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외전 3
(80/92)
80. 외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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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외전 3
2023.01.05.
[도현이 카레 좋아해?]
오후 회의 중에 도하의 문자를 받은 현서는 하마터면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네, 도현이가 카레는 좋아하지.]
[그럼 만들어줘야겠다. 퇴근하고 봐, 현서야. 힘내.]
[수고해요.]
회의 중이라 길게 보내지 못하고 간단히 답장을 끝낸 현서는 다시 회의에 집중해야 했다.
그런데 자꾸 입꼬리가 올라갈 거 같아서 참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빨리 가서 보고 싶다.
전에는 집에 가서 보고 싶은 사람이 도현 한 명뿐이었는데, 이제는 두 사람이 되었다.
그만큼 기쁨도 두 배구나, 정말.
.
.
.
“나 왔어요, 오빠.”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카레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고 있었다.
“고생 많았어. 어서 와.”
도하가 주방에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엄마가 오는 소리에 도현도 방에서 나와 그녀를 반겼다.
“응, 우리 도현이 잘 놀고 있었어?”
“응!”
“아빠가 오늘 맛있는 거 많이 해주시네?”
“아빠 요리 진짜 잘하나 봐!”
“그런가? 한번 볼까?”
현서는 그 말을 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이미 식탁 위에는 여러 찬들이 올려져 있었다.
“도현이랑 앉아, 현서야. 지금 카레 떠줄게.”
“좋아요. 도현아! 어서 와!”
현서는 웃으면서 식탁에 앉았다.
도현도 앉자 곧 그들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빛깔도 고운 노란 카레가 올려졌다. 좋은 재료들이 듬뿍 들어간 카레였다.
“소고기 카레네요. 브로콜리도 들어가고 버섯도 들어가고 재료가 엄청 좋네요. 영양가도 많겠네.”
“도현이 먹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나 혼자 해먹을 때보다 재료에 신중하게 되더라고. 전에는 아이가 작았었으니 현서 네가 고충이 많았겠어. 네 덕분에 도현이가 이제는 잘 컸고.”
“그걸 알아주니 흐뭇하네요.”
어찌 되었든 얼떨결에 오늘부터 시작된 채도하의 주부 생활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현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주일에 두 번 가사도우미가 오긴 하지만 오늘은 오는 날이 아니었는데도 집 안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역시 채도하 씨는 뭐든지 잘하나 봐요. 회사 일 잘하는 사람이 다른 것도 잘하는 건가? 요리도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고요.”
현서는 엄지를 들어 보이며 그를 칭찬했다.
“요즘은 동영상이 많잖아. 좋은 레시피가 많아.”
“정성 가득 카레 잘 먹을게요. 도현이도 잘 먹겠습니다 해야지.”
“아빠, 잘 먹겠습니다!”
곧장 현서는 카레라이스를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집밥 메뉴였지만 맛은 매우 훌륭했다.
“맛있는데요? 이건 정말 내가 만든 거보다 맛있어요!”
“설마 이현서 표보다 나으려고. 남이 해준 거라 맛있는 거 아닐까?”
“아니야, 아빠, 정말 맛있어!”
“그래? 도현이가 맛있다고 하니까 진짜 다행이네. 아빠 나름 긴장했거든.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도현이가 안 먹을까 봐.”
아이는 역시 솔직한 존재라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도현은 카레라이스를 더욱 수북이 떠서 입에 넣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하보다 현서가 더 놀라고 있었다.
“얘 원래 브로콜리 잘 안 먹는데 카레에 들어간 건 먹네요. 신기해라.”
“그렇다면 이 아빠가 참 만든 보람이 있네. 도현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아빠가 한 달 동안 많이 많이 해줄게.”
현서의 말에 더 뿌듯해져서는 도하는 도현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응! 그럼 불고기도 해줘, 아빠!”
“그래, 알았어. 내일은 불고기 해줄게.”
현서는 이 순간이 참으로 단란해서 표현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도하가 들어와 있는 이 풍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마 상상해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바라지 말아야 할 것처럼 여겨서일까. 상상이 달콤할수록 희망 고문 같아서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차단해왔던 광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사람, 다른 것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 가족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셋이 된 우리만을.
