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이렇게 빨리 (9/92)


#9. 이렇게 빨리
202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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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제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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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누가 해? 내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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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형님이 하셔야죠.”

현서는 혜미의 대답에 기가 차서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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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내가? 웃겨, 정말. 뻔뻔한 건 알고 있었지만.”

다만 그동안 싸우지 않으려고 참아 주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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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는 며느리 아니야? 며느리가 시부모님 저녁 식사 한번 못 해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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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형님, 저 음식 잘 못 해요. 제가 하면 시간도 더 걸리고 괜히 망치면 재료만 버려요.”

당황한 혜미는 아까부터 궁지에 몰리니 오기가 생기는지 더 이를 악무는 표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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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다음번에 맘먹고 초대해서 해 드릴 테니까 오늘 형님이 하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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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식을 잘 못 해? 내가 해준 음식에 항상 여기는 뭐가 덜 들어갔네, 여기에 뭐가 더 들어가면 맛있네, 이거는 너무 익었네, 하면서 아는 척했잖아.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평가질할 때는 언제고.”

그동안 요리 경연대회 심사위원이라도 된 양 구체적으로 평가질만 해대서 더 꼴불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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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둥이로만 전문가였어?”

현서는 정신 나간 사람을 쳐다보듯 바라보는 혜미를 향해 한마디를 더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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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잘난 미각 믿고 직접 해서 드려봐. 앉아서 남이 해주는 것만 받아먹지 말고. 알았어?”

혜미가 얼빠진 표정으로 할 말을 잃자 현서는 그런 혜미를 그대로 두고 돌아섰다. 그러나 현서가 막 2층으로 올라가려 계단을 향할 때였다.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주혁이 갑자기 생각이 난 듯 현서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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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형수! 찻값을 안 부쳐 주면 어떻게 해요. 겨우 2억에 내 체면이 얼마나 깎였는지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주혁은 아주 망신을 당했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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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서방님댁 자동차 값을 내줘야 하는데요. 언제 저한테 돈 맡겨 놨어요?”

천연덕스레 던지는 현서에게 주혁이 당황하여 어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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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지금까지 형수가 해줬으니까. 형수가 아니면 또 누가 해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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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 형네가 돈 주는 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형도 얼마나 힘들게 일해서 버는 돈인데요. 지금까지 해 드린 건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하면서. 서방님네 차니까 서방님 월급으로 사면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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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월급이랑 형 월급이 비교가 되나요. 채 회장님이 내 월급도 깎고 나를 그 후진 자리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나도 내 돈으로 살 수 있었어요. 이렇게 치사하게 부탁하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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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회장님께 가서 말씀드리세요. 원래 회장님은 능력 우선주의시니까 서방님이 능력을 보여주시면 친아들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적절한 자리에 앉히시는 분인데. 왜 여기서 뭐라고 하고 계세요?”

주혁은 현서의 말에 밀리자 입을 다물고 도움을 청하듯 혜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혜미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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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정말 섭섭하네요. 아주버님 능력에 2억은 돈도 아니잖아요. 식구끼리 서로 도와줄 수도 있는 일인데.”

식구란다. 자기가 언제부터 날 식구처럼 대하고 행동했다고.

맨날 상전이 된 양 시어머니 옆에 앉아 속살거리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받아 처먹던 것이 식구라고.

제가 언제 나를 형님으로 생각했다고. 말로만 형님이라고 부르고 종 취급이나 했던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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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식구면 돈을 무조건 줘야 해? 그거 안주면 섭섭한 일이고? 그러면 동서 친정에서 달라고 하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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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정에서 왜 우리 찻값을 달라고 해요.”

혜미는 현서가 친정을 언급하자 깜짝 놀라 정색을 하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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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가 맨날 자랑하는 잘나가는 친정이잖아. 그럼 그 정도는 껌값 아니야? 그러면 친정에서 달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나보다는 더 가까운 식구잖아. 서로 피를 나눈 진짜 식구. 나한테는 껌값처럼 쉽게 부르는 2억이잖아? 2억은 돈도 아니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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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친정에선 평소에도 이것저것 받는 게 많으니까 그렇죠.”

그 말에 현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혜미를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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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데 뭐가 그렇게 궁해서 우리 집 물건을 탐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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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제가 언제 형님네 물건을 탐냈어요?”

화들짝 놀라 들썩이는 꼴에도 현서는 여유로운 얼굴로 웃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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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동서가 와서 예쁘다고 하는 물건들에만 도둑이 들었는지 감쪽같이 사라지니까. 동서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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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제가 형님네 물건들을 집어가기라도 했단 말이에요? 이제는 저를 도둑으로 만드시는 거예요?”

혜미는 살짝 찔리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약하게 나가면 안 되기에 현서를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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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더 이상한 건 동서네 집에 가면 똑같은 게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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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그 물건들을 형님만 사라는 법 있어요? 똑같은 거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혜미는 현서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을 할 줄은 짐작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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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동서가 샀다고 말하지 마. 나중엔 내가 동서가 예쁘다고 말하는 물건들에 일부러 표시도 해 놨었고 사진도 찍어 놨었거든. 흠집 나 있는 건 위치까지 기억하고 있다가 동서네 갈 때마다 확인했으니까.”

