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하얀 사람들 (3부. 의심나면 확인해라)
곤히 자던 한이가 번쩍하고 눈을 떴다.
어두운 방안에서 한동안 가만히 누워있던 한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나라 씨마저 저들을 믿는 거 같은데, 늘 가장 현명한 나라 씨가 틀릴 리 없지…. 그래 내가 너무 과민반응 한 것 같다.’
한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긴 저 성배 형도 이젠 의심 안 하는 것 같은데, 나도 잊자. 여기서 좀 지내다 보면 알게 되겠지 뭐.’
자신의 배를 몇 번 편하게 긁으며, 하얀 옷의 사람들에 대한 의심의 마음을 비운 듯, 잔잔하게 혼자 웃음을 짓던 한이는 다시 번쩍하고 눈을 떴다.
‘의심나면 확인해라. 맞아! 우리 삼촌이 한 말이었어. 사기를 당해서 가진 돈을 몽땅 날린 그 삼촌이 술에 취해 울면서 해주신 말. 한 번만 확인했어도, 단 한 번만 확인했어도 사기 당하지 않았을 거라면서….’
한이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일어나 방에 불을 켰다. 방 안에 걸린 벽시계는 10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한 번만 확인하자. 그거면 돼.’
한이는 자신의 칼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 다시 칼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큰 칼을 들고 다니기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칼을 들면 움직임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맨손이 편했다.
한이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선 예지와 정배가 여전히 재밌게 놀고 있었다.
“어! 한이 오빠. 어디 가여?”
“어, 예지야. 오빠 잠깐만 바람 좀 쐬고 올게. 어른들 보면 그렇게 말해.”
“네!”
한이는 예지와 정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서둘러 집을 빠져나갔다.
조용히 현관문을 닫은 한이는 202호에 있는 소희와 나라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두운 계단을 소리 내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내려가는 상황이, 한이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는지 가볍게 헛웃음을 지었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온 한이는 주변을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63빌딩을 향해 움직였다.
‘아까 분명히 그 아줌마가,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주위에 모여 산다고 했는데, 아무도 없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지금 상황에선 전혀 의미도 없는 신호등이 한이가 다가가자 마침 녹색으로 바뀌었다.
‘역시, 모든 것이 날 63빌딩으로 안내하고 있어!’
한이는 모든 상황에 자신의 의지를 합리화시켰다.
그렇게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그는 63빌딩 앞에 도착했다.
우선 도로에 길게 놓여있는 긴 화분 뒤에 숨은 한이는 고개만 내밀어 63빌딩 정면을 주시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아무런 불빛도 반짝이지 않는 63빌딩을 보며 오히려 한이는 의심을 키워갔다.
‘역시, 뭔가 있어. 어제는 분명히 평소보다 밝게 빛나던 빌딩이 오늘은 모든 조명이 꺼져있다.’
한이는 화분 뒤에서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63빌딩의 주변을 계속 경계했다.
하얀 옷의 사람들은 아직 한이 일행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조금의 나쁜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이는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괜한 짓을 하다 걸리기라도 하면, 이 안전하고 좋은 곳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숨죽이고 주변을 경계하던 한이는, 문득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철없는 의심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던 그는, 63빌딩을 다시 쳐다보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의심나면 확인해라.’
한이가 결연한 표정으로 의지를 굳히던 그 순간, 자신의 뒤로 누군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한이의 긴장감이 증폭되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뭐라고 둘러댈지를 고민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괴물 같은 영민과 피터지게 싸우고, 밤까지 샌 성배였지만, 그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나라와 와인을 한잔 할 생각에 빠진 그는 누워서 자는 둥, 마는 둥하며 몇 시간을 보내다 일어났다.
어둑해진 방 안에서 잠시 동안 입꼬리가 찢어질 정도로 미소 짓던 그는 자신의 뺨을 두어 번 두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배가 방문을 열고 나오자, 저녁을 먹던 진모와 아이들이 성배에게 식사를 권했다.
“성배 군, 저녁 먹어야지?”
“전 괜찮습니다. 아저씨 맛있게 드세요. 예지랑 정배도 맛있게 먹어라.”
“네, 삼촌! 이 쏘세지 맛있어요!”
사람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잠시 보던 성배는, 뭔가를 찾는 듯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근데 나라는 저녁 먹으러 안 왔어요?”
