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짝사랑
(3/92)
3.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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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짝사랑
2022.04.11.
몸이 안 좋긴 한가 보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보니.
소매로 코를 막은 채 안방으로 들어가 보니 도하가 손목에서 시계를 풀고 있었다.
“저녁 먹어야죠. 모처럼 일찍 들어왔네요.”
“오기 전에 간단하게 먹었어.”
그녀를 슬쩍 바라본 남편은 담박한 한마디를 던졌다. 현서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그 말에 도하가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예전과는 분명 달라진 듯한 아내의 퉁명스러운 말투가 조금은 신경 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요즘 남편은 거의 밖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아마도 서하가 떠나고 난 뒤부터.
아내로서 늘 묻지만 더 이상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한 지는 꽤나 오래였다.
다만 오늘 따라 퇴근이 이른 편이어서 무슨 바람이라도 분 건가 싶었던 거였다.
역시나 괜한 기대감이었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편하다는 걸 늘 깨달으면서도 왜 또다시 실망을 반복하는지 스스로의 감정이 우스웠다.
이제는 남편도, 그런 남편을 사랑하는 자신도 다 원망스러웠다.
“혹시 그동안 날 기다렸던 거야?”
그런데 방금의 아내의 말이 의외였는지 도하가 묻는다. 현서는 대답 대신 중얼거렸다.
“……오빠도 이 집이 싫겠죠. 서하의 추억이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없는 이 집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이 괴물 같은 집구석에서 버텨야 하는 건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그에게 이 집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말하지 않아 비록 그가 잘 모른다지만, 이제는 그가 모르게 해야 하는 것조차 서글펐다.
원래도 누구보다 일중독이던 남편은 서하를 보낸 이후 더욱 일만 했다. 그것이 그의 도피인 듯 했다.
세상에서 유일한 아군이었던 엄마와 유일한 보물이었던 자식이 떠나고 이제는 정말 혼자였다.
“……나랑 있는 게 힘든 거 아니었어?”
각방에서 잠을 청한 지도 몇 주가 지났으니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남편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남편이 그녀를 내버려 두길 바란 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실은 서로가 함께 있는 게 힘이 드는 이런 때일수록 남편의 사랑을 구하고 싶었던 게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힘들어요. 그렇지만…….”
힘들지만 혼자 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불편했지만 그와 헤어지려 한 건 아니었다.
그랬으니 그간의 모든 걸 감내했던 거였다. 신혼 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결혼 전부터 애초에 따로 신혼집을 차리자는 남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만큼 현서는 그의 부모까지 진정으로 사랑하려 애써왔다.
저렇게 치가 떨리는 시모조차 품으려 했었다. 그래서 남편이 물었을 때도 진실을 감추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힘들 게 하진 않아?’
‘아니에요, 잘해주셔요. 걱정 마요.’
그 모든 게 남편을 사랑해서였다. 완벽주의자 남편에게 그저 완벽한 가정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가족의 애정이 결핍되어있던 남자를 채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그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를 사랑하지 말 걸 그랬다.
완벽주의자였으니 아내와 아이에게 잘하려 애쓰는 좋은 남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현서는 늘 외로웠다. 그게 남편의 사랑은 아니었기에.
채도하는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뛰어들었다. 그만큼 그를 사랑해서.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이제 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채도하를 죽도록 사랑한 것뿐인데,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한 남자를 사랑한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그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보물 같은 아이를 잃고 남은 건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슬픔뿐이다.
도하는 어려워하는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함께 있는 건 힘들다는 말 이후 아내가 다른 말을 해주지 않는다.
“어쨌든 여기는 오빠의 가족이 사는 집이잖아요. 오빠나 나나 서로 힘들지만…… 집도 좀 신경써줘요.”
현서는 많은 감정을 뒤로하고 다른 말은 없이 단정하게 말해 주었다. 이제 와 사랑을 구걸하는 것도 싫었으니.
“알았어. 한국에 오고 나서는 채 회장님이 일을 더 많이 주시기도 했어. 그래도 네 말대로 노력은 해볼게.”
“그렇군요. 오빠에겐 일이 워낙 중요하죠.”
씁쓸한 얼굴의 아내를 보며 도하가 다시 입을 뗐다.
“너라도 밥 잘 챙겨 먹어.”
“내가 알아서 할게요.”
평소의 아내답지 않은 불퉁한 대답이 거슬리는 건지 걱정되는 건지 모를 남편의 시선을 뒤로하고 현서는 방을 나왔다.
쿵,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무거웠다. 납처럼 울리는 그 소리를 가슴에 여운으로 남긴 채 현서는 발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던 그녀는 가까스로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중심을 잡는 동시에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윽…….”
잠시 호흡을 고르던 현서는 순간 두 눈을 번쩍 떴다. 이내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고 말았다.
“아……. 설마…….”
***
선명한 두 줄. 너무나도 선명한 두 줄을 바라보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열 개의 임신 테스트기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새빨간 스무 개의 줄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단 한 개도 두 줄이 아닌 테스트기는 없었다.
넋이 나간 채로 정신없이 살다 보니 생리 주기도 잊고 있었다.
어제저녁 구역감에 혹시나 싶어 오늘 아침 도하가 출근하자마자 약국에 들러 테스트기를 사 본 건데.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단지 그 하룻밤 사이에.
서하가 있을 때는 가지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오지 않던 둘째 아이가 지금에서야 오다니.
“하……. 나보고 어쩌라고. 이런 집구석에서. 이러다 또 지난 일이 되풀이된다면.”
깊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이제는 이런 집에 미련 한 조각도 남겨두고 싶지 않은데. 지금에 와서.
“서하야. 엄마는 어쩌면 좋니? 우리 서하가 그렇게도 바라던 동생인데.”
