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내 사람을 건드는 것만큼은 용납 못 해2021.12.17.
쌍둥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형!"
"오빠!"
“마침 잘 왔어!”
아이샤가 쫄래쫄래, 라크하의 곁으로 달려가 티테스 백작 부인을 가리켰다.
"오빠, 저 여자가 언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듣자하니 때렸다고 하던데.”
“맞아!”
이건 무슨 남매 사기단도 아니고…….
“형, 지금 일을 그냥 넘어가선 안 돼.”
델카인도 라크하의 옆에 붙어 거들었다. 분명 내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나쁠 건 없긴 한데.
‘왜 양심이 찔리냐…….’
마음 한쪽 깊은 구석에 박혀 있던 양심이 꿈틀거렸다. 티테스 백작 부인이 얄미운 건 사실이나, 없던 일을 꾸미면서까지 보복하고 싶진 않았다.
“저…… 공작님, 사실-.”
뒤돌아 라크하에게 솔직히 얘기하려던 때였다.
“안녕하세요, 아인티아 공작님.”
유유히 내 옆을 스쳐 지나간 티테스 백작부인이 라크하의 앞에 서서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련하게 시선을 아래로 툭 떨구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만, 모두 오해로 비롯된 상황이랍니다.”
“오해라고?”
“네, 어찌 제가 사람을 함부로 때리겠어요.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굴 때려보려고 해본 적도 없는걸요.”
“그럼 쌍둥이들이 거짓말이라도 쳤다는 건가?”
“오늘 수업 때 조금 혼을 냈더니 심술이 났나 봐요.”
어쩜 거짓말을 저렇게 뻔뻔하게 하는지. 양심은 개뿔, 조금이라도 티테스 백작 부인을 감싸주려고 했던 내가 바보였다. 쌍둥이들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을 벌리고 티테스 백작 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혼났어!”
“맞아, 형. 우린 혼난 적 없어.”
“오늘 수업에 지각을 했기에 제가 한소리를 했거든요.”
지각한 건 사실인지 아이샤의 입이 닫혔다. 쌍둥이들이 조금씩 밀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내 편을 들어주려고 하다가, 졸지에 지각 사실까지 들켰는데!’
나는 라크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티테스 백작 부인께서 절 때리려고 하셨어요.”
티테스 백작 부인의 얼굴 위로 살짝 금이 갔다. 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를 했을 뿐인데, 무작정 저를 향해 노예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제, 제가 언제 그랬나요?”
티테스 백작 부인이 시치미를 뚝 뗐으나, 이미 목격자는 있었다.
“보좌관님, 제 말이 틀린가요?”
시롬이 나와 티테스 백작 부인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시터님 말씀이 맞습니다.”
“보좌관님!”
시롬이 내 말에 동조할 줄은 몰랐는지 티테스 백작 부인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시롬은 단호하게 받아쳤다.
“티테스 백작 부인, 저는 그저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고, 공작님 모두 오해입니다!”
티테스 백작 부인은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라크하를 향해 외쳤다.
"아, 더는 못 듣고 있겠네."
가만히 티테스 백작 부인을 지켜보고 있던 델카인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 모습에 나는 단연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 때를 제외하곤, 늘 내 앞에서 순한 양처럼 굴던 아이였으니까.
"형, 그냥 죽이면 안 돼?"
……저기, 델카인? 놀란 나와 달리 라크하는 이런 델카인의 모습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델카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유는?"
“충분하지. 형수님을 모욕했고 나와 아이샤가 거짓말을 했다고 몰았으니까.”
“좋아. 아인티아 공작가를 능멸한 것과 다름없으니 죄목은 확실하군.”
라크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티테스 백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말 죽이려는 거야?’
불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티테스 백작 부인을 엿먹이려고 했으나,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아인티아의 예절 교사로서 제명되거나, 공작가와 얽힌 사업이 있다면 그 관계가 끊기는 정도로만 생각했었지. 소설 속에서만 보던 흑막의 모습이 여기서 나타날 줄이야.
“잠시, 잠시만요.”
"오빠! 가루로 만들어 버리자!"
아이샤가 유독 눈을 반짝이며 신나게 외쳤다. 테티스 백작 부인이 없어지면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신난 게 틀림없었다.
'말려야 해.'
