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아내의 꿈을 그리며 (20/92)


#20. 아내의 꿈을 그리며
2022.06.09.


조금은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송화궁은 GLP라는 글로벌 기업에서 운영하는 대만 센터의 분점으로 개점 전부터 사모님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곳이었다.

그러던 중에 삼중 그룹 큰 마나님께서 그녀가 종종 만나는 재벌가 사모들의 사교 모임에서 송화궁을 언급하셨다.

일흔이 넘은 분의 얼굴이 회춘한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는 송화궁에서 관리를 받는다는 말을 던지시니 금세 사모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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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낸 소문이 뭐라고. 난 사실을 말한 거고 내 얼굴이 증거잖아. 그 여편네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내 말만 믿고 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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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감사드려요.”

강옥희 여사는 공적인 관계를 떠나 사적으로도 현서를 예뻐했다.

그레이스 박의 소개로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밟혔다. 참하고 성실한 현서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지내는 모습이 안 되어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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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우리 며느리가 다음 주에 손님 한번 모시고 오고 싶다고 하는데. 이 원장에게 잘 좀 부탁해 달라고 해서. 이 말 하려고도 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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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이 오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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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며느리까지 세 명일걸.”

현서는 친절하고도 깊은 눈길로 화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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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정이 정해지면 연락 주세요. 잘 준비해놓겠습니다.”

매 센터 회원들은 될 수 있으면 예약에 어려움이 없도록 붐비지 않는 일정으로 관리되는 회원들이었다.

강 여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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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장 덕분에 내가 요즘 며느리들한테 대우받으면서 살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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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제가 항상 감사드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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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팔꿈치를 책상 위에 얹고 마른세수를 하던 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이었다.

약 2년 전부터 화장품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떠난 아내를 생각하다가 떠올린 사업이었다.

매사에 관심이 많았던 현서는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약초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 중국어는 물론 한방, 중의학 등에 관심이 많았었다.

산 같은 곳에 가면 풀을 뜯어 민간요법으로 치료도 하고 화장품도 만들어 쓰곤 했었다. 그때는 그저 소소한 취미 같아 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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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중에 우리 서하 좀 크면 나 화장품 사업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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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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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화장품을 만들어보고 싶거든. 그때는 오빠가 나 도와줄 거죠?”

현서가 그 말을 할 때도 도하는 머릿속으로 사업의 현실적인 비전과 타산만을 따져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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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

그때부터 진지하게 구상을 해보고 적극적으로 밀어줄 것을. 그랬다면 지금쯤 같은 건물에서 일하며 여전히 그의 아내로 살고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마다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아 왜 그러지 못했나 후회가 되었다.

찾을 수 없는 아내를 정처 없이 그리기만 하다가 당시 아내의 그 꿈이 떠올랐다.

아내를 기약 없이 기다리면서 그사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었다.

혹시라도 현서가 돌아오면 이제는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혀 연관성이 없던 새로운 사업을 벌인다고 했을 때 반대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그러나 도하는 성심껏 그들을 설득하여 코스메틱 사업부를 신설했다.

계열을 분리해서 시작한 작은 회사가 이제 제법 커져 스타트업에서 벗어났다.

지속적으로 연구에 투자한 덕분에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꾸준히 성장해 왔었다.

그사이 도하도 진성 그룹의 전무이사로 승진하게 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도하는 책상 위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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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전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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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 있는 연구실에 연락해서 연구소장 오늘 중으로 내 사무실로 오라고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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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에 시간이 비는데 그 시간으로 잡아 연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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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전화를 끊고 도하는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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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해결되었으면 좋겠군.’

꾸준히 연구해 오던 미백크림에 문제가 생겼다.

막대한 연구비용이 들어갔는데 거기에 쓰이는 원료 하나가 특허 등록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특허만 내놓은 사람의 연락처가 없어서 원료를 구입할 수도, 연락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과거에 이 원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무엇인지 기억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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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였을까.’

가물가물했지만 묘하게 기억해내고 싶은 무언가였다. 아주 중요한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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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느덧 세 시가 다 되어가도록 집중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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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님, 연구소장님 오셨습니다.”

비서의 안내와 함께 소장이 들어왔다.

