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를 다시 안던 밤
(2/92)
2. 너를 다시 안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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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를 다시 안던 밤
2022.04.07.
시집오기 전부터 남편과 기회가 될 때마다 눈을 맞추며 속살거리던 혜미의 속셈을 현서는 모르지 않았다. 제 앞에서도 티가 났으니까.
얼마나 사람을 우습게 봤으면 아내 앞에서도 그럴까.
저도 할 말이 없는지 얼굴이 붉어지려는 혜미를 뒤로하고 현서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영숙이 혀를 찼다.
“쯧쯔쯔……. 마누라가 저 모양인데 도하도 집에 와서 좋을 게 있을지…….”
현서는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삭여오던 분노는 점점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무리 처음부터 그랬다지만, 아무리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지만.
예전에는 견딜 만했었다.
그때는 서하가 있었으니까.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내 아가가.
남편이 충격받을까 봐 모든 걸 혼자서 덮어두고 참아보려도 했었다.
그러나 나날이 뻔뻔해지는 시댁 식구들을 보며 점점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편이 해외 지사로 가야 했을 때에도 함께 가자고 했지만, 그렇기에 따라가지 않았었다.
이 인간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똑똑히 지켜보기 위해서.
그런데 그나마 어려워하던 아들마저 집을 비우자 영숙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현서를 구박했다.
역시나 이들에게 서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하가 그렇게 떠났는데 오늘이 기일인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들이었다.
이제는 참으려는 마음보다 응징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고 있었다.
현서는 이를 악물고 아무 것도 모르는 남편이 있는 위층을 향해 올라갔다.
현서를 쏘아보던 영숙은 곧 나긋한 손길로 혜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얘, 넌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네 몸이나 생각해. 뱃속에 아들이 있는데 잘 먹어야지.”
“네……. 어머니.”
“서산댁, 이따가 주혁이 오면 밥 먹고 갈 거니까 며칠 전에 구봉산 심마니가 가져온 약더덕이나 준비해 놔요.”
“예.”
서산댁은 좋은 건 작은아들만 퍼주는 영숙이 못마땅해서 퉁명스레 대답하며 밖으로 나갔다.
.
.
.
도하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캐리어를 놓고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서가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여전했다. 아니, 상황은 더 악화된 듯 보였다. 오늘 아내의 상태를 보니.
서하의 1주기. 현서는 이날을 남편과 함께 맞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로 인한 슬픔은 서로가 공감할수록 더욱 아파 부부가 오히려 함께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해외 지사로 떠날 때 따라나서지 않겠다는 아내를 두고 혼자 떠나는 일이 과연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서로를 보는 게 더 아픈 상황이라면 그 참에 떨어져 있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몇 달간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아내가 조금은 회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전혀 나아지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하는 곧장 차 키를 챙겼다. 그런데 막 문 앞으로 향할 때 문이 열렸다.
현서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남편의 손에 들린 차 키로 향했다.
“서하한테…… 다녀올게.”
현서는 힘겨운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갈까?”
나직하게 묻는 도하의 얼굴을 흘끗 본 현서는 방금보다 더 힘겨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까 다녀왔어요.”
그 말을 끝으로 현서는 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
도하는 무겁게 떨어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갔다. 현서는 도하가 나간 뒤 허공을 한동안 응시했다.
***
주혁과 혜미 부부가 기어이 저녁 식사에 후식까지 먹고 돌아간 뒤에야 현서는 올라와 욕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남편이 귀가해 있었다. 현서는 드레스 룸 화장대 앞에 앉으며 내뱉었다.
“왔어요?”
“응.”
서하를 보고 온 남편 역시 좋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럴수록 서하에 대한 언급은 차마 나오지가 않았다.
아내에겐 의무로만 잘하던 완벽주의자 남편도 자식에게만큼은 본능적인 부성이 끓어올랐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기에 더 고통이 컸다. 자식의 죽음으로 인해 결별하는 부부의 심정이 이해가 갈 만큼.
그만큼 떠올리고 싶지 않은 슬픔인데, 그럼에도 남편 곁을 떠나지 못했던 건 오랜 시간 품어온 짝사랑 때문이리라.
미련한 줄 알면서도 이제는 오기로 곁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외면하듯 남편에게서 시선을 돌려 거울을 보고 있자 남편도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드레스 룸에 남은 현서는 홀로 바라보고 있는 거울 속 여자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왜 이러고 사니…….”
샤워 부스에 들어간 도하는 물을 틀었다. 미어지는 슬픔도, 복잡한 마음도 함께 씻겨나가기를 바라면서 머리에 물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상념에 젖은 채, 물에 젖은 채 그는 타국에 있을 때부터 고민하던 한 문제에 대한 결론을 냈다.
샤워를 끝낸 도하는 가운 차림으로 욕실을 나갔다. 그러다 문득 발을 멈추었다.
현서가 아까 그 모습 그대로 화장대에 앉아 있었다.
도하는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아내를 쳐다보자 그녀도 거울 속에서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바로 뒤까지 바짝 다가온 도하가 물었다.
“왜 아직 이러고 있어.”
이어 그는 화장대 위에 있던 드라이어를 들며 말했다.
“머리 말려줄게.”
곧 위이잉 하는 소음이 귓가에 울리며 그가 꽤 다정한 손길로 현서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현서는 거울 속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긴 머리가 마른 뒤 이윽고 드라이어가 꺼졌다. 시끄러웠던 소음이 멎자 아까보다도 침묵이 더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남편은 손에서 드라이어를 천천히 내려놓고는 거울 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현서도 남편과 말없이 거울 속에서 눈맞춤을 지속했다.
왜인지 남편은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대로 뒤에 서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어릴 적부터 앓도록 사랑했던 그 맹렬한 눈빛으로.