나는 황급히 티테스 백작 부인과 라크하의 사이에 끼어들어 그를 붙잡았다.
"안 돼요!"
"……."
머, 멈췄어? 라크하가 내 말을 순순히 들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뒤늦게 내가 그와 접촉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면…….
‘또, 변하고 말 텐데.’
그렇다고 놓자니 테티스 백작 부인을 다시 죽이려 할 테고. 즉, 내게 선택지란 없었다. 나는 그를 붙잡은 채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죽이면 안 돼요."
보랏빛 눈동자엔 확실히 전보다 서늘한 기운이 빠져 있었다. 조금은 멍해 보이는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지?”
"전 눈앞에서 사람이 가루가 되는 꼴을 직관하는 취미는 없거든요."
"먼지로 만드는 건?"
"먼지나 가루나 비슷하잖아요."
"녹여버릴까?"
자연스럽게 상상해 버린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더욱 싫어요."
"그럼 터트려버려?"
이 정도라면, 라크하는 '사람을 죽이는 100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써도 되지 않을까. 끝없이 나오는 방법들에 나는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아뇨! 그냥 어떻게 죽이든 죽이는 건 안 돼요!"
"하지만 나는 내 사람을 건드는 것만큼은 용납 못 해."
기다란 속눈썹 아래 얼핏 비치는 보랏빛 눈동자가 흉포한 기운으로 번들거렸다.
“특히, 그대는 더욱.”
날이 갈수록 접촉할 때 보이는 반응이 더 격해지는 것 같냐……. 상황에 따라 보이는 반응이 당연히 다를 테지만, 매번 라크하의 행동이 곤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괜찮긴 뭐가 괜찮아! 백작 부인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다간 분명,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터. 행여, <티테스 백작 부인, 아인티아 공작가의 시터를 건드렸다가 공작에게 살해당하다!>라는 내용을 담은 가십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돼.'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잡고 있던 라크하의 팔목을 더욱 세게 잡았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아요.”
“메이아, 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공작님을 위한 말이기도 해요.”
어떻게든 그를 말려보고자 뱉은 말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날 위한 거라고?”
정확히는 서로를 위한 거지만. 아무렴 어때.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라크하가 살며시 내 뺨을 잡았다.
"……그대는 어쩜 이리 마음이 넓고, 상냥할까."
“네……?”
"내가 이해가 늦었어. 날 걱정해서 죽이지 말라고 하는 거였구나."
“아…… 예.”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에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좋아, 안 죽일게.”
그가 눈꼬리를 접으며 환히 웃었다.
'저게, 바로 익히 듣던 백만 불짜리 미소구나.'
괜히 주변이 밝아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넋을 놓고 홀린 듯 바라보던 나는 빠르게 정신을 챙겼다.
"번복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응, 약속해."
나는 라크하에게 확답을 들은 후에야 안심했다. 그러곤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그의 손길에서 물러났다. 이윽고 어딘가에 취해 있는 듯한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긴장을 한 탓에 식은땀으로 손바닥이 축축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얼굴을 살펴보려던 그때였다.
"으읍읍! 으브브브!"
옆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입이 막힌 채 델카인의 손에 잡혀 있는 아이샤가 보였다.
'어쩐지 아이샤가 조용하더니…….'
델카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살풋 접어 웃었다.
"형수님, 형이랑 얘기 끝났어?"
"어? 응, 끝났어."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델카인은 아이샤를 놓아주었다.
"푸하! 오빠! 뭐 하는 거야! 죽여!"
"……식사나 하러 가지."
"아니, 식사고 뭐고 죽이라니까!"
"시롬."
아, 깜짝이야. 싫다고 대답하는 줄 알았네. 라크하가 아이샤를 무시하고, 시롬을 불렀다. 그러자, 아이샤는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빙글빙글 돌았다.
"오빠! 화 안 나? 저 여자가 언니를 때리려고 했다니까!"
"티테스 백작 부인에 대한 처분은 알아서 하고 보고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또 한 번의 무시에 아이샤는 씩씩거리며 두 팔을 걷어붙였다.
"됐어. 그럼 내가 저 여자를 직접…… 아!"
"자, 식사 시간이다. 아이샤."
"놔! 놔줘!"