“어, 나라 양은 그냥 좀 피곤하데, 영 입맛이 없나봐.”
“이런, 이런…. 아무래도 누군가 간호할 사람이 필요하겠네요. 뭐, 귀찮지만 말이죠. 크하하.”
진모가 어색하게 웃는 성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나라 양은 아픈 게 아니라 입맛이 없는 거야. 무슨 간호까지 하려고.”
“아뇨, 그래도 그게 아니죠. 사람이 이렇게 의지할 때 없이 외로울 땐 서로 살 부비며… 아니, 그게 아니고 저기….”
자기 혼자 횡설수설하는 성배를 보며, 진모가 가볍게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그래. 소희 양도 아까 그… 정희 씨 만나러 간다고 나가서 나라 양이 혼자 있을 텐데, 어서 가봐. 나라 양이 아무리 강한 여자라지만, 큰일 겪었으니 마음의 상처가 클 거야.”
“네, 그럼.”
진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배는 짧은 대답을 던지고 현관문을 뛰어 나갔다.
평소 싸울 때 외엔 행동이 느긋하던 성배가 빠르게 말하고, 빠르게 행동하자 진모와 아이들은 황당하다는 듯, 한동안 성배가 나간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모와 아이들의 황당해하는 마음을 뒤로하고 문을 나선 성배는, 희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바로 아래층에 있는 202호의 앞에 섰다.
잠시 심호흡을 몇 번 한 그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이상하게 노크 한 번 하는데도 성배는 긴장이 됐다.
‘나라가 나오면 일단 웃을까…. 아냐, 그건 이 차성배 스타일이 아니지. 근데, 얜 왜 이리 안 나와?’
몇 번을 더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성배는 살며시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마침 문이 잠겨있지 않았고, 그는 조용히 나라를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라야, 나라야. 오빠… 아니, 나 왔어. 들어간다.”
집 안은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고, 사람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배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나라를 불렀다.
“우리 나라가 어딨나…?”
몇 번을 불러도 나라의 대답은 없었다.
성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곧바로 방문을 하나 씩 열어 봤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방문을 열고 불을 켜자, 방 한 구석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져있는 나라가 보였다.
“나라야!”
성배는 황급히 나라의 얼굴을 만져봤다.
나라의 얼굴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성배는 곧바로 나라를 안고 302호로 올라갔다.
“진모 아저씨, 나라가 몸에 열이 심해요!”
“뭐? 일단 눕혀봐.”
성배가 거실에 나라를 천천히 눕혔고, 진모는 곧바로 약상자를 뒤졌다.
정배는 물수건을 가져와서 나라의 이마에 살며시 얹어 놓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라를 바라봤다.
“나라 양, 정신 좀 차려봐. 여기 감기약 좀 먹어봐.”
다행히 나라는 의식은 있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서 스스로 감기약을 먹은 나라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 너무 걱정들 마세요. 그냥 단순한 몸살감기에요.”
곁에서 계속 나라를 지켜보던 성배가 나라의 손을 꽉 잡았다.
“언제부터 이런 거야? 이렇게 아팠으면 바로 위층인데 올라오지 그랬어!”
나라는 자신을 걱정하는 성배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서 잠깐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어지럽고 열이 나서 그런 거예요.”
“넌 왜 항상 남에게 기대려고 하질 않는 거야? 그래봤자 20대 아가씨잖아. 그 나이 땐 좀 더 약한 척 해도 되고, 남자한테 기대도 돼! 물론 나 같은 쓰레기한테 의지하긴 싫겠지만….”
성배의 진심이 담긴 말에, 나라는 성배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아니에요. 성배 씨가 왜 쓰레기에요. 저를 몇 번이나 구해 주셨는데.”
“미안하다. 넌 이렇게 아픈데 난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이요?”
“아… 아니, 뭐 별거 아냐. 하여간 아프지 마라.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성배가 내뱉은 오래전 드라마 대사를 듣고, 나라는 갑자기 입술을 씰룩거리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훗, 성배 씨는 가끔 혼자서 진지하게 영화 찍는 게 너무 웃겨요. 저 그냥 감기에요.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성배 씨 구박할 거예요.”
“그래그래, 이제 자.”
성배는 나라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진모에게 간호를 부탁한 뒤,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면서 성배는 한심한 자신을 원망했다.
