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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 (29/92)


#29.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
2022.07.11.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언급에 현서는 피하듯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응.”

“참 잘생겼지?”

“어?”

현서는 괜히 당혹스러워 곁눈질로 루카스를 보았다가 다시 창밖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뭐, 글쎄……. 내 스타일은 아니야…….”

“그래? 난 같은 남자가 봐도 참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구나…….”

“근데 그 사람, 그날은 좀 이상하지 않았어?”

“언제?”

“그날. 현서도 같이 현장 미팅한 날. 좀 이상했어.”

현서는 지레 불편했다. 혹시 자신과의 어색한 조우에서 이상함을 발견한 건 아닌지.

역시 이상했을까.


“뭐가?”

그러나 현서는 별것도 없는 창밖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내 생각엔……. 그 사람, 현서한테 반한 거 같아.”

루카스의 걸러지지 않은 화법에 현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우스갯소리처럼 치부하고 억지로 웃어넘기려는데, 루카스는 평소답지 않게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라면…… 왜 그렇게 현서만 쳐다봤을까?”

현서의 얼굴에선 어색해진 미소마저 사라져갔다.

남들이 알 만할 정도였나.

수상하게 보일 줄 알았다. 왜 그렇게까지 대놓고 그랬던 거야, 대체.


“아닐 거야, 루카스.”

“아니야. 현서는 예쁘단 말이야. 남자라면 충분히 반할 수 있지.”

“……하하. 칭찬 고마워.”

현서가 농담으로 돌려보려 해도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대기만 했다.


“그냥 같은 수컷으로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오버하지 마.”

현서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말했다.


“아니. 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현서. 왠지 위험 신호가 느껴져.”

“…….”

별것도 아닌 걸로 분위기를 잡는 루카스의 얼굴을 보던 현서는 그에게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내뱉었다.


“그래 봤자지. 이제 볼 일도 없는걸.”

그러나 루카스는 연신 씁쓸한 표정이었다.


“볼 일이야 만들면 되겠지. 그 사람이 일부러 보자고 하면 현서는 볼 거야?”

루카스의 질문에 현서는 순간 벙해졌지만 이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내가 왜…….”

 

 

***



“그런데 매화 센터에는 음식점이 따로 있다면서요?”

오늘은 영숙이 혜미와 함께 송화궁에 방문한 날이다.


“응, 지화자가 그러는데 거기는 예약제로 운영되어서 미리 예약해야 한대.”

“송화궁 내 일반 음식점도 훌륭한데, 거긴 얼마나 좋으려나. 가보고 싶네요.”

지난번에 혜미가 강 여사에게 혼자라도 쫓겨나기 싫어서 구차하게 매달린 일로 영숙은 잠시 삐쳤었다.

그러나 혜미가 자신이라도 남아서 강 여사와 친해져야 어머님과 화해하시도록 중재도 할 수 있으니 그랬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왠지 밉상이었지만, 이제 하나 남은 며느리에 주혁의 처였으니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채 회장도 큰아들도 상대를 안 해주니 씁쓸하지만 주혁 부부만이 유일한 식구라고 할 수 있었다.

영숙은 처음에는 송화궁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이제는 매화 센터처럼 최고급의 대우를 받고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오기로라도 매화 회원은 꼭 되어야겠어.”

“근데 무슨 수로요?”

영숙은 입꼬리를 픽 올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무슨 수든 써봐야지.”

“그럼 이번에도 어머니만 믿으면 되나요?”

혜미는 영숙의 꿍꿍이는 알 수 없었으니 덩달아 김칫국을 마셨다.


“김 실장 좀 만나고 가자.”

“무슨 일로요?”

“보면 알아.”

 

.
.
.

김 실장이 로비로 다가오자 영숙은 오늘따라 유난히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김 실장! 반가워.”

“안녕하세요, 한 여사님. 근데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정중하고도 사무적인 특유의 어조로 김 실장이 말했다. 영숙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거 좀 루나 리 원장님에게 전해줘.”

“이게 뭘까요?”

김 실장이 차분한 손길로 받으며 물었다.


“에이, 그거까지 알려주긴 부끄럽고. 이 원장님께 별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시라고 해. 약소하지만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도 전해드리고.”

영숙은 헤실거리며 덧붙였다.


“내가 언젠가는 꼭 매화 회원 되고 싶어 한다고도 전해주고.”

매 회원은 그냥 승급이 아니라고 했다. 란, 국, 죽을 거쳐 왔다고 다 올라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

영숙은 망설이는 김 실장에게 상자를 안겨주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으로 나가자 혜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시모에게 슬쩍 물었다.


“저게 뭔데요, 어머니?”

“원장한테 선물 공세라도 해보는 거야. 그래도 샤넬 신상 백인데 효과가 있겠지. 난 아직까지 백 싫어하는 여자는 못 봤거든.”

“와, 정말요? 어머니, 그렇게까지 투자하셔야 하는 거예요?”

