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그때 우리는
(32/92)
32. 그때 우리는
(32/92)
#32. 그때 우리는
2022.07.21.
현서는 처음 보았던 도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도하의 옆집에 이사 온 다음 날, 현서는 엄마 혜수와 함께 이사 떡을 돌렸다.
혜수가 옆집 문을 두드리자 나온 건 깨끗한 흰 티를 입은 소년이었다.
저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오자 현서는 괜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솔직히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라기도 했고.
그녀의 엄마 혜수가 먼저 상냥하게 그에게 물었다.
“안녕? 어른 계시니?”
“아니요.”
“안 계시구나. 우린 어제 옆집에 이사 와서 인사하러 다니는 중이야. 이 떡 좀 먹어 봐.”
“감사합니다.”
표정은 없지만 예의 바른 소년이었다.
“바로 옆집이니까, 우리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네. 넌 이름이 뭐니?”
“한도하요.”
“그래, 도하구나. 중학생?”
“초등학교 6학년이요.”
키도 큰 데다 어린 애치곤 시크하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 의젓하기까지 해서 중학생인가 했는데, 생각보다 어린아이였다.
“어머, 키가 크구나. 그럼 길 건너 학교 다니겠네?”
“네.”
“잘 됐다, 현서야. 아침에 이 오빠랑 같이 학교 가면 되겠네.”
그 말에 소년은 눈을 흘끗 내려 현서를 보았다.
열 살배기 현서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끄러운 감정이란 걸 느꼈던 것 같다.
“안녕, 오빠.”
좀 어색하긴 했지만 한 손을 들고 수줍은 미소를 보내며 첫말을 꺼냈다.
“난 이현서야.”
그러나 물끄러미 현서를 내려다보고 있던 도하는 대답도 없이 다시 눈을 휙 돌려버렸다.
혜수가 그 모습에 잠시 웃더니 덧붙여 말했다.
“얘가 월요일부터 새 학교에 갈 거거든. 전학 와서 아무래도 좀 낯설 테니까 첫날에 도하가 같이 가 줄 수 있어?”
“네.”
현서는 또 눈이 동그래졌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제 인사도 안 받은 것치곤 순순한 대답이어서 좀 놀라웠다.
“고마워, 오빠.”
해사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현서를 또 그가 흘끗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럼 월요일에 보자, 도하야. 자, 떡 한 상자 더 먹어. 한창 쑥쑥 자랄 때니까 잘 먹어야지.”
“감사합니다.”
“바로 옆집이니까 자주 놀러 와.”
“네.”
시큰둥한 표정에 비해 대답은 잘했다. 물론 혜수의 말에만.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현서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어머, 현서야! 옆집 오빠가 왔네!”
“어? 정말?”
“엄마가 너 데리고 옆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먼저 왔네.”
현서는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옆집 오빠 도하가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먼저 데리러 와주니 너무 기뻤다.
나가서 문 앞에 서 있는 도하와 마주치자 또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오빠, 안녕?”
현서가 나온 걸 본 도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도하야! 잘 부탁해!”
혜수가 창문으로 내다보며 외쳤다.
“네.”
그러자 도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대꾸했다.
“엄마, 안녕!”
“응, 잘 다녀와, 현서야! 친구 많이 사귀고!”
“응!”
이내 둘은 등굣길에 나섰다.
혼자만 웃고 있던 현서는 종종걸음으로 도하의 긴 보폭의 걸음을 쫓아갔다.
“오빠, 내 이름 뭔지 알아?”
“이현서라며.”
“응, 맞아. 기억하고 있었네?”
“이틀 전에 들었는데 기억 못 하는 게 바보 아닌가.”
옆집 오빠 도하는 무뚝뚝하지만 묘하게 친절한 오빠였다. 함께 학교에 가기로 한 것도 기억해서 데리러 와주고, 이름도 기억하고.
가는 내내 도하는 하나도 웃지 않았지만 현서 혼자서만 연신 히죽히죽 웃으며 재잘거렸다.
그래도 처음 만난 날과는 달리 도하도 현서의 말에 어느 정도 반응은 해주었다.
학교에 도착한 뒤에는 수업 시작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도하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주었다. 도서관이 어디인지, 보건실이 어디인지 등.
실은 지난주에 엄마랑 한번 와 봐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현서는 모른 척 도하를 따라다녔다.
그로부터 얼마 후 혜수 모녀는 도하의 엄마 한영숙과도 마주치게 되었다.
영숙은 처음 혜수를 본 날부터 언니라고 부르며 친한 척을 했다.
그리고 혜수가 영숙과 친분이 생긴 후 자연스레 현서는 도하에게서 자신과 공통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현서와 도하는 둘 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아래서 자라고 있다는 점이 같았다.
현서는 1년쯤 전에 아버지를 병으로 잃었고, 도하는 엄마 영숙이 싱글맘이라고 했다.
현서는 그때 영숙을 통해 처음 싱글맘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었는데,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서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왜 도하 오빠의 성이 그의 엄마와 같은 한 씨였는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공통점이 같은 아이들치곤 그 생활은 딴판이었다.
혜수는 현서가 학교에 간 사이 몇 시간 정도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 현서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에 반해 영숙은 종종 집을 비웠다.
경제활동을 한다며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다고 대충 듣긴 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친부에게 양육비를 받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없이 산다고도 했다. 자주 쇼핑을 하고 치장을 하는 영숙을 보면 돈을 잘 쓰는 것 같긴 했다.
