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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바쁘지 않으세요? (36/92)


#36. 바쁘지 않으세요?
2022.08.04.


일요일에도 영숙은 혜미와 함께 송화궁을 찾았다.


“아휴, 좋다. 이 맛에 너무 중독되네.”

“맞아요. 요즘 여기 너무 자주 와서 주혁 씨한테 잔소리 들었어요.”

서비스가 끝난 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이 문을 나서는데 문밖에 지배인, 김 실장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어어, 김 실장. 안녕?”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주고받던 영숙은 문득 얼굴을 굳혔다. 김 실장의 손에는 지난번 자신이 건넸던 상자가 들려 있었다.


“저, 사모님. 이거 다시 받으세요.”

“뭐, 뭔데, 이게…….”

설마설마하며 얼떨결에 물건을 받자 김 실장이 설명했다.


“원장님께서 안 받으셨어요. 다시 돌려드리라고 하시면서요.”

“뭐어?”

“어머, 어떡해요, 어머니.”

“아니, 무슨 학부모가 선생님한테 주는 것도 아니고, 법에 걸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신데? 회원이 선물 주면 안 되는 규칙이라도 있어요?”

“정확히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럼 김 실장님, 내가 원장님 만나서 직접 대화 좀 해보면 안 될까요?”

“원장님 오늘은 오프셔서 출근 안 하셨어요.”

“아니, 그럼 언제 되시는데?”

“요즘 바쁘셔서 만나 뵙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깔끔하게 돌아서는 김 실장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며 영숙은 입을 떡 벌렸다.


“이게 싫다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 고스란히 되돌아온 데다가 원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지배인을 시키니 영숙은 더 무안했다.


“아니면 어머니, 혹시 선물이 너무 약소했던 게 아닐까요?”

“그, 그런가? 루나 리인지 뭔지 그 원장이 그렇게 대단한 거야? 하, 참…….”

지금껏 선물을 거절당한 적은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새삼 더욱 느끼게 된 이곳 원장의 고고함에 부글부글 열불이 끓었다.


“그럼 대체 뭘 갖다 바쳐야 하는 거야?”

 

***

SH 연구소장과 약속한 날이었다. 늦은 오후, 시간이 얼추 다 되어 현서는 연구소장의 문자를 받았다.


[이 원장님. 저 도착했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들어오세요.]

그리고 잠시 후 원장실로 들어온 건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구소장의 뒤에 있던 또 한 사람은 놀랍게도 또 채도하였다.


“다시 뵙습니다, 이 원장님.”

당황하는 현서에게 도하가 천연덕스레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채 전무님도 오셨네요.”

지난번 미팅 때 내내 틱틱거렸더니 이번에는 다른 직원과 함께 온 건가.


“이 원장님께서 부담가지실까 봐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연구소장만 실실 웃고 있었다.


“아……. 네. 근데 채 전무님은 요즘…… 많이 바쁘지 않으세요?”

“오늘은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저도 듣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라서요.”

“부디 그러실 만한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채도하와의 예기치 못한 두 번째 미팅이었지만 오늘은 연구소장이 껴 있었으니 현서도 불편함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연구소장이 일에 열정적이었던 덕에 현서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분야에 열성이 있기는 현서도 마찬가지여서 대화는 나름 유익했다고 할 수 있었다. 가시같이 껴 있는 채도하만 빼면.

그가 이렇게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고 있어서 현서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한창 열띤 상의를 하고 있던 중에 연구소장이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웠고 잠시 도하와 현서 둘만 남게 되었다.

덕분에 원치 않는 어색한 공기에 놓이고 만 현서가 냉랭하게 입을 뗐다.


“채 전무님. 자꾸 쓸데없이 오지 좀 마세요.”

“쓸데없지 않아. 오늘 아주 알찬 미팅인데.”

“그러니까 왜 굳이 대표가 오냐고요.”

“몰라서 물어? 보고 싶어서잖아.”

현서는 순간 가슴이 선득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이내 놀란 눈으로 문가를 보았다. 다행히 어떤 기척도 없었다.


“말조심하세요. 혼자 온 것도 아니면서.”

“난 들켜도 상관없는데.”

그 말에 현서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쏘아보았다.

하긴. 주변에 둘이 과거에 부부 사이였다는 사실을 들킨다고 해서 이 사람이 곤란할 일은 별로 없었다. 곤란한 건 아이를 숨기고 있는 이현서지.

그런데 이토록 냉랭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타격이 없는 듯 도하가 말했다.


“이렇게 안 하면 볼 일이 없잖아. 일에 관한 건 물어봐도 된다며…….”

현서는 일전에 제가 한 말을 기억하며 순간 입을 닫았다.


“원래 이렇게 능청스러운 사람이었어요?”

“그러게. 만나주지 않는 이현서를 만나려면 이럴 수밖에.”

 

 
그 말을 하던 중에 연구소장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원장님. 6시가 넘었네요. 못다 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러게요. 아쉽네요.”

그때 도하가 자연스레 끼어들며 말했다.


“그럼 저녁 식사라도 하며 더 이야기할까요?”

“저는 좋습니다. 원장님은 어떠세요?”

이 분위기를 눈치챌 리 만무한 연구소장까지 현서에게 권했다.

잠깐 머뭇대던 현서는 다음 기회에 다시 뵙자고 말하려다가 다음 기회에도 또 채도하가 따라올지도 몰라 오늘 내로 끝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실까요, 그럼.”

