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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평생 그대를 곁에 두어야 하는 걸까? (29/136)

29. 평생 그대를 곁에 두어야 하는 걸까?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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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가 테이블에 닿기 직전, 라크하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와 맞닿아 있는 곳이 모두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술을 마신 적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16548702582194.jpg“고, 공작님……?”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분명 라크하가 돌변하기 전까지 접촉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얼떨떨해하던 나는 황급히 팔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막았다. 지독하게도 고혹적인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16548702582194.jpg"잠깐만요!"

16548702582205.jpg“……향기롭군.”

라크하가 묘하게 맛이 간 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느른한 미소를 지은 그가 불그스름한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며칠을 굶은 맹수를 앞에 둔 먹잇감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라크하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내 팔을 잡아챘다.

16548702582194.jpg"뭐하시는 거…… 읏!"

붉은 입술이 피가 맺혀 있는 내 팔등을 베어 물 듯 머금었다. 팔등 위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축축한 감각에 발가락 끝이 곱아들었다.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쉽사리 판단이 되지 않았다. 스르르, 기다란 속눈썹이 걷히며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욕망으로 들끓던 눈이 짙은 만족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16548702582194.jpg"……!"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크하가 몸을 휘청였다.

16548702582194.jpg‘이대로면 크게 다친다!’

위험을 직감한 나는 그를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커다란 덩치의 몸을 겨우 받아낸 나는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16548702582194.jpg"저기, 라크하?"

대답 대신 고른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16548702582194.jpg'갑자기 잠이 든 거야?‘

힘이 풀린 라크하의 몸이 점점 더 나에게 밀착되며 몸이 뒤로 밀렸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다리에 힘을 줘 버텼다.

16548702582194.jpg"침대까지만……."

좋아. 할 수 있어. 겨우 의지를 다잡은 나는 라크하를 안은 채 침대로 끌고 와 눕혔다.

16548702582194.jpg"하, 힘들어."

침대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한숨을 길게 뱉어내던 때였다. 라크하가 눈을 찡그리며 손을 셔츠 윗단추에 가져다 댄 채 뒤척였다.

16548702582194.jpg"……답답한가?"

확실히 목 끝까지 꽉 닫힌 단추가 불편해 보이긴 했다. 그래, 조금만 풀어주자. 나는 라크하의 셔츠 위로 손을 뻗어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16548702582194.jpg'왜 내가 변태가 된 기분이 드냐.'

단추가 열릴 때마다 손 위로 맞닿는 딱딱한 가슴팍에 얼굴이 홧홧했다.

16548702582194.jpg"왜 이렇게 안 열려."

세 개 정도만 풀어주려고 했는데 마지막 단추가 안 열린다. 나머지 손까지 합세하여 단추를 풀려던 찰나, 다시 라크하가 뒤척였다. 그냥 뒤척인 거라면 다행이었다.

16548702582194.jpg"으악!"

덥석, 내 팔을 잡은 그가 나를 제게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고 얼결에 침대 위로 엎어진 나는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단단한 팔이 내 몸을 덥석 껴안아 붙잡았다. 이마 위로 그의 맨가슴이 닿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16548702582194.jpg"공작님 놓아……."

그를 밀어내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16548702582194.jpg'깨웠다가 더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

눈을 뜬 라크하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랐다. 방금 전 라크하의 행동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으니까.

16548702582194.jpg‘왜 그런 거지?’

나는 곰곰이 라크하가 돌변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16548702582194.jpg‘설마…… 피 때문인가?’

타이밍과 정황을 생각해본다면, 라크하의 이상 행동은 유리가 깨지고 피가 나며 시작됐다.

16548702582194.jpg‘하지만 어째서……?’

어쩌면 내 능력은 테리투스가 알려준 것 외에도 더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지도 몰랐다. ***

16548702611854.jpg"시터님, 쿠키만 두고 갈게요."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라크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정확히 문을 열고 들어온 리타와 눈이 마주쳤다.

16548702611854.jpg“고, 공작님?”

리타는 떨굴 뻔한 쿠키 접시를 겨우 붙잡았다.

16548702611854.jpg‘공작님께서 왜 여기 있는 거지?’

이 시간에는 없어야 할 사람이었다. 라크하는 늘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알아서 메이아의 방을 나가곤 했으니까.

16548702582205.jpg“무슨 일이지?”

