린 데미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력 증폭석에 닿으면 또 어떻게 되려나. 그것도 궁금한데 누구한테 시험해볼까…… 아, 그 아이가 좋겠네.”
데미안이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리자 시종이 홀린 듯이 페르타 궁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라크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라크하는 이를 악물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