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100일이라는 시간2022.02.28.
“일단 앉지.”
“아, 네. 고마워요.”
라크하가 가리킨 소파에 가서 앉자, 그는 업무 책상에서 무언갈 챙겨와 건너편에 앉았다.
“내가 급하게 그대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야.”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나 있다니. 나는 불안한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물었다.
“뭔가요?”
“우선, 황제가 그대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된 건 확실하더군. 이게 그대 앞으로도 왔어.”
라크하가 내게 내민 건 늑대 모양 문양의 실링 스탬프가 찍힌 새하얀 편지 봉투였다. 그 편지가 황실에서 온 거라는 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신전에서 봤던 늑대 문양과 같았으니까. 손바닥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정말 제 앞으로 온 편지인가요?”
“그래, 그대의 이름이 적혀 있더군.”
편지 봉투를 받아 뒤집자 정확히 ‘메이아’,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얼음처럼 굳은 채 편지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라크하가 손을 내밀었다.
“읽기 싫다면 모른 척하고 내게 주면 된다. 받은 적도 없다는 듯이 태워주지. 사실 태우고 싶었거든.”
“아니. 잠시, 잠시만요. 태우지 말아요.”
황급히 다시 편지 봉투를 가져가려는 라크하를 말렸다.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
따가울 정도로 살벌하던 기세가 뭉뚝해졌다. 그러더니 묘한 보라색 눈동자로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한 강아지의 눈빛.
'……칭찬해 달라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나는 머릿속에 드는 괴상한 의심을 떨쳐냈다. 편지 내용이나 확인하자. 그의 눈빛을 외면하며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 천천히 내용을 읽어보았다.
“제르디아 제국의 태양, 신의 대리자. 키네스 제르디아 황제 폐하의 탄신 연회에 초대를……어, 어라?”
내용을 끝까지 읽기도 전에 편지지 끝부분이 타들어가더니 이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설마, 라크하가……?'
나는 놀란 눈으로 라크하를 올려다보았다. 섬뜩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재가 된 편지지로 향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더는 들을 수가 없군.”
아니, 참는다며……. 나는 애써 당황스러운 감정을 억눌렀다. 라크하에게 무어라 해봤자 이미 편지는 한 줌의 재가 된 후였다. 그나마 아래 내용을 더 읽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키네스의 탄신 연회 초대장이라니…….’
그토록 걱정하던 원작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키네스와 레이나를 만난 건 원작이 시작되기 전의 징조였던 걸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재밖에 남지 않은 초대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라크하가 태워버린 게 마음이 편할지도 몰랐다. 받은 적도 없는 척 굴면 되는 일이니까.
“잘 태웠어요.”
“…….”
보라색 동공이 별안간 커다래졌다.
“왜요?”
“그대가 끝까지 읽지도 않은 초대장을 재로 만들었는데, 괜찮나……?”
“네, 괜찮아요.”
어차피 라크하가 태우지 않았어도 그냥 구겨버렸을 테니까. 혹은 못 받은 것처럼 라크하에게 뒤처리를 해달라고 하든가.
‘내가 미쳤다고 거길 가?’
탄신 연회 초대장을 보낸다고 내가 참석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어차피 태우기도 했으니 저는 탄신 연회 초대장을 못 받은 걸로 해 줘요.”
“…….”
왜 대답이 없어? 어울리지 않게 얼떨떨한 표정을 한 라크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는 이상해.”
“지금…… 제 욕을 하시는 거예요?”
“보면 볼수록 어떤 사람인 건지 궁금하단 의미야.”
다행히 욕은 아니구나. 괜히 혼자 발끈한 것 같아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저는 초대장을 못 받은 거예요.”
“그 변명이 통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라크하를 주시했다.
“어째서요?”
“이미 귀족들에겐 탄신 연회 초대장이 도착했어. 그대의 초대장은 황제의 직속 보좌관이 가져다줬지.”
“아아…….”
빌어먹을. 나는 탄식하며 쓰러지듯 좌식 테이블을 붙잡았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잖아…….’
보좌관이 직접 방문하여 전달했는데, 라크하의 말대로 못 받았다고 둘러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와 쌍둥이들 곁에 붙어 있으면, 그날 어떤 문제도 없을 거다.”
“그러면 다행이긴…… 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쌍둥이들이랑 공작님도 참석하신다고요?”
“큰 일정이 없는 이상 참여할 생각이긴 하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뇨. 그건 아닌데…….”
라크하와 쌍둥이들의 탄신 연회 참석 소식에 당황스러웠다.
‘원작에선 탄신 연회에 나타나지 않았잖아!’