‘아아아씨발! 나라는 저렇게 아픈데 난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가렵지도 않은 머리를, 성배는 두 손으로 거칠게 긁어대며 아파트 밖을 잠시 서성거리다 놀이터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파트 놀이터에 있던 그네에 앉은 그는 곧바로 줄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하루를 꼬박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갇혀있던 나라를, 좀 더 챙기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한참 스스로에게 쌍욕을 하며 자책을 하던 성배에게, 멀리서 두 명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 둘은 오전에 망치로 좀비를 때려잡았던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곧장 성배에게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성배에게 있어서 그 남자들의 인사는 왠지 모르게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캬악 퉤!
남자들의 눈인사에 침을 뱉으며 응수한 성배는, 뚜벅뚜벅 남자들 쪽으로 걸어갔다.
“이 새끼들이 아침부터 좆나 거슬리더니 밤까지 맘에 안 드네. 내가 웃기냐?”
성배의 갑작스런 행동에 남자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들은 서로를 잠시 쳐다보더니 곧바로 성배에게 다가갔다.
“휴우, 소희 씨. 난 또….”
등 뒤에서 다가오던 존재는 바로 소희였다.
짧은 순간 하얀 옷의 사람들에게 둘러댈 핑계를 생각하던 한이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희 아줌마한테 가려는데 한이 씨가 너무 티 나게 어딜 가시길래요. 혹시나 해서 뒤를 밟아 봤어요!”
“아 그랬군요. 제 딴에는 최대한 티 안 나게 자연스럽게 온다고 온 건데.”
“그냥 뭐랄까,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발걸음에 힘도 엄청 실려 있었고요. 아무튼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스스로는 자연스럽다고 착각했지만, 실제론 엄청나게 비장하게 움직이던 한이를 생각하며 소희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앗! 소희 씨, 쉿!”
“네, 죄송해요.”
느긋한 소희와 달리 한이는 너무 티 나게 비장했다. 마치 스파이 영화라도 찍는 듯, 그는 조심스러웠다.
소희는 그런 한이가 웃긴지, 계속 몰래 몰래 고개를 돌려 소리 없이 웃었다.
“소희 씨, 왜 자꾸 뒤를 보세요? 누가 있나요?”
“네? 아… 아뇨. 근데 한이 씨,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의심나면 확인해라. 삼촌이 해주신 말이에요. 아무래도 저 63빌딩이 의심가요. 딱 한 번만 확인하면 돼요.”
“근데 문이 열려있는데요? 저 안에 뭔가 비밀이 있다면 주변에 지키는 사람도 있고, 문도 잠겨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이는 소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더 의심이 가죠.”
소희는 그런 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다 한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혹시 기억하세요?”
소희가 그때를 떠올리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잠시 방황하다 다시 한이를 향했다.
“그럼요. 기억나죠.”
“소희 씨. 이번에도 잘 부탁해요. 제가 들어가서 확인만 하고 나올게요. 혹시라도 제가 너무 오래 안 나오거나, 누군가 다가오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세요.”
한이의 말에 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번엔 혼자 못가요. 저도 같이 가요.”
“하지만 소희 씨. 위험할 수도 있어요.”
소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 이제 편의점 알바생 윤소희가 아니에요. 해피엔딩스의 전사라고요!”
“아니, 그 얘긴 없던 걸로…. 아무튼 안 돼요!”
한이는 혹시라도 모를 위험 때문에 한사코 소희를 말렸지만, 소희는 위험한 상황에선 혼자보단 둘이 낫다며 기어코 한이를 설득했다.
하는 수 없이 한이는 소희와 함께 63빌딩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둘은 서로를 보며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63빌딩으로 들어갔다.
빌딩의 1층은 로비와 엘리베이터 그리고 식당을 비롯한 매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깥에 조명만 일일이 켜진 않았을 테고, 아마 관리실에서 한꺼번에 켜고 끄나 본데요.”
로비 곳곳을 살피던 한이의 말에, 소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때 63빌딩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둘은 신속히 자세를 낮추고, 문이 열린 식당 안으로 들어가 계산대 뒤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숨겼다.
한이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고 입구 쪽을 확인했다.
정희와 범식,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빌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이는 혹시나 들킬까봐 다시 몸을 숨긴 채, 그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여보, 현준이랑 영호는 오늘 기도 빠진데요.”
“뭐? 아니 왜?”
