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싫어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 (37/92)


#37. 싫어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
2022.08.08.



 


“잘라줄까?”

현재로선 통하지도 않을 과잉친절의 말을 던진 후에야 현서는 뾰족한 눈초리를 하고 그를 보았다.


“아니요. 내가 알아서 먹을게요.”

하는 수없이 현서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도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한동안 현서는 보란 듯이 음식을 먹는 데만 열중했다.

빨리 해치우면 빨리 집에 갈 수 있겠지.

하지만 말도 없이 음식을 씹다 보니 문득 이게 뭘 하고 있는 짓인가 싶었다.


“근데 왜 자꾸, 채 전무님은 만날 때마다 저한테 밥을 먹이려고 해요?”

“만날 때마다 다 혹이 붙어 있었잖아. 우리 둘이 먹은 적은 없었지.”

“그래서 이렇게까지 한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너무 야박하게 굴지는 말아줘, 현서야.”

현서는 기가 막혔다. 예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집 안에는 코빼기도 안 보였으면서. 그래서 남편 없는 식사 시간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냥 밥 한 번 같이 먹는 것뿐이야.”

“나랑 밥 한 번을 먹기 싫어했던 사람이 누군데요.”

불쑥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

도하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잠시 말이 없었다.


“……미안해.”

그러고는 너무 순순하게 사과를 했다.

현서는 그런 채도하의 모습이 꽤 놀라웠다.

그는 늘 그 자신의 일이 중요했고 그래서 늘 자신만의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그녀의 말에 수긍을 한다.

원래의 그는 좀처럼 남 앞에서 숙이고 들어가는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건 진성의 황태자가 되기 전부터도 그랬다. 본래 태생이 그런 사람처럼.

가진 것 없는 한영숙의 밑에서만 오로지 자라던 어린 시절부터도 주변 눈치 보는 일이란 없이 항상 당당했다.

20년을 넘게 알아 왔어도 이런 남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싫어서 그랬던 건 당연히 아니었어. 그랬을 리가 없잖아.”

그는 사과를 하고도 곤란해 보였다.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든 건 나였겠지.”

현서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전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한테 그게 미안해.”

적어도 그의 얼굴은 정말 그녀에게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이렇게 사과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너를 다시 만나고 싶었어. 너를 기다렸어.”

채도하라는 남자가 하고 있는 말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돌아보면 너와의 시간이 소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그 말에 현서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래, 정말 돌아볼 수밖에 없었어. 많은 생각을 했고.”

그가 자신의 말을 새삼 강조하듯이 말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르게 살아볼 텐데. 다른 어떤 것들보다 네 행복을 먼저 생각할 텐데……. 바보 같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지냈어. 너 없는 동안에.”

현서는 그 말에는 자칫 눈가가 뜨거워질 것 같아 눈을 꾹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러나 현서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어떻게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실은 이 코스메틱 사업도…….”

혼란함에 휩싸여 있는 그녀에게 도하가 문득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너 생각하면서 시작한 거야.”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현서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가족에게 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좋은 것들을 주었던 그가 좀처럼 주지 못했던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그의 시간이었다.

그야 당연히 일만 하느라 그랬다. 늘 아내는 일 다음이었지, 우선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그 일이란 것 자체가 아내를 위해 벌인 거라고? 그 말을 믿으란 건가.


“정말이야. 언젠가 너 다시 만나면 너한테 주려고 만든 회사야.”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요?”

“사실인데.”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지만 우습게도 그의 말대로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슬프게도 그는 이런 식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식의 허풍도, 허세도 없었다.


“사실 당시 회사 상황상, 화장품 사업을 벌일 만한 때는 아니었어서 말이 많았었어.”

그건 현서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났을 무렵의 진성이 주력으로 밀던 일들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 만한 상황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염원하던 분야였음에도 당시 남편이 크게 호응하지 않았던 것도 이해했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시작할 이유가 없던 사업이야.”

“…….”

물론 남편이 평소에 관심 갖던 분야도 아니었다.

그런데 순전히 이혼한 전부인에게 질척이기 위해 그 일을 시작했다고? 그 채도하가? 회사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아니, 그러니까, 왜요? 왜 나 때문에…….”

“네가…… 원하던 일이었잖아.”

현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너 다시 만나면 네 꿈을 이루어주고 싶어서, 너랑 같이 일하고 싶어서 만든 회사야.”

곤란했다. 채도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믿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곤란했다.


“이제 와서…… 대체 왜…….”

“내가 늦었다는 건 알아.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어, 현서야.”

현서야, 라고 부르던 말버릇도 여전했다. 어릴 적부터 한결같이 무뚝뚝했던 주제에 이름만 다정하게 불러서는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던 남자였다.

이제 사람 좀 그만 흔들었으면.

이제는 화가 났다.

이미 기차는 떠나버렸는데, 떠난 줄을 모르고 이러고 있었던 거야?