그녀만큼이나 마음 괴로울 도하에게 자유를 주고 이 행복에 초대하기로 마음을 먹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심 후 정말 지금의 이 순간에 들어와 있게 되니 그러길 잘한 것 같았다.
이제는 도하와 그녀는 행복만을 바라보기로 했다.
현서는 이 순간 마음에 아이와 아빠의 모습을 깊숙이 새기듯이 바라보았다.
***
“현서야, 목욕물 받아줄까?”
오늘 저녁에도 도현과 함께 씻고 나온 도하가 물었다.
“그래요, 오랜만에 나도 편히 몸 좀 담가볼까요?”
“그럼 지금 받아둘게.”
“고마워요.”
“도현이는 걱정하지 말고 자유 시간 가져.”
물이 다 받아지자 현서는 옷을 벗고 홀로 욕조에 들어갔다. 도하가 허브 솔트와 꽃잎까지 찾아서 띄워놓았다.
사놓고 막상 자주 못 썼던 제품들인데.
늘 저녁에는 도현을 씻기고 재우고 하느라 이럴 만한 여유가 잘 없었는데 어제오늘 남편이 도현을 도맡아주니 참 편한 건 사실이었다.
따끈한 온수에 온몸을 담그니 노곤했던 심신이 서서히 풀리는 것 같았다.
“아……. 너무 좋네. 힐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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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밖으로 나가보니 안방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도하가 커튼을 닫고 있었다. 천장 등은 꺼져 있고 스탠드만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잘 준비를 해둔 모양이다.
“도현이는 잠들었어요?”
“응.”
현서의 질문에 도하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수고했어요.”
현서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해주자 도하가 다가왔다.
“머리 말려줄까?”
현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서가 화장대 앞에 앉자 이내 도하가 헤어드라이어를 들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정말…….”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씩 이렇게 남편이 머리를 말려줄 때가 있었다.
마지막은 이혼 전 도현이 생긴 그날 밤이었고.
윙 소리와 함께 도하의 손길이 현서의 머리칼에 닿았다.
두 사람은 그때처럼 또다시 거울을 통해 서로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나 몇 년 전 같은 상황일 때와는 달리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현서는 그가 만지고 있는 머리칼도 간지러웠지만 이 순간의 분위기 때문에 심장이 더 간질거렸다.
소음이 멈추었고 도하가 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도현이 옆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눈 잘 뜨고 있었잖아.”
도하가 하는 말에 현서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왜요?”
“너랑 둘이서 시간 보낼 틈이 계속 없었잖아.”
매일 그리던 아이와의 시간도 너무도 행복했지만 아이도 그만큼 반가운 아빠에게 껌딱지가 되는 바람에 부부의 조용한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현서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거울 속 그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채도하와 한방에서 자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괜스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윽고 현서는 일어섰다. 그를 돌아보자 도하가 그녀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르며 서서히 당겼다.
“몇 년을 기다린 순간인데.”
현서는 그를 향해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도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현서의 이 맑은 미소를 이렇게 다시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잃어버린 줄 알고 절망하던 때가 오래 지나지 않았다. 온 세상을 잃었던 그때가.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렇게 너를 다시 안아볼 수 있어서.”
다시는 만질 수 없고 다시는 안을 수 없을 줄 알았다.
현서는 애잔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 역시 이렇게 이 남자와 서로 마주 보게 되는 순간이 다시 올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너무도.
“이제는 괜찮아요.”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제는…….
“괜찮을래요.”
“그래. 괜찮아. 우리니까 괜찮아야지.”
현서의 얼굴에 찬찬히 미소가 번져갔다. 그 역시 괜찮다고 말해주어 다행이었다.
많은 것들을 견뎌오던 시간들. 사실 그 모든 순간마다 서로가 빠질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순간에도 실은 서로가 곁에 있었던 것이다.
서로를 절대 잊을 수가 없었으니.
이제 두 사람은 인정했다. 그만큼 뗄 수 없는 서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니까, 괜찮을 것이다.
“사랑해, 이현서.”
돌고 돌아온 길 끝에서 결론처럼 할 말은 무엇보다도 단순했다. 사랑. 단지 그 하나뿐이었다.
사랑하니까 잊을 수 없고 사랑하니까 아팠고, 사랑하니까 곁에 있고 싶었다.
이 말을 다시 하기까지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절망을 겪었고 마침내 깨달았다.
다시금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는 걸.
