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2022.03.18.
성물을 끼고 있는 손가락이 미묘하게 따끔거려 순간 손을 내려다본 나는 시롬의 비명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라크하가 시롬을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다. 내 능력으로 라크하를 말릴 수 있으니 그저 살짝 접촉만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시터님!”
라크하가 나를 공격할 줄은 몰랐다. 내게 쇄도하는 갈고리 같은 검은 기운을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파지직-! 그저 어딘가에 긁히는 듯한 소음만 내 귀를 마구 긁어댈 뿐. 뭐지?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검은 기운이 장막처럼 펼쳐진 푸른 기운과 맞부딪히며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디서 나온 빛이지……?”
내 몸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뒤늦게 내 몸을 살폈다. 내가 끼고 있던 성물에서 푸른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이게 바로 성물이구나.'
주로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나 얻는 물건인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나는 내게 성물을 가져다준 테리투스를 향해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렇게 안도한 것도 잠시였다.
“성가셔.”
라크하가 시롬을 툭 놓더니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평소에 나에게 말하던 목소리와 완전히 달랐다. 숨을 옥죄는 것만 같은 위압감에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저기…… 공작님. 제가 누군지 알죠?”
“거슬리고.”
“제 말 들리기는 하시…… 헉.”
커다란 손이 내 목을 휘어잡을 듯 뻗어졌다.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뒤로 물러나며 손을 피했다. 빙의한 순간부터 느꼈던 거지만, 역시 메이아가 신체 능력이 나쁘진 않았다.
'그나저나 내 목소리가 안 들리나 보네.'
눈을 가늘게 뜬 채 라크하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초점 없이 탁한 보라색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제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롬이 라크하에게서 살짝 물러나더니 나를 향해 외쳤다.
“시, 시터님! 혹시 공작님께서 소생 마법이라든가, 조종 마법이라든가, 기억 삭제 마법을 쓰셨습니까?”
“기억을 없앴다고 했어요! 금기의 흑마법을 썼다고 했고요!”
“역시 그렇군요. 금기의 흑마법을 쓴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낮부터 이러신 적은 없는데…….”
얼핏 라크하가 금기의 흑마법을 쓰면 망자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고 한 말이 기억이 났다.
“그런데 눈을 감아야 망자의 소리가 들리시는 거 아니었어요?”
“금기의 흑마법을 쓴 날에는 샤키르의 꽃을 사용하시거나 다음날이 되어서야 진정되십니다! 아마 지금은 환각도 보이실 겁니다!”
지금 상태를 샤키르의 꽃으로 진정시킬 수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와 몸만 닿으면 해결될 일이라는 거니까.
“제가 진정시킬 수 있어요!”
“시터님께서 어떻게…… 아, 아니지. 시터님이라면 가능하시겠군요.”
역시 시롬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나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네, 접촉만 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 라크하가 넋을 놓은 채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기회를 잡아야 했다. 나는 조심스레 라크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공작님. 저희 손 한 번 잡아 볼…… 으악!”
성큼. 순식간에 다가온 라크하가 내 목으로 손을 뻗었다. 겨우 피하긴 했으나 목덜미가 서늘했다.
‘손을 잡기는커녕 그냥 목부터 졸리겠는데?’
시롬은 라크하 때문에 차마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내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다행히 라크하는 더 덤벼들지 않았다. 그저 방금 전에도 그랬듯 잡힌 게 없는 손을 다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짝만이라도 닿으면 되는데…….’
몸에 손을 대려고 하면, 바로 공격자세를 취하니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시롬 역시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다른 제안을 했다.
“차라리 제가 시선을 끌어 보겠습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그럼 이걸 지니고 계세요!”
나는 끼고 있던 반지를 벗어 시롬에게 던졌다. 지금 이 순간 성물은 나보단 시선을 끌어야 하는 시롬에게 필요했다. 게다가 라크하의 상태가 심각한 만큼 성물 때문에 내 능력이 제대로 안 통할 수도 있었다. 내가 던진 반지를 낚아챈 시롬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게 뭡니까?”
“성물이에요. 공작님의 공격을 막아줄 거예요.”
“시터님…….”
그렇게 감동 먹은 눈으로 바라 볼 때가 아니라고. 시롬은 비장한 표정으로 반지를 꽉 쥐더니 이내 검을 꺼내 들었다.
“저, 시롬 이라기. 한 몸 불사질러 보겠습니다.”
별안간 검까지 꺼내 드는 열정이 자못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예상외로 검을 꺼내든 효과는 좋았다. 검을 꺼내 들었을 뿐이었는데, 라크하의 시선이 시롬에게 향했다.
“지금입니다! 시터님!”
“아, 네!”
나는 시롬의 신호를 받자마자 라크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라크하가 시롬에게 접근하는 게 더 빨랐다.
“!”
시롬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라크하가 맨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주르륵. 라크하의 손아귀에서 피가 팔등을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는 모습에 시롬이 경악했다.