현서는 계속 그를 바라본 채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거울 속 남자가 아닌 실물과 눈을 맞추었다.
방금까지 제 눈과 맞추었던 같은 눈빛이 바로 가까이에 보였다. 당연하게도 거울보다 실물이 훨씬 더 강렬했다.
그 강렬함은 심지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머뭇대던 현서의 눈이 커지는 사이 남편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침묵 끝에 남편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순간 현서는 눈을 감았다.
오랜만이었다. 오래 그리웠던 것도 같다. 입맞춤은 금세 뜨거워져 갔다.
도하는 그 기세를 몰아 그녀를 안아 들고서 침대로 데려갔다. 침대 위에 풀썩 눕혀진 현서는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 숨길 수 없는 정염이 비치고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참아왔지만 더는 기다릴 수가 없을 것만 같은.
이후 그는 기름을 부은 듯 빠르게 타올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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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먹해졌었던 분위기에 비하면 다분히 충동적인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몇 달 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은은한 스탠드 조명만이 비추고 있는 부부의 침실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어느덧 조용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차오른 숨을 잠시 고르고 난 남편이 먼저 침묵을 깼다.
“……둘째를 빨리 갖는 게 좋겠어.”
천장을 보고 누워 있던 현서는 고개를 돌려 남편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런가요…….”
지난 1년여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서하가 있을 때는 동생을 어서 낳기를 원했지만 서하를 보낸 뒤로는 아기 생각은 해볼 겨를도 없었다.
“물론 서하의 빈자리를 대신할 존재는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또 다른 아기가 찾아오면 지금보다는 여러모로 나아질 거야.”
아무래도 도하가 현재 상황에서 내린 결론은 그것인 듯했다.
그러나 현서는 그마저 확신이 없었다. 요즘 들어서는 뻔뻔한 시댁 식구들을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면서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고 있었다.
남편 곁에 남고 싶은 마음이 반, 시댁 식구들과 함께 남편도 함께 버리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
오늘도 남편의 퇴근이 늦는다. 한국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부터 일에 파묻힌 모양이다.
본래 자리로 복귀했으니 채도하라면 마음이 바쁠 만도 할 것이다.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우려던 현서는 문득 주춤했다.
‘……둘째를 빨리 갖는 게 좋겠어.’
둘째……. 둘째라. 이런 상황 속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이 결혼을 지속할지 말지에 대해서도 점점 고민이 되던 중에 새로운 생명이라니.
현서는 몸을 돌려 안방을 나왔다. 그러고는 같은 2층에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그때 계단에서 기척이 들렸다. 그제야 퇴근한 도하가 올라오는 소리였다.
돌아보던 현서는 그와 마주치자 자연스레 물었다.
“왔어요?”
“응.”
“수고했어요. 쉬어요. 나는 먼저 잘게요.”
여느 때와 같은 남편에게 그 한마디를 던지며 현서는 손님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어디 가?”
의아해진 도하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물었다.
“이 방에서 자려고요.”
“……뭐?”
아내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도하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생각해 봤는데, 지금 둘째는…… 아닌 거 같아서요.”
현서가 태연하게도 거부 의사를 보이자 도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번에 그 표정에 기분이 좋지 않은 티가 드러났다.
“그렇다고 각방을 써?”
“안 그러면…….”
또 지분거릴 거잖아요 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 현서는 말을 흐렸다.
채도하는 원래가 뜨거운 남자였다. 신혼 때부터 한결같이.
타국에서 돌아온 남편이 어제를 계기로 다시 뜨거워졌으니 한 침대에 있으면 장담할 수가 없었다.
현서는 그녀를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던 남편에게 불현듯 물었다.
“혹시…… 내 몸이 필요해요?”
“뭐?”
순간 도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니에요?”
“무슨 표현이 그래? 사람 쓰레기로 만들지 마.”
“아님 말고요.”
화가 난 듯한 남편의 얼굴에도 현서는 그저 담담한 표정을 일관했다.
“혹시 그런 거면 피임이라도 해볼까 했죠. 둘째 계획이 아니면 내 몸은 필요 없나 보네요.”
돌연 남편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던 그는 고민이 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이미 자존심이 다친 듯했으니 당분간은 아내를 찾지 않을지 모르겠다. 현서는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잘 자요.”
현서는 그 말을 끝으로 휙 돌아섰다. 그답지 않게 당황하는 남편을 두고서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하는 석상처럼 굳어진 채 방금 쿵 닫혀버린 문짝을 벙하니 바라보았다.
왜인지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현서가 들어가 버린 손님방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열지 않은 채 잠시 멈춰 있던 그는 곧 다시 손잡이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냉랭한 태도의 아내에게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하는 하는 수없이 혼자서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상의를 벗어 던졌다.
넥타이도 거칠게 잡아채던 그는 손을 놓고 그대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긴 한숨과 함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렸다.
***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좋지 않았다.
저녁 식사 준비도 서산댁에게 재료와 함께 메뉴를 지정해주는 정도만 해두고 손님방에 올라와 쉬고 있었다.
남편 채도하가 한국에 들어온 지도 3주가 다 되어갔다. 그는 여전히 새벽같이 나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진성 그룹 내 어느 직원보다도 빠른 출근을 하고 늦은 퇴근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직 해가 다 지기 전에 2층에서 기척이 들렸다. 남편이 웬일로 일찍 들어오는 건가 싶어 현서는 그제야 방에서 나갔다.
막 복도에 발을 떼던 참이었다. 현서는 하얀 이마를 찡긋 구겼다.
“냄새가 왜 이래…….”
서산 댁이 여느 때처럼 밥을 짓기 시작하는 냄새일 뿐인데.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밥 냄새가 평소라면 구수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역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