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감히 내 사람을2022.02.11.
나보고 조심하라고 해놓고는 정작 실수를 저지른 건 테리투스였다. 눈매를 치켜올린 아이샤가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테리투스를 위로 안아들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아, 아이샤!”
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아이샤의 손에서 테리투스를 빼앗았다. 아이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언니, 방금 저 돼지가 나한테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아.”
“아이샤가 잘못 들었을 거야.”
아니, 제발 잘못 들은 거라고 착각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이샤의 의심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아니야, 분명 나한테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했어.”
“그럴 리가. 고양이가 어떻게 말하겠어. 봐봐, 야옹. 야옹아, 야옹해보자.”
나는 테리투스의 앞발을 잡은 채 위 아래로 움직였다. 심기가 꽤나 불편한지 솜방망이 같은 발 위로 발톱이 튀어나왔다.
‘안 돼, 참아. 참아야 한다고.’
나는 테리투스를 달래듯 몰래 통통한 뱃살을 쓸어내렸다.
“야옹아?”
“……야옹.”
테리투스의 입에서 나온 울음소리에 아이샤가 눈썹을 들썩였다.
“분명히 말했는데.”
“아이샤가 잘못 들었을…… 어어?”
어떻게든 이 사달을 무마시키려는데, 갑자기 테리투스가 버둥거렸다. 엄청난 힘으로 내 손에서 빠져나간 테리투스는 이내 열린 문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차라리 저게 나을지도…….’
다행히 아이샤는 그저 아니꼬운 시선으로 테리투스의 튼실한 엉덩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그제야 한숨 돌리며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외출이라니?”
“아, 맞다!”
단순한 아이샤는 금세 내가 바꾼 주제로 넘어갔다.
“오빠가 언니랑 델카인이랑 외출하고 오라고 하지 뭐야! 언니한테 말하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 또 전달하래!”
나는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문득 어제 술을 마시면서 라크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나 보다.
“음…… 언제?”
“수업 없는 날!”
아이샤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막상 내 기분은 아이샤만큼 들뜨지 않았다.
‘수업이 없는 날면 내일이잖아…….’
게다가 하필 왜 수업이 없는 날이란 말인가. 착잡한 내 속도 모르고 아이샤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얼른 자! 나는 델카인한테도 알려주러 가야지!”
아이샤는 내게 손을 흔든 뒤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나에겐 언제쯤 온종일 혼자 쉴 수 있는 날이 오는 걸까?’
아니, 오긴 할까 모르겠다. *** 시롬은 심각한 눈으로 라크하를 골똘히 관찰했다. 오늘도 아인티아 공작님께서 이상하다. 저번에 하루 종일 손을 바라보고 있던 건 약과였다. 라크하는 서류를 처리하는 와중에 갑자기 일어나더니 창문 밖을 살피곤 했다.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똥이라도 마려운 강아지 같았다.
“공작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시롬은 라크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참다못해 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라크하의 반응은 냉담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그야 너무……."
정신이 사나우니까 그렇죠. 자신도 모르게 목 끝까지 불쑥 솟구쳐 올라온 말을 시롬은 애써 삼켜냈다.
“아닙니다.”
“일에 집중하기나 해.”
“넵.”
시롬은 후다닥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 일이나 하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라크하가 사인한 서류들을 다시 정리하려는데.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또 시작인가.’
시롬은 이마를 짚은 채 흘깃 라크하를 흘겨보았다. 역시나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건 뭐, 창문과 사랑에 빠진 아인티아 공작도 아니고.
'혹은 밖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나?'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시롬은 라크하의 곁으로 걸어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뭘 보시고 계시는 겁니까.”
“……창문에 비치는 얼굴을 보고 있었다.”
시롬은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귀찮을 정도로 여인들이 꼬이는 잘생긴 얼굴이란 건 인정한다. 하지만 제 얼굴을 반복적으로 지켜볼 정도라면 상태가 가히 심각했다.
“……정말로 얼굴을 보고 계셨던 겁니까.”
“그만 묻고 꺼져.”
“네…….”
라크하의 거친 발언에 시롬은 꼬리를 내린 채 물러났다. 그 뒤로도 라크하는 계속 창문 밖을 바라보기 바빴다.
