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이 여자부터 죽여 볼까?2022.03.14.
“놔! 놓으라고!"
아이샤가 마담의 직원들에게 붙잡힌 채 버둥거렸다. 그럴수록 그들은 아이샤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아, 안 돼요! 아가씨! 이제 딱 팔만 재면 끝이 나요!”
“알겠으니까, 놔! 만지지 말라고!”
“놓으면 공작님께 달려가실 거잖아요!”
끝까지 직원들이 놓지 않자 아이샤의 몸에서 갈무리되지 않은 검은 오라가 파직거렸다.
“……!”
직원들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순식간에 물러났다. 아인티아 공녀가 흑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몸소 느끼는 위협감은 달랐다. 하지만 유일하게 마담은 홀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머……. 어쩜 이렇게 박력 있고 멋있을 수가.”
“마담, 이러고 있으실 때가 아니에요. 얼른 물러나셔요!”
직원들이 얼굴을 붉힌 채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담을 끌어당겼다. 취향도, 행동도 남다른 마담의 뒤처리는 언제나 직원들의 몫이었다. 이미 직원들이 다 물러났음에도, 아이샤는 화가 식지 않는지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씨근덕거렸다.
“내가,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아이샤의 감정 변화에 따라 검은 기운이 거세게 일렁거렸다. 그런 아이샤를 보며 라크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간 잠잠하다 했더니 기어코 또 사고를 치는군.”
“제, 제가 말려 볼게요.”
라크하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메이아가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라크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저를 붙잡은 메이아의 손을 조심스레 놓았다.
“말린다고 될 일이라면 좋겠지만, 그런다고 끝날 일이 아니야.”
마침 검술 대회에서 있었던 일로 황제에게서 경고가 날아온 참이었다. 제국을 위한 일이 아닌 이상, 개인적인 이유로 흑마법을 쓰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어 있으니까. 만약 오늘 있었던 일까지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터.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였다.
'기억을 지울 수밖에 없겠군.'
메이아의 앞을 막아선 라크하는 힘을 끌어올렸다. 오싹. 메이아가 문득 소름 끼치는 기운에 라크하를 불렀다.
“공작님……?”
하지만 라크하가 금기의 흑마법을 시동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손을 한 번 휘저은 순간, 무형의 기운이 폭발하듯 방 안에 파장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아이샤와 메이아를 제외한 사람들의 행동이 일순 정지되었다.
“이럴 수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광경에 깜짝 놀란 메이아가 입을 벌렸다. 석상처럼 굳어 있는 사람들의 눈은 초점 하나 없이 멍했다.
'무슨 마법을 쓴 거지?'
지금까지 봐왔던 흑마법과는 달랐다. 굉장히 불쾌하고, 진득한 무언가가 온몸에 달라붙은 듯한 기분이었다. 메이아는 괜히 제 두 팔을 매만지며 마른 침을 삼켰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깨트린 건 라크하였다.
“아이샤.”
적요한 공간에 라크하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퍼졌다.
“최근 들어서 몇 번째 경고인지 모르겠군. 내가 한 말을 잊은 건 아닐 테고.”
“하지만…… 오늘 너무 짜증나는 일투성이었단 말이야! 델카인도, 마담도, 그리고 오빠도…….”
크게 외치던 아이샤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바닥을 기어 들어갔다. 기세가 완전히 꺾인 아이샤의 모습에도 라크하는 단호했다.
“온실 정원을 완전히 폐쇄하도록 하지.”
‘온실 정원 폐쇄.’ 아이샤에게 이보다 청천벽력 같은 벌은 없었다. 아이샤는 잔뜩 충격을 받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시, 싫어!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응? 오빠, 다음부터는 진짜 조심할게!”
“이미 여러 번 넘어가 줬었지. 검술 대회 때 흑마법을 썼던 일도 내 선에서 처리를 했었고.”
“…….”
아이샤의 입이 꾹 닫혔다. 하지만 라크하의 단호한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기억을 지운 일만 벌써 2번째라는 것도 기억하고 있을 테지.”
아이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라크하가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쓰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는 건 아이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크하가 쓸 필요 없이 제가 쓰면 될 일이었다.
“그럼 나한테 그 마법을 알려줘! 실수를 하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는 거잖아!”
“뭐라고?”
라크하의 표정이 이전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히 굳었다. 하지만 아이샤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맨날 금기의 흑마법이라고 알려주지도 않고! 그게 뭐라고…….”
빠직. 일순간 라크하에게서 요동친 검은 기운에 벽에 금이 가자 아이샤의 입이 닫혔다. 꽉 다문 라크하의 턱에 힘줄이 불거졌다.
“다시는, 내 귀에 그 말이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
“조금 뒤 다들 정신이 돌아올 테니 다른 생각 말고, 준비를 하도록 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 라크하가 메이아를 돌아보았다. 메이아는 겁에 질린 듯 창백해진 얼굴로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사제, 그대도 이만-.”
메이아에게 방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이명과 함께 눈앞이 검붉게 물들었다. 금기의 흑마법으로 인한 부작용의 징조였다.
'벌써 증상이 온다고?'
금기의 흑마법을 사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부작용은 주로 해가 진 저녁에 찾아오곤 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라크하가 비틀거리자 메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불렀다.
“공작님?”
저를 부르는 메이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이명과 망자의 속살거림이 라크하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고 금기의 흑마법을 사용했던 날의 자신이 저질렀던 잔혹한 행동들이 눈앞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지독한 환각과 환청으로 저질렀던 무자비한 학살. 코를 찌르던 비릿한 피 냄새와 끔찍한 비명소리들. 그 순간, 라크하는 습관적으로 선대 아인티아 공작부부가 행했던 방법을 떠올렸다.
