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인연의 고리
(21/92)
21. 인연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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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인연의 고리
2022.06.13.
현서가 목격자와 주변 블랙박스를 찾아주려 애써준 덕분에 뺑소니범도 잡을 수 있었다.
퇴원하는 날이 되어서야 현서가 홑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레이스는 어찌나 미안해했는지 모른다.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해진 그녀의 수족이 되어주던 여자가 임산부였다 하니 많이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생각나서 남 일 같지 않았어요.”
그때야 자기의 사정을 털어놓는 현서를 보며 그레이스는 받은 도움에 대한 금전적 보답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현서는 거절했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다른 여러 말 대신 명함을 한 장 건네주며 함께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레이스가 글로벌한 사업가였던 걸 알고 난 뒤에도 현서는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당시 머물던 대만으로 돌아간 뒤에도 잘 도착하셨냐고 다쳤던 곳은 괜찮으시냐고 안부만 물었을 뿐이었다.
-루나는 내 삶의 행운이야.
“박 회장님이야말로 제 행운이시죠.”
그레이스는 뱃속 아이에게 좋은 할머니가 필요할 때나 함께 일을 하고 싶어질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해주었다.
현서는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과 아기의 삶에 전환점이 있다면 그건 그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현서는 대학 시절부터 이미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그레이스와 함께 일하기를 결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고 결국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렇게 대만 본점에서 사원으로 입사하여 능력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부매니저가 되었고, 또 이렇게 한국 분점의 원장을 맡기에 이르렀다.
-우리 도현이 보고 싶다. 할머니 안 찾아?
“많이 찾죠. 바쁘시다고 설명해줘도 자꾸 찾아요.”
-아이구, 우리 강아지 보러 뉴욕 스케줄 조정해서라도 한국 들러야겠네.
그레이스와 통화하는 내내 원장실에선 자잘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핸드폰 벨소리가 아니다. 영숙의 입에서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오늘 가서 확실하게 나를 인식시켜 놓고 오는 거야. 내가 그래도 진성그룹 회장 사모인데, 설마 가입을 안 시켜 주겠어. 몰라서 그러는 거지.’
오늘은 드디어 지 여사가 경복궁인지 송화궁인지 이름도 고고한 그곳으로 데리고 가는 날이다.
‘그 원장이라는 사람을 공략해야 할 텐데 만나기도 어렵다지? 꼭 만나서 가입시켜 달라고 사바사바라도 좀 해봐야지.’
영숙은 일찍부터 부지런히도 준비를 마치고 지 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원장이고 원장 할아버지고 간에 이 한영숙이의 아부에 안 넘어가기는 어렵다 이거야!”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 건지.
“이놈의 여편네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시간을 확인하던 영숙은 성 마르게 지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야?”
“이제 다 왔어! 왜 이렇게 독촉이야. 거긴 예약시간 맞춰서 가야지, 일찍 간다고 일찍 들어가지도 못해.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도대체 전화를 5분 간격으로 하면 어떻게 해.”
영숙이 성질을 꾹 누르고 상냥하게 건 전화에 지 여사의 신경질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에이, 치사해서 오늘만 내가 꾹 참는다, 참아. 나중에 보자.’
“어, 그래. 미안!”
영숙은 지금은 자기가 참아야 한다는 것이 짜증이 났지만 지 여사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뭐, 그래도 오늘은 송화궁에 가게 되었으니까!’
“나 다 왔으니까 어서 나와, 한 여사.”
드디어 영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기사를 대동하고 온 지 여사는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서 타.”
차에 타자마자 영숙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재촉을 했다.
“얼른 가보자, 얼른.”
“아휴, 좌우지간 성질이 급해서는. 이러니까 며느리가 못 견디고 나가지.”
지 여사의 소리에 영숙이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무, 무슨!”
영숙은 열이 받아 큰소리를 지르려다가 침을 꿀꺽 삼키듯 말을 삼켰다.
“한 여사. 말했지만 원래 내가 우리 며느리 생일 선물로 주려고 아껴둔 초대 쿠폰을 자기한테 쓰는 거니까 나중에 알아서 잘해.”