현서가 수락하자 도하의 안면에는 흡족한 미소가 스쳤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에 큰 소득을 얻기라도 한 듯이.

현서는 그런 도하의 표정을 발견하곤 모른 척 딴 데를 보았다.

잠시 후 주차장으로 향하며 도하가 현서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이 원장님, 제 차로 함께 가실까요? 이따가 다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제 차로 따로 가서 뵙죠.”

1초도 고민 않는 현서를 보며 도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도착해서 뵐게요.”

현서는 그가 다시 권할세라 빠르게 자신의 차에 타버렸다.

.
.
.

저녁 식사 장소는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분위기가 조용한 양식 전문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 먼저 출발했던 현서가 진작 도착하여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혼자 도착한 도하가 가까이 다가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 눈빛이 변하는 게 보였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먼저 주문하시죠, 이 원장님.”

자리에 앉은 도하가 메뉴판을 주며 권하자 현서는 말없이 메뉴판을 받아서 펼쳐 보았다.

이 자리가 한없이 불편했던 현서는 그마나 소화가 잘되어 보이는 메뉴를 골랐다.

그 후 점원이 왔고 채도하가 주문을 하는데 조금 이상했다.

왜 두 개만 먼저 시키지? 연구소장이 늦나?


“소장님은요?”

불안한 목소리로 묻는 현서를 향해 도하가 답했다.


“안 올 거야.”

“네? 왜요?”

그러나 의문 가득한 현서의 얼굴을 보며 도하는 싱긋 웃었다.

아까 송화궁 주차장에서 현서가 차를 출발시키는 모습까지 지켜본 도하는 곁에 서 있던 연구소장에게 그렇게 권했었다.


‘소장님. 급한 안건이 아니라면 소장님은 여기서 이만 마무리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와의 식사 자리도 편하진 않으실 텐데. 솔직히 많이 불편하시겠죠.’

‘불편하지 않습니다, 전무님.’

그 대답은 어차피 형식적인 것일 터. 원료 개발자인 이현서 원장과의 대화는 어려울 게 없겠으나 사실 대표와의 식사는 편하지 않을 게 당연했다.

도하가 저녁 식사까지 권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대화를 끝내기가 아쉬웠어도 미팅 시간을 연장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소장님은 오늘 저랑 말고 직원들이랑 회식을 하시죠. 다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는데.’

‘아,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예. 아끼지 마시고 맛있는 걸로 직원들 대접해주세요. 저는 이 원장님한테 따로 상의 드릴 내용도 있고 하니 얘기 좀 하다 갈게요. 소장님은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가보세요.’

‘하하, 그럼. 감사합니다, 전무님.’

그렇게 도하는 예의 있게 연구소장을 떼어내고 혼자서만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서는 현재 상황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소장님은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대요?”

“무슨 일이 생기긴 했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연구소장을 보냈어.”

“네?”

현서는 기가 차서 얼굴이 조금 붉어지려 했다.


“그럼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인 거죠?”

“우리는 여기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면 되는 상황이지. 너 양식 좋아하잖아.”

“우, 우리요? 우리 둘이 무슨 밥을 먹어요!”

“이현서랑 단둘이 대화 한 번을 하기가 어려우니까, 내가 별짓을 다 하게 되네.”

“그래요, 정말 별짓을 다 하시네요.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뭐하자는 거예요, 지금.”

화를 내는데도 채도하는 살포시 웃었다. 하지만 뻔뻔하게 웃는 낯짝에다 대고 현서는 찬물을 끼얹었다.


“난 갈래요.”

그러나 가방을 들고 일어나려는 그녀를 도하가 부드럽게 붙잡았다.


“이미 주문 들어갔잖아.”

“그럼 밥값은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됐죠?”

“네가 그냥 가면 나는 오늘 굶게 될 거야.”

굶을 거라는 협박이라니. 정말 치사했다.

현서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도하를 노려보았다.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주변 시선도 있었기에 그녀는 우선 다시 앉았다.

얼떨결에 털썩 앉았지만 현서는 고개를 휙 돌려 딴 데만 보았다.

그녀는 그렇게 입을 닫고 있었고 도하는 그런 그녀를 잠잠히 바라보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옛 부부에겐 한동안 고요가 흘렀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는지 도하는 미처 다 알 수 없었다. 혼자 두고 가면 굶는다니까 착한 여자라 그냥 시간을 적선하듯 앉아준 것일지도.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면 욕심이겠지.

다른 사람들을 보고는 예전 그대로 생글생글 잘만 웃는데, 도하에게만 시종일관 냉랭한 표정이었다.


“일은, 할 만해? 짧은 시간 안에 그 자리에 앉은 걸 보니 네 능력도 비범한 모양이야.”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요.”

“운만으로 그럴 수는 없지. 혹시……. GLP 오너가와는 각별한 사이인 거야?”

“공적인 질문을 넘어선 것 같네요. 개인적인 질문은 받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채 전무님.”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인터뷰 같았다. 도하는 묻고 현서는 답하고.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 도하뿐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헐적으로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싸늘한 분위기는 남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는지 점원이 살짝 눈치를 보며 음식이 든 접시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먹어 봐, 현서야.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도하가 권했지만 현서의 눈동자는 그에게도 음식에도 초점을 두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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