“정말…… 사랑해.”
“……알아요.”
미소짓는 현서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반짝였다. 두 사람 외에는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미소였다.
서로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애끓는 마음을 알까. 서로가 아니라면 같은 아픔도 같은 기쁨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도하는 현서의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를 순순히 받아들이듯 현서가 살며시 눈을 감는 모습이 보였다.
도하는 눈을 감고 기다리는 현서의 이 모습이 너무 예쁘고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현서야, 너는 정말 알까.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너를 사랑한다고 다시 말하는 일이 내겐 인생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래서 이 순간 너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를.
나를 구해주고 나를 여전히 사랑해주는 네가 내 앞에 있다는 게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를.
도하는 마침내 그 자신도 눈을 감으며 그녀에게 느리게 입을 맞추었다.
초대에 응하듯 현서가 입술을 열어주자 곧 벅찬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현서는 그녀의 얼굴을 소중하게 감싸고 서럽도록 애틋하게 밀려드는 남자에게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오래도록 사랑해왔던 남자가 이제는 그녀보다도 더 큰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모든 걸 포기하면서까지 보여주었었던 진심을 이 순간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두 개의 달뜬 호흡 속에서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욕망이 떠올랐다. 이제 사랑은 불안한 감정이 아니라 완성체가 된 실체와도 같았다.
오늘은 마치 비로소 서로가 진정으로 부부가 되는 날과도 같았다.
현서 혼자만의 침실은 부부의 침실이 되었고, 그래서 매우 은밀해져 있었다.
이내 침대 위에 눕게 된 현서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도하를 향해 두 팔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도하는 현서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으며 다시금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 뭉클한 입맞춤이 실로 오랫동안 그리웠었다.
귀하고 소중한 내 아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내 아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아내 단 한 사람에게 그의 모든 마음을 주었던 것이다.
이 순간의 감격에 취한 도하가 현서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제 내가 평생 너랑 도현이 지켜줄게.”
그리고 현서도 그의 말에 화답했다.
“나도 평생 오빠 곁 떠나지 않을게요.”
그 말이 너무 달아서 도하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의 기억 속에서 아련하도록 남아 있던 살결의 향이 코끝에 스몄다. 그 또한 너무도 달큰했다.
서로의 사랑을 온전히 확인하고 신뢰하게 된 남녀의 욕망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뜨거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밤은 이제껏 가졌던 어느 밤보다도 열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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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채 현서가 읊조렸다.
도하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현서의 등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장난스레 만지고 있었다.
“이 집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잊지 마요.”
녹초가 된 그녀는 여전히 꼼짝도 못 하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난 이대로 잠들 생각 아니었는데?”
“알았어요, 그럼 얼른 옷 입어요.”
“아니, 난 한 번 더…….”
“네?”
현서는 어이가 없었다. 방금까지 꼼짝 않던 그녀는 그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물론 내일이 주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벌써 3시가 넘었어요.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이…….”
현서가 뒷말을 흐리자 도하가 씩 웃었다.
“누가 그래? 충분하다고.”
놀라서 고개를 돌려 쳐다본 현서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빛이 은근히 응큼해서 그녀는 고개를 다시 휙 돌리며 말했다.
“우리에겐 많은 시간이 있어요, 채도하 씨.”
“그래도……. 몇 년 만에 함께한 밤인데.”
도하가 여전히 미련이 그득히 남은 듯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자 현서는 또 그에게 붙잡힐세라 얼른 나와서 옷을 주웠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직하게 웃음을 흘리던 도하가 문득 던졌다.
“우리 제2의 신혼여행 갈까?”
“그럴까요? 도현이도 여행 좋아하는데. 편히 지낼 수 있는 휴양지로 같이 가면 좋겠네요.”
“안 돼.”
도하가 딱 잘라서 말하자 옷을 입던 현서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뭐가요?”
“도현이는……. 같이 가면 안 돼.”
“…….”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현서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를 보며 도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주말에 아버지…… 한테 맡기고 가는 건 너무한가?”
“너무하죠.”
“왜, 이제 도현이가 아기도 아닌데. 도현이도 할아버지 엄청 좋아하던데.”
“그래도 죄송해서…….”
“흠……. 그럼 우리 둘만 있는 공간으로 가려면 어떡해야 하나.”
도하는 지금부터 골몰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