“이제 매 센터 입성은 내 자존심 문제야. 돈이 문제가 아니야. 강옥희 그 여편네 아니면 내가 못 들어갈 줄 알고?”

영숙은 이를 악물곤 작게 투덜거렸다.

***

현서는 종일 정신없이 일만 했다.

그간 못했던 일을 몰아서 일부러 더 바쁘게 일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기분만은 마치 종일 아무것도 못한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의 우연한 만남이 혼을 빼놓긴 했나 보다.

똑똑-

갑자기 들리는 노크 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네.”

김 실장이 웬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원장님, 이거…….”

김 실장에게 책상 위로 내려놓은 상자를 보며 현서의 두 눈이 의아함으로 빛났다.


“한영숙 님께서 전해주시라고 하셨어요.”

“한영숙 님이요?”

“네.”

현서는 한영숙이 방금 송화궁에 다녀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회원들의 출입을 담당하는 직원에게 한영숙의 출입이 찍힐 때마다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마다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 동선이 겹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아직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한영숙 회원님께서 부담 없이 쓰시라던데요. 잘 부탁드린다면서.”

현서는 김 실장을 내보내기도 전에 고민 없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유명 브랜드 로고가 그려져 있는 쇼핑백이 들어 있었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쇼핑백을 들여다본 현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샤넬?”

곱게 빛나는 자태의 가방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살다 보니 한영숙에게 가방을 다 받아 본다.

시집 생활 할 적엔 생일이고 뭐고 국물도 없더니만.

언제나 무엇이든 아랫동서 혜미만 사주던 시모였다. 시모 본인의 돈으로든, 채 회장의 돈으로든, 큰아들 도하의 돈으로든.

쇼핑백 안에는 손글씨로 정성껏 적은 카드도 있었다.

[루나 리 원장님.

송화궁 잘 애용하고 있어요.

약소하지만 제 정성이랍니다.

기회 되면 꼭 한번 뵙고 싶네요.

이렇게 만족스러운 서비스 제공해주시는 원장님께 좋은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어요.

꼭 만나주실 거죠?

-한영숙 드림.-]

간질거리는 편지글을 다 읽고 난 현서는 카드를 봉투에 도로 넣어 가방과 함께 쇼핑백에 다시 넣었다.


“도로 보내세요.”

“예?”

“안 받는다고 전해주세요.”

“아아……. 네, 원장님.”

김 실장은 너무도 단호한 현서의 태도에 오히려 민망해졌다.


“그냥 그렇게만 전해드려요?”

“네, 딱 그 한마디면 돼요.”

죄송하다든지, 마음만 받겠다든지, 방침상 받을 수 없다든지. 아무런 둘러대는 말도 없이 다시는 보내지 말라고 하라니.

평소 고객 하나하나에게 동일하게 친절한 현서의 지시치곤 의외였다.


“괜찮으시겠어요, 원장님? 한영숙 그 아줌마, 성격이 보통이 아닌 거 같던데.”

“알아요.”

“아, 아셔요? 아시는 분이세요?”

“조금요.”

그러나 빙긋 웃는 현서의 미소가 조소에 가깝다는 걸 김 실장이 알아챌 리는 없었다.


“그러시군요. 네, 아무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김 실장이 다시 상자를 가지고 나갔고, 문이 닫히자 현서는 쓴 미소마저 지웠다.

다시 생각해도 이 상황이 어이없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기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휴대폰 번호가 떠 있었다.

얼핏 누굴까 생각했지만 번호를 정확히 읽고 난 뒤엔 대번에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현서는 이내 난감한 얼굴이 되어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망설이다가 통화 패드를 터치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

그러자 상대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나야.

“……알아요.”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채도하였다.


-그래. 난 번호를 바꾼 적이 없으니까…….

전화기 화면에서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인 번호였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당연히 현서는 새로운 번호를 쓰고 있었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연구소장이 알고 있던데, 네 연락처…….

현서는 납득하듯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다.

연구소장과 명함 주고받았었지. 거기다 물어봤겠구나.


“근데…… 어쩐 일이에요?”

담박하게 물었지만 대답은 금방 들려오질 않았다.

망설이는 듯한 약간의 공백 후에 도하가 말했다.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

“…….”

어쩌면 오늘 내내 이 순간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종일 일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왠지 그랬다.


“무슨 일로요?”

그저 퉁명스레 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지난번에는 보는 눈들이 많아서 제대로 대화를 못 했잖아. 둘이서 만나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

진지한 그의 목소리가 기대감에 차 있기라도 한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더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러든지 말든지.


“둘이서 만나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

“우리한텐 더이상 필요한 이야기가 없어요.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내가 들을 필요가 있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을 거란 뜻이에요.”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냉랭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이미 할 얘기가 다 끝난 사이니까요.”

-…….

채도하는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그런데 나는…… 아직 아무 얘기도 끝내지 못한 것 같아.

“…….”

그리고 그 말 앞에서는 현서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난… 내가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이 쌓여 있는 기분이야.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현서는 그의 말이 참을 수 없이 당혹스러웠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대체 이 남자는 이제 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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