도하는 보던 서류를 닫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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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으세요.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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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부르시기 전에 제가 먼저 보고 드리러 왔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자리에 앉기에 무섭게 도하는 진행 상황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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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진전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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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온 선크림은 천연 재료가 많이 들어 있고 방부제가 별로 들어가지 않아 변질이 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화장품 용기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특허 문제로 쩔쩔매던 소장은 그나마 채도하 전무가 반가워할 만한 한 가지 소식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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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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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연구팀이 이번에 발명한 용기를 테스트해 보았는데 공기 노출이 줄어드는 걸 확인했습니다. 또 변질이 되면 색상이 변하면서 소비자들이 알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디자인도 예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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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샘플 보내보세요. 그 제품은 선행기술조사 후에 특허 출원하시고 직원들에게는 포상을 해주세요.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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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도하는 비록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용기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답답함이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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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백 크림 원료 특허 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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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죄송합니다. 변리사 통해 알아보니 연락처가 없는 번호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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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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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그분이랑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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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료를 사용해선 안 되겠죠.”

도하는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자료조사도 하지 않고 무작정 일을 한 연구팀에게도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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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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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우선 그냥 사용하고 나중에 연락이 닿으면 그때 가서 로열티를 지불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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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서 알고 클레임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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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진성이라면 로열티를 세게 부르지, 설마 클레임을 걸어 사용을 정지시킬 일은 없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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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님. 답답한 소리 하지 마시고 이 달 안으로 그 성분을 빼고 제품을 완성하시든지, 아님 특허인을 찾아서 해결을 하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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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전무님. 면목 없는 대답만 했네요. 저희도 너무 답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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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대체 특허 낸 사람이 누구길래…….”

인상을 찌푸리던 도하는 잠시 숨을 고르고 테이블 위에 있던 생수를 따서 들이켰다.

특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소장은 좌불안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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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님 고생하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생하신 거 조금만 더 힘을 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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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 원료가 저희 제품에 핵심이라 빼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빠른 시일 내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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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다음에는 정기 보고 때 보도록 하죠.”

진성이 주력으로 하는 있는 사업에 매진하기에도 일이 많았지만 도하는 개인적으로 이 일에 가장 마음이 쓰였다.

***

강옥희 여사와 헤어지고 원장실로 돌아오는 길에 현서는 송화궁의 여러 센터를 꼼꼼히 돌아보았다.

그녀가 원장을 맡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 늘 그 막중한 책임을 실감하고 있었다.

다행히 한국에서의 스타트가 순조로웠다. 주위 사람들은 현서의 감각과 능력 덕이라고 칭찬을 하지만, 현서는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늘 잊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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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 김에 나도 박 회장님께 전화 좀 해볼까.’

원장실은 송화궁의 입구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송화 모양의 로고가 달린 커다란 대문을 지나면 백매화와 홍매화가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늘어서 있었다.

가운데 후원을 두고 왼쪽 한편에는 독채로 된 한옥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이 원장실이었다.

원장실에서는 늘 여러 가지 향긋한 허브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송화궁에서 쓰는 제품들을 위해 현서 역시 늘 연구에 힘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은 현서가 곧장 전화를 걸자 그레이스 박이 금세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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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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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안녕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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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우리 루나는 별일 없고?

루나는 그레이스 박이 지어준 현서의 영어 이름이었다. 대만에 있을 때도 한국 이름은 감추고 그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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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덕분에 여기는 너무나 순항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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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라 믿어. 더 큰 본점에서도 우리 루나의 활약이 워낙에 컸었으니까 거긴 걱정 안 해. 루카스도 잘 있지? 이 엄마한테는 전화도 잘 안 하고 루나랑 도현이만 보러 달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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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유 대표님한테 연락드리라고 할게요. 조금 전에 강옥희 여사님도 뵙고 오는 길이에요. 박 회장님께 일 좀 줄이시고 건강 잘 챙기시라고 잔소리하시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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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반은 또 그 소리! 난 일할 때가 제일 건강한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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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알죠, 알죠. 일하실 때가 제일 멋지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롤모델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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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라면 나를 능가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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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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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인덕이 많아 직원들도 루나를 믿고 따르는 거지. 나도 그 덕을 입은 사람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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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은 제가 박 회장님께 더 많이 입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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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는 내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이야. 이 삭막한 세상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도하와 막 이혼했을 무렵, 늦은 밤 오토바이 사고 현장을 목격했었다.

그 피해자가 그레이스 박이었고, 운전자는 뺑소니를 내고 도주해버린 상황이었다.

그 사고로 쓰러진 그레이스는 다리를 다치게 되었고, 가족들이 외국에 있던 그녀는 한국에 연고가 없었다.

소탈한 성격이어서 이 정도면 혼자 입원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현서는 그녀를 보살필 사람 없는 독거노인으로 오해를 했었다. 평소 수수한 차림으로 다니던 그레이스였기에 더 그랬던 것이다.

그때 현서가 그녀의 입원과 치료, 퇴원까지 한 달간 지극정성으로 함께 했었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자꾸 오는 현서를, 실은 그레이스도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가 없이 온정을 베푸는 그녀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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