“미, 미치셨습니까! 공작님! 놓으십시오!”
“……시끄러워.”
놀란 나머지 잠시 굳어 있던 나는 라크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얼른 말려야 해!’
끼익, 거리는 불안한 소리와 함께 곧 검날이 끊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제 한계를 넘어서 휘어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나는 이를 악물고 라크하를 향해 달려가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잡았다!”
그 순간, 검날이 반으로 부서지며 시롬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라크하가 쥐고 있던 검날이 바닥에 떨어졌다. 달그락.
‘이제 괜찮은 건가……?’
위협적이던 기운도, 라크하의 움직임도 멎긴 했으나 아직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시롬 역시 긴장된 얼굴로 맨바닥에 쓰러지듯 앉은 채 라크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라크하를 불렀다.
“공작님……?”
“…….”
잠잠한 걸 보니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나는 조심스레 라크하의 앞으로 와 그의 팔을 잡은 채 물었다.
“공작님, 이제 정신이 들어요?”
“메이아……?”
다행이다. 정신이 돌아왔구나. 그제야 긴장이 풀린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저예요. 잠시만 이렇게 있어 봐요.”
다른 형태의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다시 반지를 끼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시롬에게 반지를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내 손 위에 올려진 건 반지가 아닌 시롬의 손이었다. 시롬이 잔뜩 감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먼저 일으켜 세워주려고 하시다니…….”
“아…… 반지를 달라고 한 건데…….”
“아, 넵.”
시롬이 머쓱한 듯 내 손을 후다닥 놓더니 내게 반지를 건네주었다. 반지를 받고 다시 라크하를 올려다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맑은 이슬 같은 눈물이 라크하의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라크하가 울고 있었다.
“고, 공작님?”
“……왜 그러십니까, 시터님?”
뒤에서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 시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인티아 공작의 눈물이라니. 단연코 시롬이 봐서 좋을 광경은 아니었다. 나는 시롬의 시야를 막기 위해 다리를 벌려 드레스자락을 넓혔다.
“보, 보좌관님 바쁘시지 않아요? 얼른 가보세요.”
하지만 그는 라크하에게 볼 일이 있다는 듯 기웃거렸다.
“그냥은 못 가죠. 이번 일로 공작님께 휴가를 요구할 겁니다.”
이대로 그냥 갈 생각은 없구나. 시롬을 보낼 수 없다면, 내가 라크하를 데리고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라크하의 팔을 잡은 채 시롬을 보며 생긋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먼저 휴가 신청을 할 거라서요! 상처도 치료해야 하고! 그럼 저는 가볼게요!”
시롬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나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 시터님!”
시롬의 애절한 부름에도 나는 라크하를 데리고 주변에 있는 방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방문을 꼭 닫은 후에야 나는 안심하며 다시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가가 꽃망울이 터진 듯 붉게 피어올라 있었다.
“저…… 공작님. 울지 마세요.”
내 말에 물기가 스며든 보라색 눈동자에서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걸 어쩌면 좋지.’
절대 울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람이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초조했다. 나는 살며시 그의 눈물을 닦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환각 때문이에요?”
“…….”
“아니면…… 손이 많이 아프다든가.”
“왜…….”
“네?”
라크하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되묻자 라크하는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왜 바보같이 아무렇지 않은 척 있는 거지?”
“……제가요?”
“아프면, 아프다고 해. 제 사람 하나 구분 못 하고 공격해대는 내가 싫다면, 싫다고 하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아프지도 않고, 공작님이 싫지도 않아요.”
도무지 라크하가 무슨 생각으로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환각에서 내가 아프다고 하거나 밉다고 소리치기라도 했던 걸까. 살짝 내리깐 라크하의 속눈썹이 처연하게 파르르 떨렸다.
“……나 때문에 다쳤지 않나. 굳이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돼.”
“거짓말이라뇨. 정말이에요.”
“여기에 피가 묻어 있는데, 끝까지 거짓말을 할 셈인가?”
라크하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붙잡았다. 피라고? 화들짝 놀란 나는 그가 잡은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내 어깨가 더욱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헉, 언제 다친 거야……가 아니라.
“제 피가 아니라 공작님 피잖아요!”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 어깨를 잡은 라크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검에 깊게 베인 탓에 아직 라크하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라크하는 당혹스러운 듯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 피라고……?”
“제 몸에 피가 났으면 공작님께서 저번처럼 눈이 돌아가셨겠죠. 그런데 지금은 안 미치셨잖아요.”
답답한 마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생각나는 대로 주르륵 말을 뱉어냈다. 깊게 벌어진 손바닥을 보고 있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설마……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한숨이 푹 튀어나왔다.
“일단 지혈부터 해야겠어요.”