현서의 말에 혜미는 할 말을 잃고 영숙을 쳐다보았다. 야속하게도 영숙은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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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증거가 필요해? 동서 시집온 이후 몇 년간 하도 많이 가져가서 일일이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 말해볼까?”

현서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궁지로 몰리기만 하는 혜미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계속 영숙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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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머니.”

그러나 영숙이 말을 하기도 전에 현서가 먼저 혜미를 향해 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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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차이나 피터 레빗 티팟. 그거 도하 씨가 나한테 선물한 거야. 그런데 동서가 그걸 보고 예쁘다고 하길래 일부러 내가 쟁반 밑면에다 펜으로 살짝 표시해 놨었거든. 어느 날 사라졌길래 동서네 갔을 때 보니까 딱 거기 있던데? 동서 도둑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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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그건 어머니가 그냥 선물이라고 주신 거지, 집에서 가져오신 줄은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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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개도 아니고 어떻게 동서가 좋아하는 것만 쏙쏙 골라서 가져다주셨을까? 시어머니 핑계 대지 마. 그건 동서가 시어머니를 도둑이라고 욕하는 거니까.”

없어진 물건을 하염없이 찾다가 그 집에서 발견했을 때는 설마 했었다. 그러다 그게 한두 번이 아니게 되었을 때는 체념했었다.

영숙이 동서네 가져다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도둑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동서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거침없이 바른말을 퍼부어 대는 현서를 보며 세 사람 모두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물건을 탐냈던 혜미나, 그걸 퍼다 준 영숙이나, 알고도 내버려둔 주혁이나. 뭐라 말하기가 두려워졌다.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 세 사람을 거실에 놔둔 채 현서는 그제야 계단을 올랐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 눈가가 뜨듯해지더니 곧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입으로는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것에 마음이 후련해지는 자신의 처지가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던 거였다.

그래도 이현서. 앞으로는 이렇게 살자.

우리 아가를 위해서라도 내가 강해야 하지.

따스한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현서는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 반지를 한참 들여다보던 현서는 슬픈 얼굴로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반지의 아름다운 빛이 왠지 슬퍼 보였다.

현서는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반지를 감싸 소중히 품에 꼬옥 안았다. 반지를 처음 손에 끼던 날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눈을 다시 뜬 그녀는 결심을 마친 듯,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던 반지를 마침내 화장대 서랍 안에 곱게 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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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여기 두고 가는 게 맞는 거야. 안녕.”

현서는 서랍을 닫으며 청혼을 받은 후 단 한 번도 손에서 빼놓은 적이 없던 반지를 이제는 떠나보냈다.

도하를 향한 마음도 같이 서랍 속에 넣어 두기로 했다.

이 반지를 처음 받았을 때 너무 좋아서, 마치 이 반지가 도하의 마음인 것처럼 느껴져 손가락에 끼워진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빼놓아 본 적이 없었다.

제게는 한 몸과 같은 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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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어가 하나, 둘, 셋, 넷……. 역시 살아온 세월이 무섭다.

별로 가져갈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버리고 버렸는데도 버리지 못한 추억이 꽤 많았다. 그 추억이 짐으로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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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야.”

마음이 심란하긴 했던 건지 남편은 어제 잔뜩 술에 취해 퇴근했다.

그녀더러 안방에서 편히 자라고 손님 방에서 잠들었던 그는 샤워를 마친 모습으로 방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한쪽에 쌓여 있는 짐들을 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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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짐들이야?”

도하는 현서를 바라보며 설명이 필요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 퇴근할 때에는 없었었는데 분명 잠 한숨 안 자고 짐을 챙겼나 보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옷차림도 평소와는 다르다. 가벼운 외출복 차림이다.

차이나넥 스타일의 블라우스와 슬랙스를 입은 아내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청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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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빠 출근하면 나도 나가려고 준비해 둔 거예요.”

모든 게 체할 듯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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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빨리 나가야겠어?”

아직 부부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믿어지지가 않는데 아내는 벌써 짐을 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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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에 나갈 거, 질질 끄는 게 더 이상한 상황 아닐까요?”

도하는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아내를 바라만 보았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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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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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밴 부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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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편하면 박 기사님에게 부탁할게.”

말릴 틈도 없이 남편이 박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의 출근 때문에 대기 중이던 터라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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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서초동에 가 있어. 박 기사한테 서초동으로 모시라고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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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하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빤히 쳐다만 보는 현서를 보며 지금은 보내고 저녁에 만나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서초동에 가 있는다면 부모님의 방해 없이 다시금 대화를 시도하며 그녀를 설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긍정인지 부정인지 아내는 거기에 대해선 대답이 없었다.

박 기사가 짐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던 현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재의 문을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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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저예요.”

채 회장님은 집에 계실 때는 항상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그런데 왜인지 그 안에서 영숙의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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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조찬모임이 있으셔서 일찍 나가셨다. 너는 며느리가 시아버지 조찬모임이 있는 줄도 모르니?”

영숙이 문을 열지도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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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버님께는 제가 전화로 말씀드릴게요. 어머니. 안녕히 계셔요.”

문밖에 선 현서가 건네는 인사에 영숙이 그제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얼굴로 문을 휙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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