“그 깡패 같은 놈하고 이야기 할게 있다고 갔어요.”
“아 그 건방진 놈. 잘됐네. 현준이랑 영호 정도면 이야기 잘 하겠지.”
식당 계산대 아래에 숨어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소희가 아주 작은 소리로 한이에게 속삭였다.
“깡패는 성배 오빠?”
한이는 그 작은 소리라도 저들에게 들릴까봐, 황급히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소희의 입술에 갖다 댔다.
소희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한이는 반사적으로 소희의 입술에 가져간 자신의 손가락에, 소희의 체온과 콧김이 느껴지자 민망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근데 이번에 온 사람들은 이제까지 왔던 다른 사람들하곤 좀 다르던데.”
자신과 일행에 대해 범식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자, 한이는 더욱 귀를 쫑긋 세웠다.
소희도 더욱 귀담아 들으려고 몸을 최대한 계산대 앞으로 기울였다.
비좁은 계산대 아래에서 소희가 몸을 기울이자, 자연스레 한이와 그녀의 얼굴이 맞닿았다.
무심코 저들의 대화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던 한이는 소희의 얼굴이 자신에게 닿자, 민망한 듯 소희로부터 조금 떨어지려다 그만 균형을 잃고 휘정거렸다.
무의식중에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의자를 잡으려던 한이는, 힘 조절을 못하고 너무 세게 의자를 잡아버렸다.
그 결과, 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강하게 끌리며, 끼익 거리는 시끄러운 마찰음을 냈다.
“거기 누구 있어?”
한이는 잽싸게 다시 계산대 아래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이미 하얀 옷의 사람들은 누군가 숨어있다는 걸 확신했다.
“거 누구야? 다 들었어. 그냥 나와.”
소희와 한이는 서로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였다.
결국 소희는 한이에게 여기 계속 숨어 있으라는 손짓을 한 후, 자신만 슬쩍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저에요.”
“아니, 아가씨가 여긴 왜?”
소희는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경계심을 무너트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살면서 63빌딩은 한 번도 와 본적이 없어서요. 그냥 너무 구경하고 싶었어요.”
범식과 정희는 잠시 미심쩍은 듯이 소희를 쳐다봤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소희에게 별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정희는 범식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한 뒤, 소희를 데리고 빌딩 밖으로 걸어갔다.
범식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소희 씨라고 했죠.”
“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아니, 괜찮습니다. 우리가 정한 규칙이란 게, 말 그대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정한 거니까요. 하지만.”
정희는 말을 멈추고 소희를 지그시 쳐다봤다.
소희는 일부러 눈을 피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첫날부터 이러시니 기분이 조금은 좋지 않네요. 그 문신한 분은 몰라도 소희 씨가 이러실 줄은 몰랐거든요.”
“죄송해요.”
소희는 계속 사과를 했다.
계속 되는 사과에 정희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소희를 돌려보냈다.
소희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그녀의 아파트 쪽으로 달려가자, 정희는 주머니에서 작은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치이이익!
“경비실 누구 있나?”
무전기 너머에서 누군가 응답을 해왔다.
“예, 큰어머니.”
“방금 상황 봤지?”
“네, 봤습니다.”
“저 여자 말로는 단순히 궁금해서 들어왔다던데.”
치이이익!
무전기 너머에선 잠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몇 초가 흐르고 다시 응답이 왔다.
“쥐새끼가 두 마리입니다. 암수 한 쌍이 들어왔었어요.”
“그래…, 그럼 수컷은 지금 뭐하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큰아버지 기도하러 올라간 거 층수 확인 하는 거 같은데요.”
“그래, 알았다. 승호야….”
“네, 큰어머니.”
“이번 사람들은 좀 다르다. 무슨 뜻인지 알지.”
치이이익!
“달라봤자 썩어빠진 인간이죠.”
“그래, 며칠 쉬게 해주려고 했는데, 하여간 인간들은 그 호기심이 문제야. 승호 네가 알아서 해라.”
“네, 큰어머니. 근데 참 웃기죠. 어떻게 매번 부탁한 걸 어길까요.”
정희는 승호의 말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서 인간인 거지.”
무전을 마친 정희는 63빌딩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물론 정희는 한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층수를 확인하고, 자신이 돌아오자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신께 제물로 바칠 정배와 예지가 자신들의 손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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