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8 행복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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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8 행복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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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8 행복의 순간
2023.02.13.
“어머! 아, 아주버님?”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이었다. 도현의 교실 앞 복도에 있을 때 누군가 옆에서 큰소리를 냈다. 도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아주버님 맞네요! 이게 얼마 만이에요!”
오혜미였다. 몇 년 만에 보는 오혜미.
“아주버님, 너무 반가워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루한 얼굴로 있다가 나온 혜미는 뜻밖의 조우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반가워서 입이 찢어질 듯 웃는 혜미를 보고도 채도하는 별로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아……. 아린이도 이 학교 다니나요?”
“네, 맞아요! 도현이도 같은 학교인 줄 몰랐는데 세상에, 여기서 나오시는 걸 보니 같은 반이기까지 했네요!”
“그런가 보네요.”
“아주버님이 직접 아이 공개수업에 오신 거예요? 스윗한 아빠시네요.”
“도현이 엄마도 워킹맘인데요, 뭘…….”
“아아, 그렇죠. 그나저나 아주버님은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여전히 멋지시고.”
호들갑을 아무리 떨어도 도하는 굳은 얼굴이었다. 심지어 그는 딱딱한 말투로 그녀에게 이어 내뱉었다.
“그런데……. 주혁이랑 둘이 이혼했으니 이제 내가 오혜미 씨 아주버님은 아니죠.”
“네?”
“뭐, 이제 나는 주혁이 놈도 내 동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놀라는 혜미 앞에서 도하는 더 살벌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혜미는 당황하여 머뭇거렸다.
물론 주혁이 서하에게 그런 짓을 했으니 도하가 그를 동생으로 생각할 리 없는 건 당연하겠지만.
“오빠!”
그때 혜미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도하만 온 줄 알고 한껏 반가워하다가 현서를 본 그녀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혀, 형님.”
현서의 표정 역시 냉랭하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현서는 냉정하지만 점잖은 목소리로 알은척을 했다.
“오혜미 씨를 여기서 다 만나네요.”
“오, 오랜만이에요.”
“그러네요.”
“셋째 출산하셨다는 소식 건너건너 들었어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고맙네요. 1년 반 만에 듣는 축하라니.”
현서가 싸늘한 얼굴과 거리감이 느껴지는 존댓말로 일갈하자 혜미는 점점 더 당황했다.
“하하, 형님도 참. 저야 진작 연락드리고 싶었지만 민망해서 못했죠. 그나저나 SH 코스메틱도 승승장구하던데요. 형님 참 대단하세요.”
동서지간이었을 때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이현서가 이제는 송화궁 원장일 때보다도 더 잘 나가는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칭찬 고마워요.”
“에이, 형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친정아버지가 사업이 어려워져 접으시는 바람에 혜미는 영 이전 같은 씀씀이로는 지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잘 나가는 이현서를 이렇게 만나니 다시 한번 잘 지내보고 싶었다.
이혼 후 진성과도 인연이 끊어진 그녀에게 이제는 이보다 더 좋은 인맥도 없을 테니.
“어쨌든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너무 반가워요, 형님, 저희는 운명인가 봐요. 이렇게도 만나는 걸 보니, 전화번호는 그대로세요? 저희 다시 한번 인연을 이어―”
“―그럼 일 보고 가세요, 오혜미 씨.”
하지만 혜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서는 대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친한 척은 더 들어줘 봐야 시간 낭비인 양 가차 없이 돌아서는 모양새였다.
결국 혜미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부부의 뒷모습만을 멍하게 바라봐야 했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는 멋진 커플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자신들의 아이 도현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이현서 저 여자는 무슨 복일까.
커리어도 화려하고 남편도 저렇게 멋지고 아이도 정말 잘생겼고.
현재의 그녀는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아이를 벌써 셋이나 낳았는데도 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고.
한때 우습게 보던 여자였는데 이렇게 아쉬워하게 될 줄 알았다면 친해질 걸 그랬다.