라크하는 달랑 한 손으로 아이샤의 뒷덜미를 잡아들었다. 대롱대롱, 공중에 들린 아이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델카인! 너도 죽이자며! 얼른 오빠 좀 설득시켜 봐!"
"형수님이 싫다고 한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아이샤."
"아악!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 들어!"
역시 저 똥고집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라크하뿐이구나. 새삼 감탄하며 멀거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델카인이 뒤돌아 나를 불렀다.
“형수님! 아직 거기서 뭐 해! 우리랑 같이 밥 먹자!”
“응, 지금 갈게!”
나는 창백하게 질린 티테스 백작 부인을 한 번 흘겨본 뒤 라크하와 쌍둥이들을 뒤따라갔다. *** 공작가의 일원들과 함께 먹는 식사는 남달랐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진수성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
이게 정녕 귀족들의 한 끼 식사란 말이야? 애피타이저에 이어 나온 메인 음식에 내 입은 쩍 벌어졌다. 그런 나를 보며 라크하가 일침했다.
"사제, 그러다 턱 빠지겠어.”
"아, 넵."
씁, 나도 모르게 슬쩍 흘러나온 침을 닦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이럴 시간에 얼른 식사를 즐기기나 해야지. 언제 또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이샤, 또 고기만 먹어?"
나는 식사에 집중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비프스테이크가 담겨 있던 아이샤의 접시에는 야채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델카인, 조용히 해."
아이샤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중얼거렸다. 전에 채소가 싫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역시나 편식을 하는 듯했다.
"전에 형수님이 해준 건 먹더니, 똑같은 재료잖아."
"맛이 달라! 이건 완전 야채 맛이야!"
아이샤가 포크를 꽉 쥐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고기에도 야채 맛이 배어 있어서 짜증나 죽겠는데."
얼마나 야채가 싫으면 저렇게 짜증이 나 있을까. 새삼 감자볶음이 얼마나 대단한 요리인지 깨닫게 된다.
"영원히 안 먹을 수는 없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조금씩 먹어 봐야지 형수님이 해준 건 맛있게 먹었으니, 다른 것도 한 번 먹어볼 수 있잖아."
"다음부터 먹으면 되지!"
"전에도 다음부터 먹겠다며."
이전에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선 똥고집을 부릴 수 없었는지 아이샤가 대꾸 없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어쩐지 내가 해야 할 일을 델카인이 하고 있는 듯한 기분.
'이거…… 내가 나서야 하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끼어들려던 찰나였다. 델카인이 아이샤의 앞에 접시를 내밀었다. 삶은 감자를 으깬 매시 포테이토였다.
"이거라도 먹어 봐. 그때, 형수님이 해주신 거랑 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야."
"……."
이미 한 번 먹어본 채소라 그런지 나름 솔깃한 모양이었다. 아이샤는 물끄러미 매시 포테이토를 내려다보더니 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정말 같은 재료로 만든 거지?"
"응."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매시 포테이토가 아이샤의 입에 들어갔다. 두 번 정도 씹었을까. 와그작, 아이샤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우욱! 퉤!"
입안에 있던 매시 포테이토는 자유의 몸이 되어 툭, 아이샤의 접시 위로 떨어졌다.
"악! 맛없잖아! 짜증 나!"
"음, 못 먹네."
아이샤의 외침에도 델카인은 태연했다. 아이샤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접시 위에 뱉은 매시 포테이토를 쏘아보았다. 이미 한차례 입안을 배회하다 나온 터라, 알알이 분해된 매시 포테이토의 모습은 참혹했다.
"으으! 생긴 것도 더러워! 꼴 보기 싫어!"
……혹시 아이샤가 그건 알려나 모르겠다. 저 더러운 매시 포테이토가 자기 입에서 나온 거란 걸. 이번에야말로, 나는 내가 나서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아이샤, 뱉을 거면 접시가 아니라 냅킨에다가 뱉어야지."
"빨리 뱉고 싶었단 말이야!"
"꼴 보기 싫다며? 그러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떨까? 다들 싫어하겠지?"
아이샤의 입술이 삐죽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래서 언니도 내가 싫어?"
"아니, 아이샤가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싫어져서 나중에 나랑 자기 싫다고 하는 건 아니지?"
그때, 묵묵히 식사를 하던 라크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샤, 그게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