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1화 - 그날 오후 2시 (1부) NEW~~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한이는 오후 2시로 잡힌 면접시간에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다,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황급히 집을 나섰다.
평소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이상하게 오늘따라 한이의 발목을 잡았다.
면접에 늦어 마음이 급한 나머지, 어머니께서 나가기 전에 꼭 끄라고 신신당부하신 가스 불을 끄지 않고 그냥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느라 그는 몇 분을 허비했다.
다시 한번 집안의 모든 걸 점검하고 재빨리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갔지만, 아슬아슬하게 한이가 타야 될 버스는 그를 두고 떠나버렸다.
한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시 2분이라….’
목동에서 버스를 타면, 종로까지는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게다가 평일 오후 1시는 그리 차가 막히는 시간도 아니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2시 안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면접을 보는 날이면 늘 한이의 마음은 조급했다.
그는 벌써 1년 넘게 취직을 하지 못한 스물아홉 살의 백수였기 때문이었다.
학창시절의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단거리 육상 선수였다. 학생부 신기록은 물론이고, 아시아 신기록에도 가장 가까이에 다가갔던, 그야말로 슈퍼유망주였다.
전국에 유명한 체육대학교는 모두, 그를 입학시키려고 전쟁 아닌 전쟁까지 벌였을 정도로 강한은 최고였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무릎 부상은, 그의 기록을 더 이상 단축시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수년간 달리기만 해온 한이는 그렇게 한순간에 꿈을 잃어버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입대를 한 한이는, 제대 후에도 한동안 잃어버린 꿈 때문에 힘들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가장 원초적인 행복감을, 그는 어느 날 깨달았다.
꿈은 잃었지만, 새로운 꿈을 꾸기에 한이는 젊음이란 가장 강한 무기가 있었다.
그렇게 한이는 다시 일어섰다. 잠시 쓰러져있었던 그의 인생 초반에서.
잠시 뒤, 버스가 도착했다.
한이는 자신보다 늦게 온 할머니를 먼저 차에 태워드린 후, 자신도 버스에 올라탔다.
창밖엔 여름이면 늘 그렇듯, 뜨거운 햇빛에 인상을 찌푸린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길가 한쪽엔 토스트 파는 아주머니가 늦은 점심을 토스트로 때우려는 사람들을 위해, 손에 부리나케 빵을 굽고 계셨다.
버스와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지만, 그 고소한 버터향이 한이의 코를 강하게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내려서 토스트를 사 먹고 싶었지만, 그럼 한이는 여전히 백수생활을 이어 가야만 했다.
면접의 결과가 좋을지 안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 조금의 희망이라도 기대해봐야 하는 게 요즘 한이의 처지였다.
잠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던 한이는, 폰을 꺼내들고 이런저런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전세대란, 장롱 시신 발견, 오늘의 날씨, 차세대 한류스타는 누구? 같은 뉴스를 보다가 조회 수가 유독 높은 기사를 발견했다.
단독보도 신종 마약 '할루신' 유통 및 판매한 일당 검거
‘음, 한국도 갈수록 마약 하는 인간들이 늘어나네, 걱정이다.’
한이는 조금 찝찝한 마음으로 기사 내용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서울시에서 점조직 형태로 '할루신'이란 마약을 거래하던 조직의 두목 차성배를 비롯한 마약사범들이, 드디어 서울 남대문 경찰서 마약 전담반에 의해 전부 검거됐다는 내용이었다.
할루신은 최근에 독일에서 만들어진 마약으로 기존에 마약들보다 훨씬 강력한 환각 증세를 일으키고, 다량으로 복용할 경우 근육과 세포에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마약이었다.
마약 조직이 전부 검거됐다는 소식에, 한이는 그나마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목동에서 출발한 버스는 어느덧 충정로를 지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시내에 위치한 회사들의 면접을 자주 보러 다녀서 그런지, 이제 시내는 한이에게 꽤나 익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내만 나오면 한이의 마음은 늘 설레었다.
‘이제 거의 다 왔구나.’
목적지가 가까워져 오자, 한이는 슬슬 내릴 준비를 했다. 비틀거리는 버스 안에서 왼손으로만 균형을 잡으며,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그의 오른손에는 소중히 작성된 이력서가 들려있었다.