별로 돈이 아쉬워 보이는 것도 아닌데도 왜 그렇게 집을 자주 비우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가끔 남자를 집에 데려오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는데 현서의 기억으론 그 남자가 한 명이 아니고 꽤 자주 바뀌었던 것 같았다.
도하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걸 알게 된 혜수는 음식을 할 때마다 좀 더 넉넉히 만들어 영숙의 집에 가져다주었다.
그래도 외로울 도하가 마음에 걸려 종종 도하를 집으로 불러서 밥을 먹이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빠, 나 이거 잘 모르겠어. 알려줘.”
그래서 현서는 숙제를 할 때도 엄마가 아닌 도하에게 은근히 묻곤 했는데 그럴 때면 도하는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선생님보다도 더 상세하게 알려주곤 했다.
그 모습이 좋아서 때때로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묻기도 했었다. 말수가 적은 도하가 그럴 때는 말을 많이 해주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한번은 도하가 혜수에게 알 수 없는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무슨 일인가 의아했던 혜수가 물었다.
“뭐가 죄송해?”
“그냥……. 자주 와서요.”
혜수는 아이답지 않게 그런 일로 고민하는 도하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자주 와 미안해하는 와중에도 또 초대는 거절하지 않는 아이가 안쓰러워 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아휴, 참. 난 또 뭐라고. 그게 뭐가 죄송해. 내가 오라고 한 건데, 뭘.”
염치도 알 만큼 의젓한 아이가 오죽 외로웠으면 초대에 빠짐없이 응할까 싶었다.
“도하가 오면 우리 현서 공부도 가르쳐주고, 현서 외롭지 않게 놀아도 주고. 그러니까 내가 오히려 고맙지.”
그 이후 왠지 현서는 도하가 전보다 그녀를 조금은 더 챙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여전히 무심하긴 했으나 도하가 학교 등 집 밖에서 마주치는 다른 아이들에게 대하는 걸 보며 그나마 그녀에게 친절한 편이라는 걸 현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침마다 함께 등교하고 학교에서도 현서가 도하를 볼 때마다 반갑게 알은체를 하곤 해서 둘이 친하다는 소문은 금방 퍼졌다.
도하는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그 여자애들은 도하랑 친한 동생인 현서에게도 잘해주었고 그녀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6학년 언니들에게는 3학년이 아기로 보였는지 현서를 연적으로는 취급도 안 했던 모양이다.
“난 나중에 도하 오빠랑 결혼할 건데?”
현서가 파워 당당하게 그런 말을 했을 때도 그 언니들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깔깔 웃기만 했다.
하루는 현서가 도하 방에 있던 작은 인형이 예쁘다고 했더니 도하가 가지라고 줬는데, 알고 보니 도하와 같은 반 여자애가 그에게 준 것이었다.
그걸 모르고 학교에 들고 갔다가 그 언니가 보는 바람에 도하의 반이 덜컥 뒤집힌 적도 있었다.
도하가 중학생이 되어 학교가 달라진 후에는 비록 전처럼 매일 얼굴을 보기는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현서의 집에 발길을 끊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의 씨 다른 동생이라는 주혁도 영숙의 집으로 와서 살게 되어 현서의 집에 형제가 종종 함께 놀러 오곤 했다.
형과는 달리 수다스럽고 눈치 없는 주혁이 현서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엄마 혜수는 그에게도 친절했다.
주혁이 무례하게 굴 때면 도하가 워낙 매섭게 혼냈기 때문에 그럭저럭 제어가 되기는 했다.
그래도 현서는 도하가 혼자만 놀러 오는 날이 훨씬 더 좋았다. 둘이서 오더라도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핑계로 도하만 제 방에 불러들이곤 했다.
도하는 혜수에게 이모라고 부르며 그녀를 오래도록 잘 따랐다. 그리도 현서도 도하를 한결같이 좋아했다.
좋아한다고 하도 노래를 불러대니 도하도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도하가 고등학생이 되고 현서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둘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현서 혼자 도하를 쫓아다니긴 했지만, 대놓고 좋아한다며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은 더 많이 도하를 좋아하게 되어서 그런 거였다. 몸과 정신이 자란 만큼 더 조심스럽게 마음을 키워가느라 그런 것뿐이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현서는 혼자서 절절했다.
혼자서 그의 눈빛 하나에,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서 별의별 망상을 하며 사춘기 소녀답게 그렇게 짝사랑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모보다도 더 친했던 혜수였지만 그래도 그 앞에서조차 속내를 표현하는 적이 좀처럼 없던 도하가 그날은 웬일로 놀랄 만큼 솔직한 말을 했다.
“……나도 이모네 가족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날 그의 친모 영숙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워낙 사고를 자주 치던 엄마였으니.
어른만큼 키도 체격도 커졌으나 아직 고등학생인데 삶이 버거워 보였다.
철은 너무 일찍 들었는데 그에 비해 감정에는 서툴러 보여서 혜수는 걱정을 많이 했었다.
어른 같기도 하고 아이 같기도 한 소년의 눈빛은 점점 더 공허해지는 것만 같았다.
“우리 가족 하면 되지, 도하도.”
그 순간 혜수는 진심을 담아 대꾸해주었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도하에게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우리 현서랑 결혼하면 너도 우리집 사람 되는 거야.”
“엄마!”
화들짝 놀란 현서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혜수는 소리 내어 웃으며 한술 더 떠선 물었다.
“말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보자. 도하야. 우리 현서 어떠니?”
도하는 혜수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담담한 눈으로 현서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