주혁이 채 회장이 들인 한영숙의 아들이라고 해서 결혼했다가 제 팔자가 이리 꼬이고 말았다.
처음엔 그 결혼 덕에 친정이 운영했던 영세했던 중소기업도 예전엔 진성 덕을 많이 보며 잘 나갔었는데, 채 회장이 주혁을 내치며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그런 생각에 젖어 자괴감을 느낄 때였다.
“엄마!”
“으응?”
“엄마 왜 이렇게 밉게 하고 왔어? 창피하게!”
어느새 다가온 아린이 그녀를 보며 툴툴댔다. 아린은 주혁을 닮아 성격도 인물도 빼어난 부분이 없었다.
멍한 얼굴로 아린의 찌푸린 얼굴을 보고 있던 혜미는 혼잣말을 밖으로 내고 말았다.
“괜찮아, 아린아……. 너는 너만의 매력이 있을 거야.”
“뭐? 뭐라는 거야? 엄마 왜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해? 오늘따라 못생기게 하고 와 가지고, 짜증 나!”
“응? 어, 엄마가 어때서?”
“여기서 엄마가 제일 못생겼어! 도현이네 엄마가 제일 예쁘더라!”
도현이가 사촌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비교하며 짜증을 내던 아린은 휙 돌아서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혜미는 괜히 한번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요즘 카드도 마음대로 못 써서 쇼핑을 오랫동안 못 하긴 했지만.
“그렇게 이상한가.”
괜스레 옷 탓만 하던 그녀는 왠지 처량한 기분으로 아린의 교실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은근히 도하와 현서 커플을 힐끔대고 있었다. 도하도 유명했지만 현서도 최근에 경제잡지에 실리는 등 점점 유명세를 타고 있어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는 듯했다.
앉아 있는 두 사람은 과연 저기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혜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부럽다…….”
도현은 수업 시간을 매우 즐기고 있었다. 눈동자에 총기가 가득해서는 의욕적으로 참여하고 내내 밝은 표정이었다.
선생님과 소통할 때도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따스한 눈빛을 가진 아이였다.
아들을 바라보고 있던 도하는 곁에 앉아 있던 현서를 슬쩍 보았다. 그녀 역시 그와 같은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잘 자라주었어, 우리 아들. 내 아내 현서가 잘 키워낸 덕분이겠지.
도하는 그 순간 다시 한번 현서와 아들 둘 다에게 실로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
“오빠! 잘한다!”
우도의 백사장에는 터울이 제법 큰 남매가 모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아도 해볼래!”
“응, 이렇게 넣어서 꾹꾹 눌러 봐, 지아야.”
“응!”
꼬물꼬물 작은 손으로 모래를 만지는 지아를 보며 도현은 씩 웃었다. 뭘 하고 있어도 예쁘고 귀여운 동생이었다.
그리고 둘의 앞에는 그런 둘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부부가 있었다.
상냥한 눈빛을 한 가족들의 뒤에는 쪽빛 바다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모처럼 가족들은 며칠의 시간을 내어 제주도로 함께 여행을 왔다.
“지아야, 잘 돼가? 아빠가 도와줄까?”
“아니야. 아빠 도와주지 마. 지아 잘해!”
“하하, 알았어. 우리 지아 파이팅!”
이제 30개월이 된 지아는 빠르게 말이 늘고 있었다. 그래서 한창 종알종알 말을 많이도 했다.
지아는 정말이지 자랄수록 서하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닮아갔다. 사랑스러운 성격마저 비슷했다.
아홉 살이 된 도하는 사려 깊고 심성이 고운 어린이로 자라고 있었다.
“지아야, 우리 엄마를 덮어볼까?”
“그래!”
도현이 제안하자 지아는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두 아이는 엄마의 다리를 흙으로 마구 덮기 시작했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 해맑은 웃음소리가 연신 울렸고 현서와 도하의 웃음소리도 함께 끊이지 않았다.