라크하가 눈살을 찡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얼음처럼 굳은 리타의 눈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반쯤 풀린 셔츠 단추 안으로 잘 잡힌 가슴근육과 선이 진한 복근이 보였다. 리타는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입을 겨우 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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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702611854.jpg"쿠, 쿠키를 가져다드리러 왔습니다."

16548702582205.jpg"두고 나가."

라크하가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명령했다.

16548702611854.jpg"네네!"

얼굴을 확 붉힌 리타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라크하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16548702582205.jpg‘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라크하는 침착하게 잔이 깨진 이후의 일을 되새겨보았다. 그러자 메이아의 혈향에 이성을 잃고 피를 탐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행동에 라크하는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16548702582205.jpg“갑자기 마물이라도 되어버린 거란 말인가.”

심지어 피를 머금은 순간, 진득하게 몸에 달라붙어 있던 검은 기운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접촉하고 있을 때와 비슷한 듯 묘하게 달랐다.

16548702582205.jpg‘아직까지도 그 느낌이 남아 있어.’

라크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펼쳐 흑마력을 끌어내 보았다. 체한 것처럼 어딘가 턱, 막혔다.

16548702582205.jpg“……능력이 써지지 않아.”

메이아와 접촉한 상태에서 능력이 제대로 써지지 않던 그 느낌과 같았다. 물론, 여기서 억지로 끌어올린다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라크하는 잠시 망설였다. 평소와 달리 몸과 정신 상태가 개운할 뿐더러 망자의 속삭임이 들려오지 않으니까.

16548702582205.jpg“……뭐든 한 가지는 포기하라는 건가.”

금기의 흑마법으로 인한 부작용을 없애거나. 흑마법을 아예 쓸 수 없는 몸이 되거나. 후자를 선택하기엔 아직 라크하에게는 흑마법이 필요했다.

16548702582205.jpg‘지켜야할 것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흑마력을 억지로 끌어올리려던 그때, 라크하는 멈칫했다. 걸림돌처럼 흑마력을 막고 있는 것이 저절로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둔다면 알아서 원상태로 돌아올 것 같았다.

16548702582205.jpg‘일시적인 효과라는 거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라크하는 자조하며 곤히 자고 있는 메이아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계속해서 메이아와 접촉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16548702582205.jpg“평생 그대를 곁에 두어야 하는 걸까?”

나직이 중얼거린 라크하가 천천히 메이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지금은 접촉을 해도 평소처럼 편안하고 나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저 쿵쿵. 묘하게 떨리는 심장의 울림만이 그의 귀를 강타하고 있을 뿐. 무척 이상하고 미묘한 느낌이었다. ***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음날에는 라크하를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사라진 라크하가 문제가 아니었다.

16548702582194.jpg“망할 테리투스…….”

나는 손등 위로 핏줄이 설 정도로 창문틀을 꽉 잡았다. 성물을 가져와 준다고 말한 뒤로 벌써 6일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테리투스는 오지 않았다.

16548702582194.jpg‘이 정도면 그냥 튄 거야.’

그래, 그것 말고는 말이 안 됐다.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문 쪽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벅벅벅.

16548702582194.jpg“……?”

이런 기괴한 소리를 낼 만한 사람, 아니 신은 테리투스밖에 없었다. 나는 언제 테리투스를 욕하고 있었냐는 듯 반가운 마음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에는 노랗고 통통한 생명체가 있었다.

16548702582194.jpg"……황금 돼지?"

16548702640794.jpg"어딜 봐서 돼지라고 하는 게냐!"

테리투스가 나를 향해 호통쳤다.

16548702582194.jpg‘돼지가 아니야?’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테리투스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짧은 기럭지와 빵빵한 볼, 그리고 바짝 세워진 꼬리와 수염. 자세히 보니 고양이였다.

16548702582194.jpg"죄송해요, 제가 착각했네요."

16548702640794.jpg"비키거라."

16548702582194.jpg"아, 네."

테리투스는 튼실한 엉덩이를 씰룩대며 방으로 들어왔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렇게나 통통한 너구리나 고양이는 어디서 찾아서 오는 걸까. 테리투스는 침대 옆에 철퍼덕 앉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16548702640794.jpg"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16548702582194.jpg"예?"

16548702640794.jpg"설마 고양이도 싫어하는 게냐?"

16548702582194.jpg"그게 아니라, 신기해서요. 이렇게 통통한 고양이는 처음 보거든요."

솜뭉치 같기도 하고. 나름 귀여워서 한 말이었는데. 한 번 나에게 당한 적이 있는 테리투스는 욕으로 들렸나 보다.

