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이현서는 대체 불가지 (28/92)


#28. 이현서는 대체 불가지
2022.07.07.



 


“왜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어서 현서는 그저 순수하게 물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혹여 채도하가 그녀를 찾았을까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뭐 얼마나 찾았겠나 싶어 괜한 생각은 그만두려 애썼다. 헤어진 마당에 그런 걸 궁금해하는 것도 미련인 것만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물론 남편이 몇 번 정도는 전화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기르던 강아지와 헤어져도 허전한 게 사람 마음이니, 한 침대를 쓰던 아내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었을 거라고.

처음에는 아쉽고 생각나고 그러긴 했을 거라고.

그런데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다고?


“날 찾았다고요? 어째서요?”

어슴푸레 져가는 저녁 빛 아래 드러난 도하의 얼굴은 마치 그의 말이 진심인 듯 보이게 했다.

어떤 거짓말보다 더 거짓말 같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믿어지게 했다.

전남편의 표정을 보고도 믿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묻는 현서에게 도하가 침묵 끝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고 싶었으니까.”

고통스러운 토로였다. 결코 쉽지 않은.

하지만 도하는 살면서 이보다 더 솔직했던 순간이 없었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현서를 보며 도하는 다시 한번 되뇌었다.


“보고 싶었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를 거야.”

그녀의 부재 속에서 저 혼자서 참 많이도 했던 말이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고.

살면서 이보다 더 벅찼던 순간도 없었다. 그는 토로를 이어갔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까, 아주 기뻐. 반갑고.”

찾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도, 그녀를 기다리는 일도 다 인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과연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긴 한 건지, 그 여부조차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기다리면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확신만 있었더라면 그 고통이 조금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영영 만나지 못할 가능성. 기약 없는 짓거리.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미지수의 시간 속에서 그는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간 지나온 고통의 시간을 모두 보상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이 얼마나 기쁜지 아느냐고, 제 마음을 들려주고 싶었다.


“이해가 안 가네요.”

그러나 현서는 적잖이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부 진심이야.”

발이 땅에 박힌 듯 서 있던 현서는 얼떨떨했다. 그의 말 따위는 전부 부정해주고 싶었다.


“왜요? 나를 대체할 사람 찾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도하는 찾아본 적도 없는 대체 대상을 운운하는 현서에게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현서는 대체 불가지.”

그 말에 주춤하던 현서는 무엇에 납득한 건지 혼자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 하긴……. 그 집에서 나만큼 그 식구들 상대할 수 있는 맏며느릿감도 구하긴 어려웠을 거 같긴 하네요.”

도하는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만 해요.”

현서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웠다. 전남편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도. 전남편의 이런 말들도.


“왜 여기서 우리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의 말을 더 들었다가는 어지러운 감정에 체할 것 같았다.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두 사람이나 자리를 비우면 이상해 보일 거예요.”

현서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걸음을 뗐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으며 그를 지나쳐 가는 순간에는 잔디 풀이 바스락 밟히는 소리만이 두 사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를 뒤로하고 현서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가만히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에게 대고 현서는 형식적인 인사치레 한마디를 건넸다.


“아무튼…….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일부러 진성가 이야기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경제지에서 우연찮게 눈에 띄게 된 헤드라인을 보면 그런대로 사업도 흥하고 있고, 그와 그의 식구들은 잘 지내는 듯했다.

솔직히 가끔은 걱정을 할 때도 있었지만 역시나 부자들 걱정은 기우였지 싶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좋아 보인다고……. 내가?”

발을 잡아채는 한마디에 현서는 다시 뒤를 보았다. 묘하게 허망해 보이는 눈빛이 그녀를 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현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피하듯 돌아섰다.


“빨리 들어와요. 손님들 기다려요. 세상 무엇보다 일이 중요하던 사람 아니었나요?”

그녀는 퉁명스레 내뱉으며 그 눈빛을 모른 척 앞으로만 나아갔다.

***



“엄마!”

10시가 다 되어가서야 집 안으로 들어가자 도현의 방문이 열리며 도현이 쪼르르 달려 나왔다.


“도현아! 아직도 안 자고 뭐 하고 있었어?”

“엄마 기다렸져!”

현서는 품에 폭 안겨 오는 도현을 꼭 끌어안았다. 따라 나온 시터가 민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휴, 오늘따라 잠을 안 자네. 아무리 재우려고 해도 엄마 기다린다고 졸릴 눈을 비벼가며 자꾸 안 자는 거야.”

“고생하셨어요, 이모님. 늦게까지……. 어서 들어가 보세요.”

“응. 우리 도현이 이제 엄마 오셨으니까 코 잘 자?”

“네!”

근처에 사는 시터가 돌아가고 나자 현서는 아이와 함께 방에 가서 침대에 누웠다.

아이를 재우려 자장가를 불러주는데도 도현은 졸음이 다 달아나버린 건지 눈을 감지 않았다.


“도현이, 안 졸려?”

“응.”

동그랗게 뜨고 있는 말똥말똥한 눈을 보며 현서는 빙긋 미소지었다.


“사랑해, 도현아.”

“엄마, 사앙해.”

부정확한 발음으로 들려주는 아이의 표현은 들을 때마다 뭉클해서 감동에 빠지게 한다.

오늘따라 그 감동이 슬픈 느낌으로 밀려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두와 헤어지던 순간까지도 시선을 떼지 않던 그 사람의 눈빛이 쓸쓸해 보여서는 아닐 거라고, 현서는 그 느낌을 부정하려 했다.

도현은 엄마의 가라앉은 표정이 신경 쓰이는지 눈썹을 슬쩍 올렸다.