송화궁 회원들에겐 지인 초대 쿠폰이 주어지는데 죽 센터 회원들에게는 연간 한 장이 주어진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알아서 모실게. 걱정하지 마.”
생색은 있는 대로 내는 지 여사의 비위를 맞추며 영숙은 살살 웃었다.
“거기 가서 처신 잘해. 내 망신시키지 말고.”
지 여사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영숙에게 당부를 했다.
“내가 무슨. 나만큼만 조신하고 정숙하라고 그래.”
“뭐? 나, 참.”
영숙의 어이없는 대답에 지 여사는 코웃음을 쳤다.
두 여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 송화궁에 도착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영숙의 입은 떡 벌어졌다.
“와아, 완전 무슨 왕이 사는 궁궐 같네! 왜 이렇게 넓어.”
영숙은 두리번 두리번 구경을 하면서 감탄을 해 댔다.
“좀 조용히 해. 창피해 죽겠네. 여기가 무슨 관광지인 줄 알아? 입 좀 다물어.”
그러나 안내인의 안내를 따라 들어가는 동안에도 영숙의 입은 쉬지를 않았다.
“여기는 진짜 차원이 다르네!”
“에휴, 참.”
***
송화궁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집무실은 유독 조용했다.
커다란 책상 위로는 긴 다리가 올라와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소매를 걷어 올린 팔로 얼굴을 가린 루카스가 의자에 길게 기대어 누워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루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안이 조용하자 사무실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현서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 대표님, 계셨네요? 노크해도 조용해서…….”
“어, 현서. 노크 소리도 못 들었네.”
루카스는 사무실로 들어오는 현서를 보고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일어났다.
“어서 들어와, 앉아. 어쩐 일이야.”
“다음 분기엔 매 센터만 제외하고 란, 국, 죽 회원 수를 조금 더 늘릴까 해서 그 의논 좀 하려고. 물리치료사랑 운동치료사 인원 보충도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이야기도 좀 하고.”
“어어, 그래. 커피 내려줄게. 마시면서 하자.”
“좋지요. 루카스의 커피는 늘 옳으니까.”
현서가 환한 얼굴로 반색을 표하자 루카스는 싱긋 웃어주었다. 그는 이내 창가에 둔 기구들을 사용하여 손수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려주었다.
“그나저나 루카스. 도대체 무슨 심각한 고민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
“아, 어떻게 알았어?”
“루카스 고민 있을 때마다 그런 자세로 있잖아.”
“현서. 이제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데?”
루카스는 완성된 커피를 송화궁에서 다도용으로 쓰는 한국풍의 고급 다기 잔에 담아 주었다.
이질적인 듯한 조화가 나쁘지 않아 현서는 싱긋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향 좋다. 그래서 고민은 뭔데요, 유 대표님?”
“우리 송화궁 화장품 브랜드화 말이야. 어머니가 허락은 하셨다지만 영 못 미더워하시는 것 같아서. 워낙에 갈 길이 멀다는 건 나도 잘 알지만.”
풍미 가득한 커피를 삼키던 현서는 진지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루카스를 이해해. 하지만 그레이스는 지금의 상태에서 잘 운영하기를 바라고 계시던데.”
“나는 어머니랑 달라. 관련 사업을 좀 더 키우고 싶어, 현재의 GLP가 세운 것에 안주하는 것보다 그걸 바탕으로 더 키우고 싶다고.”
그 말을 하는 루카스는 열정적으로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세운 터전 위에 좀 더 크고 단단한 성을 세우고 싶어.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 나를 못 믿는 것 같아.”
“그건 아닐 거야. 루카스가 소신껏 일을 추진하면 그레이스도 밀어주실 거야.”
“그래, 나한테는 현서도 있고. 어머니가 현서를 내게 붙이신 이유도 그거지.”
현서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루카스의 고민은 곧 그녀의 고민이기도 했다.
“그럼 이건 어때? 한국에도 콜라보 할 좋은 회사들이 많이 있을 거야. 갈 길이 멀다면……. 우선 처음엔 그렇게 시작해보면 어떨까?”
“음……. 그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럼 나도 그 일 같이 진행해볼게. 그레이스에게도 내가 넌지시 좋게 설득해주고.”