16548702640794.jpg"메이아야. 본래 통통한 아이들이 가장 귀여운 법이니라."

16548702582194.jpg"음…… 그런 것 같네요."

16548702640794.jpg“그럼 어디 한 번 만져보겠느냐?”

테리투스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벌떡 일어났다.

16548702582194.jpg'전에 있었던 일이 엄청 속상했구만.'

날이 가면 갈수록 위엄 넘치기는커녕, 동네 친구처럼 푸근한 신처럼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으로 다가가 테리투스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하지만 이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나가는 체중에 비틀거렸다.

16548702582194.jpg"윽, 무거워."

16548702640794.jpg"……."

16548702582194.jpg"이, 이게 귀여움의 무게일까요?"

16548702640794.jpg"고럼."

하마터면 또 삐지게 할 뻔했네. 다시 중심을 잡은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테리투스를 무릎 위로 올렸다. 무릎 위가 묵직했다.

16548702640794.jpg“좋구나.”

그래, 테리투스가 좋으면 다행이지. 아직 그에게 받을 게 있으니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좋았다.

16548702582194.jpg"드디어 성물을 구해오신 거예요?"

16548702640794.jpg"그래, 지하 깊은 곳에 있어서 가져오기 꽤 힘들었지."

16548702582194.jpg"어디 있는데요?"

16548702640794.jpg"여기 있지 않느냐. 여기에."

테리투스가 꼬리로 침대를 탁탁 치며 말했다.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아무리 살펴봐도 테리투스에게선 성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16548702582194.jpg"오다가 잃어버리신 거 아니에요?"

16548702640794.jpg"메이아야, 쓸데없는 곳은 그만 보고 꼬리를 잘 보아라."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테리투스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반짝. 무언가가 빛에 반사되었다. 정확히 꼬리와 몸통이 이어져 있는 부분이었다.

16548702582194.jpg"아……."

탄식이 절로 튀어나왔다. 살에 묻혀서 안 보였던 거였다. 나는 테리투스의 꼬리에서 성물을 조심스레 빼냈다.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16548702582194.jpg"끼고 다니기엔 너무 큰 것 같은데요?"

16548702640794.jpg"일단 껴보고 말하거라."

16548702582194.jpg"봐요, 딱 봐도, 제 손가락보다 훨씬 큰…… 어라?"

약지 손가락에 낀 순간, 반지가 내 손가락 굵기에 맞게 줄어들었다. 헉. 엄청 신기해. 넋을 놓고 반지를 바라보고 있자, 테리투스가 뿌듯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16548702640794.jpg"이게 바로 성물이니라."

16548702582194.jpg"그럼 이제 흥분제나 사랑의 묘약 같은 효과가 차단된다는 거죠?"

16548702640794.jpg“그래, 아마도 이제 진정제 효과만 날 게다.”

어떡해. 너무 좋아. 입가에 한가득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나를 보며 테리투스가 팽, 콧방귀를 뿜었다.

16548702640794.jpg“그렇게도 좋으냐.”

16548702582194.jpg“물론이죠.”

16548702640794.jpg“대신 성물을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조심해야 한다. 강한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탓에 근방에서는 모두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16548702582194.jpg“아무렴요. 걱정 마세요. 어차피 저희 대화를 들을 사람도 없는걸요.”

어차피 오늘은 라크하도 안 올 게 뻔했다. 점심과 저녁도 같이 안 먹을 정도라면, 의도적으로 나를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16548702582194.jpg‘아쉽네, 성물이 제대로 통하는지 한 번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는데.’

내 손가락에 끼워진 성물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던 때였다. 벌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16548702685867.jpg“언니!”

16548702582194.jpg“아, 아이샤?”

이 시간에 아이샤가 왜 찾아온 거지? 예고 없는 방문에 당황한 나는 테리투스를 안은 채 굳고 말았다.

16548702685867.jpg“우리 정말 내일 외출…… 응?”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듯 눈을 반짝이며 들어오던 아이샤가 멈춰 섰다. 아이샤의 시선이 내 무릎 위에 있는 테리투스로 향했다.

16548702685867.jpg“……돼지?”

그 순간, 테리투스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16548702640794.jpg“저 버르장머리 없는…….”

헉. 나는 재빨리 테리투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테리투스의 목소리는 아이샤의 귀에 들어간 뒤였다. 살기를 띈 보라색 눈동자가 테리투스에게 향했다.

16548702685867.jpg“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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