***
낮에 바닷가에서 실컷 놀았던 아이들은 저녁 식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밤이 되자 주위가 조용했다. 부부는 조용한 테라스에 앉아 밤바다를 바라보며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잔잔한 밤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치 연인의 귓가에 불러주는 달콤한 노랫소리와도 같았다.
“평화롭네요.”
오로지 부부 둘만의 시간이었다.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켠 현서가 감탄했다.
“아, 시원하다!”
“그러네. 맥주도 시원하고 밤바람도 시원하고.”
도하는 밤바다를 보던 눈동자를 돌려 현서에게 향하더니 문득 말했다.
“이현서도 예쁘고.”
현서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도하는 그녀가 그렇게 웃는 모습까지 빼놓지 않고 바라보았다.
마음을 울리는 저 청량한 웃음소리는 늘 그를 치유했다. 온화하게 휘어지는 저 눈웃음에 가슴 가득했던 얼음이 녹았다.
지금도 매일 그녀에게서 힘을 얻는다. 살아갈 이유를 얻고 힘을 얻고 사랑을 얻고.
현서의 눈빛에도 설렘이 스치고 지나간다. 말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난 현서는 대신 도하의 무릎에 앉았다.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그를 마주 보자 도하가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점점 더 섹시해지기도 하고.”
현서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마가 맞닿을 때쯤 그녀가 멈추자 도하가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
“이현서.”
“응.”
“사랑한다.”
현서는 그 고백에 대답해주듯이 더 그의 곁으로 몸을 기울여 다가갔다. 그녀가 망설임 없이 먼저 도하에게 입을 맞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하가 머금었다.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더위를 식혔던 연인들은 이리도 밀착하며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매일 안아도 부족한 것처럼 또 서로를 안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뜨거움은 기꺼이 반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깊은 입맞춤을 나누며 현서의 허리를 쓰다듬던 도하가 입술이 떨어지자 나직이 말했다.
“우리 침실로 가자.”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현서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는 그 자세 그대로 현서를 번쩍 안아 들었다. 현서도 그에게 꼭 매달린 채였다.
부부의 방으로 들어간 도하는 깨끗하고 폭신한 침구 위에 깨지기 쉬운 유리를 내려놓듯 조심스레 현서를 눕혔다.
집이 아닌 여행지에서 서로를 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낯선 장소가 주는 설렘을 두 사람은 한껏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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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놓은 물건 없지?”
“엄마! 내 뽀요요 우산 챙겨쪄?”
엄마 손을 잡고 펜션의 현관을 나서던 지아가 기억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엄, 우리 지아 뽀로로 우산, 이 엄마가 진작 챙겼지!”
“자, 그럼 이제 출발해야지. 다들 차에 타.”
“잠깐만요, 아빠!”
갑자기 도현이 들고 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열었다.
“우리 넷이 사진을 한 번도 안 찍었어요!”
“그랬나?”
“엄마 아빠는 우리만 찍어주고 나는 지아랑 엄마 아빠 찍어주고. 우리 넷은 못 찍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네 식구가 동시에 포즈를 잡은 적은 없는 것 같아 도하와 현서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한 장은 남겨야죠! 여기 예쁜 바다 앞에서 찍어요!”
“알았어. 기다려봐. 삼각대 꺼내야지.”
도하가 가방에서 삼각대를 펼치자 도현이 자신의 핸드폰을 고정했다.
도하는 지아를 안고 섰고 그 옆에 현서가 붙어 섰다.
“좋아요! 자, 다 같이 치이즈!”
타이머를 맞춰 누른 도현은 쪼르르 달려가서 엄마 앞에 자리를 잡았다.
찰칵-
오늘의 행복이 하나의 순간이 되어 멈추었다. 하나의 예쁜 순간으로 남은 네모난 사진 속에서 가족들은 어느덧 네 명이 되어 있었다.
화사한 햇살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바다 앞에서 네 사람은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