현서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 하는 루카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마워. 나는 현서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
이제는 지금의 사업들만 잘 관리하여 아들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려 하는 그레이스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젊은 루카스가 그레이스가 해놓은 사업에 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서비스가 시작된 후에도 영숙의 입에서는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아아, 시원해, 거기 거기 좋다, 좋아!”
아늑한 룸에서는 계속해서 극찬이 흘러나왔다.
“어쩜 솜씨들이 이렇게 좋아. 정말 얼굴도 촉촉해진 거 같고 몸도 날아갈 것만 같네.”
몸이 거뜬해지니 기분도 좋아지고 정말 젊어진 기분이다.
“화장품에서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 이 제품 나한테 너무 잘 맞는다.”
“아까 피부테스트에서 손님 피부에 가장 근접한 제품으로 서비스해드린 겁니다.”
“아, 어쩐지 찰떡같이 맞더라. 혹시 이 제품 사 갈 수도 있을까?”
“죄송합니다. 사모님. 이 제품 구매는 어려우십니다.”
“무슨 소리야. 저기 있는 지 여사도 여기서 가져온 제품 쓴다고 하던데?”
“그건 저희 회원에 한해서 드리는 겁니다.”
영숙은 맘에 드는 물건을 어떻게든 쟁취하고 싶어서 우는 소리로 직원을 졸랐다.
“그런 거야? 그냥 나한테도 하나만 팔면 안 돼? 너무 잘 맞아서 그러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사모님. 가입하신 후에 회원이 되시면 그때 도와 드리겠습니다.”
“에구……. 섭섭해라.”
영숙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요즘엔 이것저것 처발라 봐도 마음에 쏙 드는 라인이 없었는데.
지금 발라준 화장품은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흡수가 되어서 모처럼 잘 맞는 물건을 찾은 듯했다. 못 산다고 하니까 더더욱 가지고 싶어 애가 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가 여기 꼭 가입하고 말 거야.’
영숙은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밖으로 나와 휴게실에서 지 여사를 만난 영숙은 입에 침이 튀도록 칭찬을 해대고 있었다.
“이야, 진짜 나 자기가 자랑할 땐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자랑할 만하네. 침술, 피부, 바디 관리도 너무 좋다. 힐링 제대로 하고 가네. 정말 고마워.”
“잊지 마. 내 며느리 걸 자기 준 거라는 거. 내가 지금 우리 며느리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야.”
“알았어. 생색 그만 내고. 진짜로 내가 그 집 며느리 생일 선물 대신 사줄게. 됐지?”
남의 며느리 선물이 문제가 아니다. 이번 체험은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좋다.
“나도 빨리 회원이 돼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빨리 가입을 할 수 있나?”
“다음 분기까지 기다려야지, 뭐. 죽 회원은 추첨이야.”
“다음 분기 아직 멀었는데 언제 기다리나. 경쟁률도 세다며. 그때도 추첨에 못 들면 또 어째…….”
영숙은 고민에 빠졌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근데 여기 원장은 어디 있는 거야?”
“원장은 왜. 원장 만나도 소용없어. 손님 관리하는 지배인이 따로 있어서 용건은 거기 통해서 전하면 돼.”
“그, 그래?”
“그리고 원장이 회원인 나도 바쁘다고 잘 못 만나주는데, 한 여사 같은 체험 손님을 왜 만나 줘.”
“아휴 참, 어렵네. 지난 분기에서도 추첨에서 똑 떨어졌는데 다음에도 또 떨어지면 어찌 가입해.”
영숙이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빠져 있는데 지화자가 권했다.
“후원 구경 좀 해볼래? 연못길 따라 산책이나 하자.”
“좋지. 잘해놨던데. 아까 보니 꽃도 예쁘게 피었고.”
“연리정이라고 경치 좋은 정자 있어. 거기 가서 차나 한잔하자.”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지 여사와 같이 밖으로 나온 영숙은 연못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은하게 향긋한 꽃향기가 날아와 기분 좋게 코를 간질였다. 정말 멋진 곳이었다.
“어머, 어머. 저게 누구야.”
그런데 같이 걷던 지 여사가 눈을 크게 뜨더니 갑자기 후다닥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