‘왜 아직 나오지 않는 거지?’
쌍둥이들에게 일렀던 대로라면, 오늘은 메이아가 쌍둥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하는 날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때, 메이아가 쌍둥이들과 함께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걸 본 라크하는 의자에 걸쳐져 있던 제복 재킷을 서둘러 챙겨 입었다.
“가 봐야겠다.”
"예? 설마, 지금 외출하시려는 겁니까?”
“그래, 금방 다녀오겠다.”
시롬은 경악하며 라크하의 앞을 막아섰다.
“오, 오후에는 부르지망 백작과 약속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오늘은 부르지 마. 어차피 급한 사안도 아니니, 차후에 부르도록 하고."
라크하가 시큰둥하게 답하며 문 손잡이를 잡았다. 안 돼! 시롬은 후다닥 문에 기대어 섰다.
“업무는, 업무는 어찌하시고요!”
그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라크하가 지금 나간다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고.
“오늘 처리해야 할 서류들은 간단한 내용들이니 네가 처리해도 문제없을 거다. 정 하기 싫다면, 그냥 두고.”
"공작니임……!"
응? 시롬은 애처롭게 라크하를 부르다 말고, 멈칫했다. 하기 싫으면 그냥 둬도 된다고?
"넵, 얼른 가보시죠."
그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며 문 앞에서 떨어져 나왔다.
"……."
라크하의 정갈한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왜 그러십니까. 공작님? 얼른 가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지."
어쩐지 기분이 찜찜했지만, 세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가보긴 해야 했다. 결국 라크하는 시롬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라크하가 떠난 자리. 시롬은 서류를 한 쪽으로 밀어 넣으며 신난 얼굴로 외쳤다.
"드디어 휴가다!"
***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비스퇴르 상점가였다.
‘와, 제국에서 가장 큰 상점가라더니.’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큰 길에 줄지어 즐비한 여러 상점과 골목길에도 빈틈없이 노점상이 들어서 있었다.
“언니! 나 저거 먹어보고 싶어!”
“뭔데?”
“타르트!”
아이샤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디저트 가게를 가리켰다.
'꽤 비싸 보이네.'
나는 라크하에게 받은 돈주머니를 살며시 열어보았다. 오늘 하루 동안 상점가를 돌아다니기에 적은 돈은 아니었다. 다만…….
'저렇게 고급진 디저트 가게를 들어갔다간 그대로 거덜 날 거란 말이지.'
나는 고민하다 델카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델카인은 어때?”
“형수님 돈 없잖아.”
"켁."
델카인의 팩트 폭력에 사레가 들렸다. 직접 얻어맞은 것도 아닌데 몹시 아팠다. 물론 마음과 정신이.
"뭐야, 언니 돈 없어?"
차라리 시터 월급이라도 받았으면, 이런 비참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차마 애들 앞에서 돈이 없다고 울적해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음, 내가 돈을 많이 안 챙겨왔거든. 그러니까, 타르트 대신에……."
나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러자 저 멀리 솜사탕처럼 생긴 간식이 눈에 띄었다.
'뭐야, 여기도 솜사탕이 있어?'
솜사탕이라면 식감이나 생긴 모양새 때문에 아이들의 대표적인 최애 간식이 아니던가!
"아이샤, 저건 어때?"
"싫어. 기분 나쁘게 생겼어."
좋아할 줄 알고 내심 기대했는데. 어쩌지. 고민하고 있자 델카인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곤 생긋 웃으며 솜사탕을 가리켰다.
"나는 좋아. 형수님이 사준다면 뭐든."
어쩜 누구랑은 다르게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정말? 그럼 델카인만 사줘야겠다."
나는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이샤를 흘겨보았다.
‘어때? 갑자기 솜사탕이 먹고 싶지 않니?’
아이샤라면 이 정도 도발만이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나도 좋아! 언니가 사주는 건 전부! 이상한 거 사줘도 좋아!"
역시. 아이샤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더니 나와 델카인 사이에 끼어들어 손을 휘저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아이샤에게 물었다.
"그럼 솜사탕도 괜찮다는 거지?"
"솜사탕? 저렇게 괴상하게 생긴 걸 솜사탕이라고 해?"
여기서도 솜사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샤가 특이하고 새로운 이름에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내가 알기론 그런데, 궁금하면 한 번 물어보러 가볼까?"