나는 라크하의 손을 지혈할 만한 천을 찾기 위해 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된 방인 듯 가구마다 먼지가 쌓여 있었다. 만약 지혈할 게 있더라도 곰팡이나 먼지가 앉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걸로 지혈했다간 더 곪겠지?
‘차라리 내 드레스 천을 사용하는 게 나을지도.’
어차피 내 드레스에는 라크하의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핏물을 아무리 빼 봐도 옷감이 상해 다시 입지 못할 게 뻔했다. 그리고 보통 소설 속이나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치료할 때 드레스를 찢기도 하니까. 나는 내 드레스 자락을 잡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뚜둑 하는 천이 늘어나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이게 왜 안 찢어지지…….”
나름 메이아가 힘이 세서 될 줄 알았는…… 잠깐, 나 엑스트라지? 낑낑대며 드레스를 찢으려던 나는 문득 내가 여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멈칫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안쓰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걸 찢으려고?”
내 원맨쇼에 라크하는 눈물이 쏙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헛기침을 하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요. 협조할 거 아니면 조용히 해요.”
나도 내 뜻대로 잘 안 돼서 답답해 죽겠으니까. 라크하가 물끄러미 내 드레스를 바라보더니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어딜 찢으면 되지?”
“……네?”
“그대의 드레스를 찢고 싶다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라크하라면 내 드레스를 찢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롬의 검도 단번에 부서트린 무시무시한 사람이니까. 나는 내 드레스자락 끝을 가리켰다.
“어음……. 여기쯤?”
라크하가 몸을 숙여 다치지 않은 손으로 내가 가리킨 곳을 잡았다.
“여기가 맞나?”
“네, 거기요.”
“후회하지 않지?”
“네, 안 해요.”
내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라크하는 드레스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부욱! 내가 그렇게 힘을 줘도 뜯어지지 않던 드레스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한 번에 찢어졌다.
“……!”
“……!”
라크하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찢은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허벅지가 보일 정도로 찢어졌다는 거지. 훤히 들어난 한쪽 다리에 바람이 드나들며 휑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일부러 그런 게…….”
“돼, 됐어요. 얼른 찢은 옷감이나 주세요.”
나는 서둘러 라크하의 손에서 옷감을 뺏어든 뒤, 쭈그려 앉아 그와 마주 보았다.
“손도 줘요.”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면서 라크하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에 이리저리 천을 두르다 보니 나름 그럴싸하게 매듭이 지어졌다.
“자, 됐어요.”
이러면 복도를 핏빛 길로 만들 일은 없을 것이었다.
“자, 이제 이대로 돌아가셔서 의원을 부르……?”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뿌듯해하며 일어나려던 순간 라크하가 내 팔을 잡아챘다.
“이대로 나갈 생각이라고?”
“네? 네.”
내가 뭘 더 해줄 거라도 있나?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바라보자 라크하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옷이 그 모양인데.”
“아, 괜찮아요. 잘 가리면 될 거예요.”
“내가 안 괜찮아.”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라크하가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으, 으아?!”
눈 깜빡할 사이에 나는 라크하에게 달랑 안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면서 내가 공주님 안기 자세를 흑막에게 당해볼 줄이야.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라크하의 단단한 가슴팍을 콩콩 때렸다.
“내, 내려주세요! 이러다 손바닥 상처가 더 벌어져요!”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가만히 있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일침한 라크하가 무작정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고는 내 다리를 받쳐 들고 있는 손으로 드레스자락을 당겨 훤히 드러난 다리를 가렸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나.”
“그, 그럴 필요 없어요!”
“협조할 거 아니면, 조용히 해.”
불과 몇 분 전에 내가 라크하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걸 이렇게 받아친단 말이지.
'……할 말이 없네.'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
“그렇지.”
라크하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접어 웃었다. 가까이서 보는 웃는 얼굴이 어찌나 고혹적인지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렇게 웃지 마요.”
“내가 어떻게 웃었는데?”
저런 식으로 되물을 줄은 몰랐다. 나는 머리를 굴려 최대한 그럴듯한 대답을 떠올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게끔요. 안 그래도 창피해 죽겠는데.”
“흐음…….”
라크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목을 울렸다. 마치 내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말은 내가 웃을 때, 그대도 날 쳐다볼 수밖에 없다는 걸까?”
“……그게 그런 의미가 되나요.”
“그렇게 듣고 싶어서.”
라크하가 여우처럼 눈꼬리를 휘었다. 이 남자가 정말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끼를 부리는 건지.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휙 고개를 돌려 라크하의 눈을 피했다.
“됐어요. 그냥 한 말이에요. 어쨌든, 만약 손이 아프면 내려줘요.”
“이대로 저택 한 바퀴도 돌 수 있어.”
“장난치지 말고요.”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팍이 잘게 떨렸다. 내 귀와 맞닿은 가슴팍에서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쿵. 숨이 가쁜 것도 아닐 텐데 라크하의 심장 소리는 세차고 빨랐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뛰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