현서는 도현의 올라간 눈썹을 가만히 보다가 손가락으로 그 눈썹을 어루만졌다.

도현이 아기 때부터 짓던 이런 표정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아빠와 같은 버릇이기 때문이다.

아빠도 할아버지도 곧잘 하는, 삼대를 이어 유전된 버릇이었다.

그들과 같은 버릇이 있는 이 아이를 그들 중 아무도 모르게 꽁꽁 숨겨왔다.

말을 떼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부터 도현은 해맑게 묻곤 했다.


‘엄마. 도현이는 아빠 어디 있어?’

그래서 자꾸 아빠라고 부르라는 루카스의 말을 좋아하고 그 말을 잘 듣는 건지도 모른다.

오늘은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한국에 들어오면서 했던 각오를 다시금 떠올렸다.

사연 많은 내 나라에 돌아왔지만, 더는 울며 살지 않겠다는 각오를.

어느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현서는 속삭였다.


“도현아. 엄마가 많이 많이 사랑해줄게.”

지금까지 우리 잘 지내왔잖아.


“엄마가 아빠 몫까지 더 많이 사랑해줄게.”

 

 

***

영숙은 매 라운지에서 망신당했던 일의 충격으로 그 다음 날 혜미와 예약했던 마사지도 취소하고 며칠씩이나 앓아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일어나 모처럼 외출을 했다.


“생각할수록 쪽팔려서 정말…….”

그래서 생각할수록 강 여사가 아쉬웠다.


“친하게 지내서 매화 센터로 가려고 했는데, 아쉽네.”

그래도 영숙은 일주일 만에 송화궁에 발을 들였다. 오늘은 지화자 여사와 함께였다.


“자기랑 오니까 너무 좋다. 덕분에 서비스를 더 알차게 활용했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왔으니까 자기보다 더 많이 알지.”

망신 좀 당했다고 송화궁에 발길을 끊기엔 죽 센터의 서비스만 한 곳도 다른 곳엔 없었다.


“오늘은 운동 관리사가 등척성 운동인지 뭔지를 가르쳐 주는데 아주 쉽더라고.”

“운동 관리사가 아니고 여기선 건강 관리사야.”

“뭐, 그게 그거지. 아무튼 배고프다.”

“아, 여기 음식점 정말 맛있어. 먹고 가자.”

“그래. 실은 첫날에 거기 가서 먹어보려고 했는데 일이 있어서 못 갔네.”

그날 원래 계획으론 강 여사와의 우아한 티타임을 가진 후 기분 좋게 유유자적 저녁을 먹으러 가려 했는데 완전 망쳐버렸다.

떠올리니 또 소름이 돋아서 영숙은 고개를 바르르 떨었다.


“어쨌든 가자, 내가 살게.”

영숙은 씁쓸한 기분을 털어내려 지화자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
.
.



“그만 좀 쳐다보고 주문해야지. 뭐 먹을 거야?”

자리에 앉은 영숙이 깐깐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지화자가 물었다.

그제야 메뉴판으로 돌아온 영숙의 눈이 반짝 뜨였다.


“오, 이 임자수탕 먹어보자. 큰며느리가 집 나간 후로 제대로 된 걸 먹어보지 못했어. 여긴 얼마나 잘하나 먹어봐야겠네.”

“아, 이거 맛있어. 내가 호텔서도 먹어봤는데 여기가 더 맛있더라고.”

잠시 뒤 모양도 깔끔하니 고운 임자수탕이 올려졌다. 뽀얗고 하얀 국물을 한술 떠서 맛을 본 영숙은 대번에 감탄했다.


“정말 맛있네! 이런 임자수탕 맛은 정말 몇 년 만인지 몰라.”

“그치?”

그런데 먹으면 먹을수록 영숙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왜 그래?”

“내가 먹을수록 느끼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서가 해준 거랑 맛이 똑같아.”

“에이. 자기 큰며느리가 아무리 음식을 잘해도 여기 맛이랑 같을까?”

“그 애가 워낙 손맛이 좋아.”

그리고 현서의 임자수탕은 친정엄마 혜수에게 전수받은 레시피라고 했었다.

영숙은 메뉴판을 펼쳐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원장 추천 임자수탕’

“원장 추천이라네……. 왜 이렇게 비슷하지?”

“그래도 맛이 비슷할 수가 없지.”

“그치? 그러니까 더 이상하단 거야.”

그런데 의구심을 잔뜩 품은 표정으로 갸웃거리던 영숙은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을 빛냈다.


“어! 혹시!”

“왜왜, 혹시 뭐?”

“우리 큰며느리가 여기 주방에 취직한 건 아닐까?”

그 말에 지 여사가 김이 샌 듯 헛웃음을 쳤다.


“여보세요, 한 여사님. 그럴 리가 있겠어? 여기가 아무나 들어오는 데야?”

“그, 그렇지? 현서 제까짓 게 무슨 재주로 이런 데 취직할 수 있겠어.”

영숙은 이내 실실 웃더니 남은 육수를 대접째로 쭉 들이켰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무튼, 오랜만에 입에 맞는 음식을 먹었더니 기분이 너무 좋다.”

 

***

송화궁 제품에 꼭 맞는 용기 디자인을 위해 루카스가 직접 발품을 파는 날이었다.

송화궁 제품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장본인이자 가장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현서와 함께였다.

기존 디자인도 좋지만 좀 더 발전의 여지가 있는지 두루 살펴보고 있었다.

여러 브랜드의 샵을 돌아보다 점심 시간이 다 되어 식사를 하기 위해 차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런데…….”

운전 중이던 루카스가 불쑥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채도하 전무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