아니면 언급만 안 됐을 뿐 그 자리에 있긴 했었나? 종잡을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에 머릿속이 뒤죽박죽하고 혼란스러웠다. 이마를 짚은 채 최대한 원작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라크하가 갑자기 레이나에게 집착하고 사랑을 구애하긴 했었지.’
그게 원작에서 보여지지 않은 사건들 때문이었다면? 만에 하나 그 내용이 외전 속에 담겨 있었다면 내가 모를 만도 했다. 결국, 라크하와 레이나가 탄신 연회에서 부딪히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사제?”
라크하의 부름에 나는 생각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다. 라크하가 레이나와 감정적인 관계로 얽히지 않도록 최대한 막아야 했다. <샤키르의 꽃>에서 모든 비극은 레이나를 향한 라크하의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벌어졌으니까. 게다가 내가 아인티아 공작가의 시터로 오게 된 이유는 돈도 돈이지만…….
‘레이나와 만남을 늦추거나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었지.’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입을 뗐다.
“……좋아요, 저도 참석할게요.”
“그래, 너무 걱정은 마. 따로 준비한 것도 있으니까.”
“준비요?”
고개를 끄덕인 라크하가 엄지와 중지를 딱, 하고 맞부딪혔다. 그러자 라크하의 손에 쥐어진 건 푸른색과 보라색 꽃이 조화롭게 꽂힌 꽃다발이었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정체 모를 꽃다발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웬 꽃다발이죠?”
라크하가 내 눈을 슬쩍 피하며 꽃다발을 가리켰다.
“안을 봐.”
무심코 꽃다발을 받아든 나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금속 링으로 고정된 두루마리가 있었다.
‘이게 뭐지?’
의아해하며 두루마리를 꺼내든 나는 또다시 입을 쩍 벌렸다. 금속 링이 아니라 반지였다. 심지어 반지의 중앙에 맑고 영롱하다 못해 투명하게 반짝이는 이건…….
“다이아……?”
“다이아를 좋아하나?”
“당연히 좋아하죠…… 가 아니라, 이게 뭐예요?”
“그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다.”
다이아 반지, 그리고 꽃. 익숙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낯선 상황도 아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상황이긴 하니까.
‘설마, 설마…….’
나는 서둘러 두루마리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첫 글자를 읽는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두루마리에 떡 하니 적혀 있는 건 약혼 서약서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야 모든 게 말이 됐다. 키네스의 탄신 연회 초대장도, 내 눈앞에 있는 약혼 서약서도.
'……내 머리를 한 대 치면 깨려나.'
나는 진지한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쥐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한 뒤 가볍게 내 머리를 가격했다.
“……?”
그런데 왜 고통이 없지? 스르르 눈을 뜨자, 코앞까지 와 있는 라크하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하는 거지?”
내 주먹은 라크하의 커다란 손에 막혀 있었다.
“그게…… 꿈인 줄 알고…….”
“현실이야.”
라크하가 내 손을 놓아주었다. 현실이라고? 세상이 멈춰 버린 듯한 느낌에 나는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저, 정말 저랑 공작님의 약혼 서약서라고요?”
“결혼식을 올리기엔 갑작스러우니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나한테는 약혼도 갑작스럽다고! 4달 뒤에 도망칠 계획인 내게 이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어제 라크하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빠르게 뛴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겼었는데 그게 진심으로 했었던 말이라고? 나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아마도 내 능력 때문에 지금까지 라크하가 제 감정을 오인하고 있을 것이다. 조만간 곧 원작이 시작된다면, 라크하는 저절로 레이나에게 끌릴…….
‘아니, 레이나한테도 끌리면 안 되잖아!’
라크하는 나도 레이나도 좋아하면 안 된단 말이야. 한참을 속으로 절규하던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라크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공작님은 제 능력 때문에 착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받은 것들을 전부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오히려 그대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약혼 서약서는…….”
“아뇨.”
나는 단호하게 라크하의 말을 끊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딱 잘라서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저는 반지도, 꽃도 받을 수 없어요.”
“반지를 거절한다고……?”
“네.”
그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싸한 분위기에 일순 후회가 되려고 했으나 나는 스스로 잘했다고 세뇌하며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 뒤, 차가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라크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럼 그대가 끼고 있는 반지는 뭐지?”
어디서 기원된 건지 모를 역정으로 들끓는 보라색 눈동자가 내 손으로 향했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매가 사나워 보였다.
“이건…….”
나는 솔직하게 답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신이 줬다는 말을 믿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받았다고 둘러대자니 그것도 신빙성이 없었다. 지금껏 나는 따로 외출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내가 탈출하며 유일하게 챙긴 물품이라고 둘러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들고 있던 거였어요.”
하지만 나는 금세 내 선택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라크하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그대는 아무것도 없이 도망쳤지 않나.”