‘나를 방에 가둬야 한다.’
메이아가 지닌 능력을 통해 어떻게든 수습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라크하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 곧장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공작님!”
메이아는 도망치듯 방을 나가는 라크하를 향해 외쳤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라크하가 이상했다.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바로 라크하를 따라가기엔 아이샤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샤가 곧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아이샤를 달래줄 시간은 없었다. 라크하의 말대로라면 곧 혼이 빠진 채 석상처럼 굳어 있는 하녀와 마담이 곧 깨어날 테니까.
'라크하를 달래서 온실 정원을 폐쇄하는 걸 막자.'
빠르게 선택지를 고른 메이아는 라크하를 놓칠세라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나가기 전 아이샤를 위한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걱정 마, 아이샤. 괜찮을 거야.”
자신이 어떻게든 막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 달칵. 메이아와 라크하가 나간 방. 아이샤는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걱정 마……?”
망설임 없이 라크하를 따라 나가려던 메이아의 마지막 한마디가 아이샤의 가슴을 울렸다. 오히려 제멋대로 굴고, 말도 제대로 안 듣는다고 싫어할 줄 알았는데.
“언니는, 바보야…….”
메이아의 다정한 말 한 마디에 아이샤는 울먹이며 조그만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메이아가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던 그날. 그래, 그날 느꼈던 감정과 같았다. 이번에도 메이아는 아이샤가 지금껏 잘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을 안겨주었다.
‘내가 언니를 미워할 날이 오긴 할까?’
메이아의 존재가 갈수록 아이샤의 안에서 크게 몸집을 불려갔다. 걱정이 담긴 눈빛. 어떤 햇살보다 따스하게 웃는 미소. 한 번씩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픽 웃는 소리. 그럴 때마다 아이샤의 마음속에 있던 차가운 얼음들이 조금씩 녹아 내렸다. 아이샤에겐 어느새 메이아가 한줄기 빛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으음……. 갑자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그때 라크하의 흑마법에 걸려 있던 직원과 마담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이샤는 애써 울먹이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기서 또 난동을 피운다면 누구든 또 메이아를 찾으러 갈 게 뻔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
이러다 메이아가 힘들다며 시터 일을 뿌리치고 나갈지도 몰랐다. 여러 일이 겹쳐 결국 폭발해버렸던 자신처럼.
-아이샤, 이건 무서운 게 아니란다.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 그리고, 죽여야 해.
아이샤는 애써 선대 아인티아 공작부부의 목소리를 떨쳐냈다. 저를 향해 달라붙던, 삼키려고 들었던 괴상한 슬라임 같던 괴물들도.
‘지금은 그때랑 다르잖아.’
지금은 자신을 위해 가장 먼저 달려와 줄 메이아와 라크하, 그리고 델카인이 있었다. 숨을 길게 내뱉으며 마음을 가다듬은 아이샤는 하녀들을 향해 비장한 얼굴로 팔을 내밀었다.
“팔만 남았다며? 얼른 재.”
*** 복도로 나와서도 라크하는 걸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공작님, 잠시만요!”
메이아의 부름에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앞으로 걸었다. 계속해서 망자의 속삭임이 그의 귓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네 몸을 줘!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눈앞에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그림자들은 라크하에게 달라붙으며 그의 목을 옥죄었다.
‘하루만 버티면 돼.’
그래,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니니까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곳에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저를 가두면 되니까. 라크하는 환각과 환청에 최대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홀려 사고를 일으킬지 몰랐다.
“잠시만요, 공작님!”
그때 메이아가 라크하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라크하의 눈에는 제 앞을 막고 있는 이가 메이아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던 검은 그림자가 시롬의 얼굴로 모습을 바꾸었다. 라크하는 주먹을 꽉 쥐며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그럼…… 네 몸을 줄 거야? 네가 우리를 죽였잖아.
시롬의 얼굴을 한 그림자가 도저히 사람이 벌릴 수 없는 정도로 길게 찢은 입으로 씨익 웃었다. 그 사이로 나온 기다란 혀가 라크하의 얼굴을 핥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촉에 조각 같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거예요?”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당황한 메이아가 라크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라크하가 물러나며 메이아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꺼져.”
금방이라도 누구든 찢어발길 것 같은 살벌한 목소리였다. 메이아가 얼이 빠진 사이 라크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이대로 제 침실까지만 간다면, 그 누구도 해칠 일은 없을 것이었다. 부르지 않는 이상 침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무실로 가시는…… 공작님?”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시롬이 라크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환각을 보는 라크하의 눈앞에 별안간 땅에서 검은 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네 몸을 달라니까!
라크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검은 덩어리를 움켜쥐었다.
“고, 공작님!”
졸지에 멱살이 잡힌 시롬이 라크하를 부르며 버둥거렸으나 라크하에겐 검은 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라크하의 눈에는 제 손에 잡힌 검은 덩어리가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그를 보며 샐쭉 웃고 있었다.
-네 몸을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그냥 다 죽일 수밖에. 이 여자는 어때?
즐거운 듯 흥얼거리던 검은 덩어리가 메이아의 얼굴로 형태를 바꾸었다.
-우선 이 여자부터 죽여 볼까?
겨우 부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는 건 한순간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흑마력이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으아악! 살려주십시오!”
멀리서 들려오는 시롬의 비명에 메이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갈고리처럼 생긴 검은 기운이 시롬의 목을 베어낼 듯이 바짝 날을 세우고 있었다. 깜짝 놀란 메이아는 황급히 라크하와 시롬을 향해 뛰어갔다.
“공작님! 뭐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메이아가 라크하를 향해 손을 뻗은 그때였다.
'어라?'
시롬을 노리고 있던 검은 기운이 메이아를 향해 쇄도했다.
“시, 시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