"응, 가보자! 저딴 게 정말 그런 귀여운 이름이 맞는지 궁금해!"
"자, 그럼 가자."
내 말이 출발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샤가 후다닥 뛰어갔다.
"아이샤, 천천히! 넘어져!"
"빨리 와!"
속도를 늦추지 않는 걸 보아하니, 천천히 갈 생각은 쥐똥만큼도 없나 보다. 반쯤 체념한 채 아이샤의 뒤를 빠르게 따라가는데, 델카인이 나를 말렸다.
"형수님, 천천히 가자."
"응? 아이샤가 난리 치지 않을까?"
“글쎄.”
델카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노점상을 가리켰다. 노점상 앞에 선 아이샤가 눈을 반짝이며 산만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미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구나.’
덕분에 느긋하게 솜사탕을 파는 노점상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와.”
솜사탕을 파는 노점상 앞에 선 나는 감탄을 터트렸다. 나무 굴레가 한 바퀴 돌자, 굉장히 가느다란 설탕 타래가 돌돌 말려졌다. 생긴 건 비슷하긴 하지만, 솜사탕이랑 만드는 방법이 달랐다.
“언니, 신기하지!”
아이샤가 내 치맛자락을 당기며 격양된 얼굴로 외쳤다. 상인은 그런 아이샤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귀여운 아가씨가 많이 신기한가 보군요."
"엄청! 아저씨, 이게 뭐야?"
"아이샤."
나는 황급히 아이샤를 말렸다. 변장을 한 탓에 귀족인 걸 모르는 상인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상인은 유하게 넘어가 주었다.
"이건 솜사탕이라고 하는 거예요."
전혀 만드는 방법이 다른데 솜사탕이라니. 작가가 이름을 짓기 귀찮았던 게 틀림없었다.
"와, 언니 말대로 진짜 솜사탕이 맞네?"
아이샤는 그 이름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솜사탕을 바라보았다. 종류도 색깔별로 다양했다.
"아이샤는 어떤 거 먹을래?"
"나는 이거랑, 이거랑. 이거!"
"아이샤 적당히 해."
아이샤가 터무니없이 많이 고르려고 하자, 델카인이 제지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얌전히 넘어갈 아이샤가 아니었다.
"네가 뭔 상관…… 어?"
눈을 부라리며 델카인에게 쏘아붙이던 아이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서 맡아본 냄새인데."
"솜사탕이?"
"아니, 저거 말고."
아이샤는 눈가를 좁히더니 이내 눈을 번쩍 떴다.
"오빠?"
"뭐?"
"라크하 오빠 냄새가 나."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샤에게 손짓했다.
"다 사줄 테니까. 딴 데 가지 말고 이리 와, 아이샤."
"맞아, 형수님 말 좀 들어."
"아니! 진짜라니까!"
아이샤가 정말 억울하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우리를 보면서 입을 삐쭉 내밀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이샤의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팔고 있는 솜사탕을 종류별로 쭉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종류별로 다 주세요."
드라마 속에서 보던 재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괜히 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 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이었다. *** 라크하는 황급히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눈을 감은 채 킁킁대며 정확히 자신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아이샤 때문에 심장이 철렁했다.
'저번에도 저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저건 대체 무슨 괴상한 능력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무사히 잘 돌아다니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더욱 주의해서 모습을 감춘 라크하는 메이아와 쌍둥이들을 향해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메이아가 솜사탕을 쭉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주세요."
아이샤의 관심을 돌리려고 다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왜 더 본인이 신나 보이는지 모르겠다. 라크하는 그런 메이아를 보며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다음에는 더 챙겨주던가 해야겠네.'
혹은 가지 못했던 디저트 가게를 데려가서 원하는 걸 전부 다 사라고 하든가. 무의식적으로 라크하가 메이아와의 데이트 계획을 세우고 있던 때였다.
"저건 뭐야."
메이아를 바라보며 작은 호선을 그린 라크하의 입술이 일자로 굳었다. 쥐새끼 한 마리가 메이아의 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들 생각을 한다고?'
죽고 싶다고 발악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몰래 처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라크하는 일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메이아는 죽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의 눈이 짙고 깊은 갈등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