이러면 누가 받을 줄 아나.

이혼하고 떠난 사이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이토록 스케일도 크게 말이다.

채도하의 이런 짓들이 그녀를 더 서글프게 만들고 있었다.

현서는 이제 자신이 과거의 채도하보다도 더 냉정해지고 싶었다. 서글플수록 더 그러고 싶어졌다.

현서는 굳은 얼굴로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떠난 사람일랑 잊고 그냥 잘 살지. 뭐 하러 그런 청승을 떨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녀의 그 말은 생각보다 채도하에게 타격을 준 듯했다.

평소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남자의 얼굴에 조금은 서러운 기색이 비치고 있었다.


“청승으로 보이는구나, 너에겐…….”

지금껏 빤히 현서의 얼굴만 바라보던 남자는 그렇게 중얼대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치 꾸중 들은 어린아이처럼 풀이 죽은 모습에 현서는 말문이 막혀 입을 오물거렸다.


“…….”

받을 수 없는 선물을 주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남자를 보는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준다고 누가 받는대요?”

“알아. 네 마음 되돌리기 쉽지 않을 거란 건 벌써 뼈저리게 느꼈지.”

 

 
도하는 이내 다시 눈을 들어 현서를 보았다.

3년 전, 모든 인연을 독하게 끊어내고 떠나버린 여자였기에 그 인연을 다시 이어붙이는 게 어려울 거라는 생각은 했다.

이런 식으로 뒷북이나 치는 전남편 따위 더이상은 반기지 않을 거란 건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랬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서의 냉담한 반응은 생각보다 아팠다.

그녀도 아팠던 걸까. 그녀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되돌려주지 못했던 그 수많은 순간에.

그래서 사랑도 결혼도 다 그만두고 떠나버린 걸까.

하지만 도하는 그녀가 이 관계를 포기했다고 해서 저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마저 포기하면 이 관계는 영영 끊어지게 되는 거니까.

어떻게 다시 이어붙인 관계인데.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이렇게 저라도 부여잡아야 간신히 이어지는 관계가 되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좌절이 되더라도 포기가 되지는 않았다.


“나에겐 이 SH 코스메틱 일이 회사 내 다른 어떤 거대한 사업보다도 중요하고도 소중한 일이었어.”

도하는 그저 담담하게 고했다. 이제 와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진솔하게 실토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네 꿈을 도우려고 만든 건데, 너는 이미 꿈을 이루었더라. 나 없는 곳에서 네 힘으로…….”

의도하지는 않았는데도 목소리가 쓸쓸하게 흘러나왔다.


“이미 우리 회사 제품보다 훨씬 더 좋은 품질의 화장품을 개발했잖아.”

그녀 앞에서 쓸쓸해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지금 자신이 하는 양을 보면 머저리가 따로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솔직히, 좀 허탈하네.”

현서는 머릿속이 온통 복잡했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죄다 어지러운 말들뿐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대꾸하지 않는 현서를 바라보며 도하가 계속 말했다.


“물론 SH는 앞으로도 내가 계속 공들여서 이끌어나갈 생각이야.”

비록 진짜 주인은 잃어버렸지만. 비록 본래의 목적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헛수고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이제는 애정이 담겨서 끌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다.


“너 떠나고 나서 허무하게 너만 기다리다가, 기다리는 동안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찾다가 시작하게 된 일이었어. 덕분에 이 사업에 집중할 때마다 너를 떠올렸어. 나한테는 많은 의미를 준 일이니까 괜찮아. 일을 하면서 네 생각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고, 또 무엇보다 이 일 덕분에 이렇게 너랑 재회하게 되었잖아.”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큰 행운을 가져다준 사업이었다.


“비록 일적으로 얽히게 된 사이라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또 덕분에, 적어도 너를 위해 이런 일을 해왔다는 걸 너한테 보여줄 수는 있게 되었잖아.”

그는 이 순간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이런 이야기를 현서에게 들려주게 될 순간을.


“그러니까 나는 그냥……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녀의 부재를 견디기가 어려워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도 흘러갔다.


“내가 너한테 이런 내 마음까지 존중해주길 바라서는 안 되겠지. 비록 난 그럴 자격도 없겠지만…….”

그는 꼭 지금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 브랜드를 네가, 싫어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순간이 눈앞의 여자에게는 그저 곤란하기만 한 듯했다.

그가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이현서는 멀어져 있던 것이다.

민망한 분위기를 완화해보려 도하는 조금 웃었다.


“근데 이렇게 다시 만나서 보니까 말이야. 역시 너는……. 나한테 아무 미련이 없었나 보다.”

3년 정도 못 보았으면 이 여자도 조금은 반가워 해줄 줄 알았던가.

너를 생각하며 사업을 벌였노라고 고백하면 감동이라도 해줄 줄 알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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