김준호는 어릴 적부터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으로 모두가 즐겁던 그해에, 7살의 어린나이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작은 아버지의 손에서 길러진 준호는 공부에도, 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혼자서 우울한 표정으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돌아 다녔고, 작은 아버지의 자식들이자 준호의 사촌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준호의 머리가 모자라거나, 행동이 모자란 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충격이, 늘 준호를 어둡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준호가 19살이 되던 해 겨울. 작은 아버지와 식구들에게 아무런 통보도 없이 준호는 집을 나갔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영등포역에서 노숙을 하며 며칠을 보내다, 그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의 이름은 차성배.
성배는 추운 겨울날 길가에 쓰러져 있던 준호를 살려준 은인이었다.
그는 준호를 근처 식당으로 데려가, 뜨거운 감자탕을 사주며 대화를 나눴다.
“넌 나이도 아직 어린 거 같은데, 이 날씨에 왜 노숙을 하냐?”
성배의 말투는 거칠고, 공격적이고, 건방졌다.
“그냥 집을 나왔는데요.”
감자탕을 깨작대며, 준호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 새끼, 보아하니 길바닥에서 얼어 죽을 일만 남은 거 같은데, 형 따라 갈래?”
준호의 눈에 성배는 그다지 착한 인상은 아니었다.
“형, 따라 가면 뭐하는데요?”
“야이 새끼야, 뭐 하는지 알아서 뭐하냐. 적어도 추운 날 길바닥에서 얼어 뒤지진 않을 거다.”
준호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상하게 그 남자에게 끌렸다. 그렇게 감자탕을 다 먹은 준호는 조용히 성배를 따라갔다.
차성배는 어렸을 때부터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생과의 싸움에서 가볍게 이겼으며, 중학교 1학년 때는 이미 영등포 근처 중학교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그의 키는 185cm를 웃돌았고, 어깨는 수영선수들처럼 드넓었다. 거기에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몸과 타고난 맷집까지, 그는 그냥 괴물이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체조건에, 후천적으로 싸움을 즐기기까지 했던 성배에게, 서울 서남부지역의 웬만한 고등학교 짱들은 한 번씩 도전장을 내밀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3분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성배는 다행히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양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늘 그를 가만두지 않았기에, 학창시절 내내 싸움질을 하고 다니며 부모님의 속을 많이 썩였다.
성배는 그렇게 문제 많고, 화려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버리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군대에 다녀온 뒤에도 그는 마땅한 일자릴 찾지 않고, 인생을 허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배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빨리 돈을 벌어야한다는 압박감이 그를 괴롭혔다. 허름한 식당을 하시는 어머니의 벌이로는 배고프고, 추운 나날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래서 성배는, 동네에서 자신과 친했던 선배의 밑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바로 마약 판매였다.
누구보다 뛰어난 일처리 실력으로, 그는 금세 선배에게 조직을 물려받았다.
성배는 그렇게 서울시 곳곳에 마약을 판매하는 조직의 보스가 됐다.
점조직 형태로 두세 명씩 짝을 지어 홍대, 신촌, 종로, 강남 등 번화가 근처에서, 그의 조직은 은밀히 마약을 판매해오고 있었다.
그런 성배를 따라간 준호는, 그의 밑에서 잔심부름 등을 하며 살다가 얼마 전 처음으로 할루신을 접하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과 두근거림.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더 이상 우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준호는 성배 몰래 할루신을 조금씩 빼돌려서 혼자 즐기기 시작했다. 때로는 조금, 때로는 과하게.
준호는 그 알 수 없는 기분 좋음이 너무 좋았다. 할루신이 몸으로 들어오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라고 느꼈다.
그래서 준호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다.
성배는 아직 어린 준호에겐 마약관련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들의 수사 선상에 오르지 않았고, 준호는 그 점을 이용해서 차성배와 조직원들의 마약 거래 장부와 은신처 등을 경찰에 신고했다.
조직원은 모두 검거됐고, 준호는 미리 빼돌려둔 마약과 돈을 갖고 시청 근처의 한 호텔에서 쾌락을 즐기고 있었다.
할루신은 5g으로도 10명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마약이었다. 준호에겐 50g이 조금 넘는 할루신이 있었다.