라크하는 이에 그치지 않고 내가 할 말이 없게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있었다면 진작에 끼고 있었겠지. 심지어 저택에 와서도 단 한 번도 끼지 않았는데?”
으르렁대듯 읊조리는 말투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어떻게 둘러댈지 고민하고 있는데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
흠칫 떨며 라크하를 올려다보자 라크하가 눈가를 좁히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말끝을 흐린 라크하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반지에 대해서 더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더 캐물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한숨을 돌리던 찰나였다. 라크하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테이블 위에 있는 약혼 서약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잘 들어.”
“네?”
“이건 가짜라고 생각하면 돼. 황제가 그대를 데려갈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방어책일 뿐이니까.”
가짜라고……? 별안간 방금 전에 내가 했던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벌였던 행각들을 떠올리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혹시…… 결혼은 갑작스럽다고 했던 게……?”
“그대와 결혼한 사이라고 하기엔 너무 급작스럽지 않나.”
“꽃이랑 반지는…….”
“아무리 거짓 약혼을 제안한다고 하더라도 시롬이 형식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군.”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순간, 갓 끓은 냄비처럼 걷잡을 수 없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쥐구멍이 있다면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제 말까지 끊어가며 단호하게 구는 나를 보며 라크하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수치스러워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손등으로 뺨을 매만졌다. 어찌나 얼굴이 뜨거운지 손등이 차가웠다. 겨우 열기를 가라앉힌 나는 엉거주춤거리며 펜을 잡았다.
“그, 그러니까 공작님과 약혼 사이면 함부로 데려가지 못하니까 약혼 서약서를 쓰자는 거죠?”
“그래.”
평화적인 방법이긴 했으나 걸리는 점이 있었다. 시터 고용계약서에는 합리적인 사유가 있으면 얼마든지 내가 그만둬도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렇기에 대충 사유를 기입한 사직서를 몰래 제출하고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약혼 서약서에는 약혼을 파기하기 위해서 상호 협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냥 나 몰라라 도망쳐도 되긴 하나 뭐든지 사람은 뒤가 깔끔한 게 현명한 법이었다.
“기간을 정하는 게 어떨까요? 이를테면, 100일 정도라든가…….”
“……100일?”
나에겐 100일이면 충분했다. 그쯤이면, 딱 내가 필요한 자금이 마련될 때이니까.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100일이라고 정했다는 사실은 절대 라크하에게 말할 순 없었다.
‘벌써부터 내 도망 계획을 들켜선 좋을 건 없잖아.’
나는 그가 의심을 하기 전에 말을 둘러댔다.
“그때쯤이면, 황제 폐하께서도 저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시지 않을까요?”
라크하의 정갈한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오기 전에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공작님이랑 제가 서로 마음이 있어서 쓰는 약혼 서약서가 아니기도 하고…… 혹시 모를 서로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마침 말을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몰라 곤란했는데 다행이었다.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 은근히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나는 그제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펜을 서명란으로 옮겼다.
*** 기어코 메이아는 반지를 누가 줬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라크하는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끝까지 숨기려고 하는 거지?’
심지어 제 반지까지 거절하며 약혼 서약서를 쓰기 꺼릴 줄이야. 물론 뒤늦게 서약서를 쓰겠다는 식으로 나오긴 했으나 메이아는 끝내 100일이라는 기간을 정했다.
‘그건 분명 먼저 반지를 준 놈 때문이겠지.’
메이아가 약혼 서약서를 쓰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기에 일단 100일이라는 기간을 수락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메이아를 완전히 제 곁에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에 모래라도 쥔 것처럼 메이아는 금세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메이아가 제게서 벗어나도록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라크하는 시롬에게 저택 내의 사람들을 조사하라 명했다. 오늘 중으로 알아오라는 라크하의 독촉에 시롬은 빠르게 조사하여 그날 저녁 때 즈음 결과를 보고했다. 시롬의 보고를 들은 라크하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대충 알아본 건 아니겠지?”
“절대, 절대로 아닙니다! 대부분 시터님께 반지가 있는지도 모르더군요.”
정말 열심히 조사했다며 단언하는 시롬을 보며 라크하는 의심을 거두었다. 낮 동안 어쩌면 반지의 출처를 저택에서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확실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반지는 아니야.’
보통 희귀한 물건에 대한 소문은 암시장이나 경매장에서 암암리에 돌고는 했다. 경매장에서 목록을 뒤져 보면, 알 수 있겠지. 라크하가 서류를 한쪽으로 미뤄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롬이 물었다.
“외출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그래, 잠시 다녀오겠다.”
모든 걸 제쳐두고 나가는 라크하의 뒷모습을 보며 시롬은 그저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