혹시 서하의 선물이니? 엄마에게 삶의 희망을 주기 위해 보내준 선물이니.
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설렜다. 다 말라버린 마음에도 감정이 울컥 동하고 있었다.
축복일까?
그러나 서하의 일을 생각하면 이 집안의 핏줄인 아이를 또다시 품고 있다는 게 서글프기도 했다.
현서는 자신의 아직은 납작한 배에 살며시 손을 얹어보았다. 배 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아가, 미안해. 온전히 기뻐해 주지 못해서.”
그래도 제 아이였다. 그러니 이 아이를 귀한 선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어야 했다.
“하지만 걱정 마. 엄마가 너는 꼭 지켜줄게.”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사모님, 저녁 준비 어떻게 할까요?”
서산댁 아주머니가 문을 살며시 열며 물어왔다. 입덧 탓에 음식 생각만 해도 짜증이 확 올라온다.
“아주머니, 제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요, 그냥 알아서 준비하세요.”
현서는 문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정말 몸이 안 좋다. 저녁은 고사하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지 못했다.
아래층에서 영숙이 저녁 준비는 하지 않고 누워만 있다고 2층을 향해 고함치는 소리가 침실까지 들려온다.
‘내가 시집오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외식을 했다면서…….’
시집온 현서의 음식을 먹기 시작한 이후론, 심지어 외출을 하더라도 밥 한 끼를 밖에서 먹고 오는 일이 드물었다.
“나는 이 집의 가족이 아니구나. 일하는 사람보다도 관심을 못 받고 있구나.”
오늘 그녀가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지 못한 건 사용인조차 알아채질 못하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었는데 오늘따라 가슴에 찬바람이 분다.
자신을 사랑해주던 존재들을 모두 잃고 나서야 밀려드는 후회에 울화가 치밀었다.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후회가 되었다.
“왜 바보같이 참고만 살았을까?”
저 하나만 참으면 언젠가 알아줄 줄로만 알았다. 이런 결과가 올 줄도 모르고.
.
.
.
현서는 불 꺼진 방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도 끝내 거른 채 취침 시간이 다 되었다. 캄캄한 방 안처럼 온통 마음도 캄캄하기만 했다.
달칵-
“뭐해. 벌써 자는 거야?”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 남편이 물었다.
늘 늦는 그가 퇴근한 걸 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났나 보다.
임신 테스트를 한 이후로 남편과의 첫 대면이었다.
이 상황, 이 기분으로 남편을 어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의 바람대로 둘째가 찾아왔는데 말해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내 인생의 전부를 차지하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사랑했는데.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었는데.
“현서야.”
남편은 창가에 서 있는 그녀에게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꾸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창밖만 보고 있는 그녀의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나한테 화가 난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거.”
잠잠하던 도하의 두 팔이 그녀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현서가 놀라는 사이 그의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그럼 왜 네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지.”
“…….”
현서는 그 말에는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네가…….”
도하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읊조렸다.
“……필요한 거 같아.”
현서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내…… 몸이요?”
“아니……. 꼭,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는 거 같기도 하고…….”
그러나 현서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삶에 아내란, 절실한 존재까진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밤에만은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한때 현서는 남편에게 자신이 여자로서 퍽 어필이 되는 줄 알았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의 마음도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기대에 차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저를 혼자 두었던 그를 보며 깨닫고 말았다.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착각이었는지.
“그게 몸이 필요한 거예요.”
현서는 그의 손을 탁 쳐내며 돌아섰다.
마주 보게 된 남편은 한동안 조용했다. 이런 식으로 매몰차게 뿌리친 건 처음이었기에 그가 보기에도 이상했을 거라 생각한다.
늘 마음과 몸을 모두 아낌없이 주던 여자였으니. 한 번도 이런 거부는 받아본 적이 없었을 테니.
“아니야, 그런 게. 그렇지만…….”
이내 현서는 흠칫 몸을 들썩였다. 남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어깨 위를 덮은 남편의 커다란 손에서 악력이 느껴졌다. 늘 그렇듯 뜨거운 체온도 함께였다.
남편이 그녀를 간절히 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렵게 다시 찾아온 아기인데 임신 초기에 이럴 수는 없었다.
“만지지 말아요. 그냥 싫다고요.”
현서는 처음으로 남편의 앞에서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힘주어 떼어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네요.”
남편의 눈빛에 당혹감이 스치는 게 보였다. 어느 순간에도 싫다는 말을 한 적이 없던 현서였다.
곧 천근같은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혼란스러운 듯 남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뒤 그는 억지로 납득하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래…. 미안….”
그 후 도하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가 방을 나가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현서는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다.
***
아침부터 시모 영숙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시끄럽게 들려왔다.
오늘은 시아버님이 일찍 출근하셨나 보다. 아버님이 계실 때는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다가 아버님이 출근만 하면 호랑이 없는 굴의 여우처럼 활개를 치며 집안 식구들을 잡는다.
예전에는 저 모습도 아무렇지도 않게 견뎌낼 만했는데 이제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나가고 지친다.
전쟁을 치른 장수도 아닌데 무슨 용기로 저런 사람들을 다 이겨낼 수 있다고 장담했을까?
“남편이 출근하는데도 내다보지도 않고 자빠져 있어. 무슨 죽을 병에 걸렸대?”
영숙은 내려오지 않는 현서를 빨리 불러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현서는 가라앉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 어쨌든 누워만 있지 말고 우리 아기를 위해서 뭐라도 먹어야지.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심정으로 겨우 몸을 움직여 아래로 내려왔는데 더는 발이 주방 쪽으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주방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가 역해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황급히 다시 2층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 현서는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