준호는 계속해서 할루신을 몸 안으로 넣었다. 코로 흡입하기도 하고 주사기로 살에 찔러 넣기도 했다. 방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기분이 좋다. 살면서 이렇게 좋은 적은 없었다.’
준호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할루신의 그 황홀함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겐 어릴 적부터 남다른 끼가 있었다. 귀여운 외모에 늘 밝은 미소를 지닌 그녀를,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웃으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창시절 그녀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고, 워낙 활발하고, 착한 성격 탓에 평판마저 아주 좋았다.
그렇게 그녀는 어릴 적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관심과 사랑은 그녀에게 특별한 꿈을 꾸게 만들어주었다.
대학을 가진 못했지만, 낮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저녁엔 연기학원을 다니며 연기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그녀는, 올해로 스물세 살,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아가씨 윤소희였다.
소희는 오늘도 알바를 하기 위해 편의점으로 출근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시간당 4900원.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이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어쩔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 들어서면 입구 좌측엔 잡지 진열대가 있고, 그 옆으로 길게 시식대가 있다. 시식대가 끝나는 부분에서 벽 쪽으로 전자렌지와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붙어있고, 그 옆으로 계산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계산대 앞과 좌측엔 과자 등 먹거리가 풍성하게 진열돼있고, 편의점 가장 안쪽엔 작은 사무실이 있었다.
편의점은 서울 광장 근처에 위치한 곳으로 크기는 작지만 언제나 손님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꼰대 같은 사장은 바쁜 시간에도 나와서 도와주는 법이 없어, 소희는 늘 혼자 정신없이 일했다.
이렇게 번 돈으로 소희는 저녁에 연기 학원을 다녔다.
평소엔 그나마 점심때가 지나면, 조금 한가해 져서 숨 돌릴 틈이 생겼다.
하지만 오늘은 근처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관계로 평소보다 손님들이 더 많았다.
점심을 먹고 편의점으로 밀려든 손님 러시를 한차례 끝낸 직후, 소희는 정신없이 멍 때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평소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풍경을 보는데, 오늘은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키는 꽤 커보였고, 인상은 차분하고 깔끔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정장 차림에 초조한 듯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손에는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소희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이력서라는 걸 눈치 챘다.
이 근처는 회사들이 밀집돼 있는 지역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닌다.
소희는 평소에도 많이 보는 광경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 남자는 더 눈에 띄었다.
평소 따뜻하고, 활기차며, 언제나 긍정적인 성격의 소희는, 누군지도 모를 그 남자를 보며, 마음속으로 면접이 잘 되길 빌었다.
그때, 손님 두 명이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그녀들은 근처 호텔에서 일하는 단골손님들이었다.
“난 커피 하나랑 과자 좀 살게, 넌?”
“난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먹을래.”
커피를 집어든 손님이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 말했다.
“근데, 너 그거 들었어?”
“뭐?”
“아까 지배인님이 그러는데 4층에 청소하러간 아주머니 한 분이 말도 없이 사라졌데.”
“응? 사라져?”
범상치 않은 그녀들의 대화에, 소희는 호기심이 생긴 듯 귀를 바짝 세웠다.
“어, 아까 11시쯤 4층에 청소 하러 갔는데, 하도 안 내려와서 올라가보니깐, 청소 카트만 복도에 있더래. 뭐, 급한 일 있어서 말도 안하고 간 건가…. 하여간 지배인님 좀 화났어.”
“아이고…, 오늘 몸 사리자. 지배인 눈에 안 띄려면 그림자처럼 지내야겠네.”
꽤 심난한 표정으로 말하는 여자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실소를 머금고 대꾸하는 여자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고, 계산을 마친 그녀들은 서둘러 편의점을 빠져 나갔다.
소희는 마음속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아주머니 걱정을 하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도 오늘은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알바에 지친 소희도 창밖의 사람들처럼 거리를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편의점에서 나갈 수 없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당장은 열심히 알바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운 날씨에 부쩍 힘이 들었던 오늘.
페스티벌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많은 손님이 찾았던 오늘.
유난히 그녀의 눈에 보이는 창밖의 풍경은 너무 맑고, 너무 아름다웠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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