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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자국 (69)화 (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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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윤이가 겉은 무뚝뚝해도 속으로는 너 많이 생각해.”

“퍽이나. 무뚝뚝한 게 아니던데 언니한테 하는 거 보면?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야. 나중에 결혼하고 변하면 어떻게 해.”

병실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우를 잡으라고 종용하던 강태윤의 그 소름 돋던 모습을 은하는 애써 잊으려 했다. 제 오빠의 집착을 은하는 처음으로 마주했기에 그게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서우가 진짜 가족이 되면 저에겐 더 좋았다. 그래도 그건 제 욕심이고, 서우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은하가 나 많이 걱정하는구나.”

여전히 서우를 보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고 아팠다. 죄책감이 크게 자리할 때는 과연 이렇게 얼굴을 맞댈 자격이 있나 싶었다. 스스로가 뻔뻔하고 기가 막혔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모른 척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해 주는 그녀에게 기댔다.

“언니가 내 걱정 많이 하니까.”

아직은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걸음 앞으로 갈 때마다 망설이게 된다.

서우의 짧은 침묵을 느끼곤 은하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래도 태윤 오빠가 좋으면 언니 마음 가는 대로 해. 하긴, 변하지는 않겠다. 누가 변할 마음 가지고 회사를 인수해?”

“회사를 인수하다니?”

“오빠 성격에 그랬을걸. 언니, 몰랐어?”

그런 것 같아서 은하는 득달같이 회사에 쫓아간 거였다. 강태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서.

“에이, 태윤이가 그랬으려고.”

젖을 다 먹인 아이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자 귀여운 트림을 했다. 모든 게 신기하다.

자신의 일상에 이런 귀엽고 신기한 존재가 함께한다는 게 서우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은하의 말을 들어 넘겼다.

“언니가 좋으면 됐어. 뭐… 방금 이야긴 안 믿어도 어쩔 수 없고. 나야 둘이 결혼하면 진짜 가족이 되는 거니까. 사실 언니가 오빠 좋아하고 오빠도 같은 마음이면 괜찮아.”

태윤의 그런 성정을 우려하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정말 서우와 가족으로 묶인다는 것 자체가 은하는 좋았다.

“내가 정말 그래도 될까.”

“그래도 돼. 내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은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엄마를 가슴에 품고 죄책감 역시 전부 평생 품고 가야 할 것투성이다. 그런 저도 살아 내는데 서우라고 못 할 것 없다. 항상 동생 같던 그녀의 그런 단호한 발언에 마음이 술렁였다.

누군가 답이 없던 문제지에 크게 대신 답을 써 준 거나 다름없다.

“정말 네가 애가 둘이나 있는 게 맞나 봐.”

서우의 말에 은하가 웃는다. 그럼 자기가 아직도 아가씨인 줄 알았냐고 괜히 투덜거린다.

이렇게 차츰 서로가 나아지리라고 생각했다. 다음에 보면 조금 더, 그다음은 조금 더 가까워지리라.

“선생니임~”

유치원을 마치고 돌아왔는지 한솔이가 불쑥 열린 방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노란 유치원 모자를 쓴 깜찍한 아이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다.

“우리 아기, 손은 씻었어?”

“네에. 그런데 한솔이는 이제 아기 아닌데. 아기는 여기 있는데.”

은하의 물음에 한솔이 아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작고 통통했다. 서우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풀어진다.

너무 귀여웠다. 은하를 닮아서 애들이 다 예쁘고 잘생겼다. 두 팔을 벌리자 조르륵 달려와 서우의 품에 답삭 안겨 자동으로 볼에 뽀뽀까지 해 준다.

갓난아이와는 다르지만 역시 아이 특유의 포근한 냄새에 마음이 진정됐다.

“이렇게 애 좋아하는 거 보니까 언니도 결혼해야겠다.”

은근히 은하가 결혼 이야기를 다시 올린다.

“네 애들이니까 이쁜 거야. 진짜 예쁘게 생겼잖아.”

“아이참.”

기가 막혀서 입으로는 타박해도 은하가 좋은 티를 감추지 못했다. 여전히 서우의 눈에 자신이 예쁘게 보이는 게 좋았다.

이런 걸 바랐다.

은하와 이렇게 마주 보고 웃는 것만으로 서우는 제 바람을 이뤘다는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나려 했다.

“나도 이제 강해지려고. 남들 시선 신경 안 쓸 거야.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러면 언니가 상처받잖아.”

희주와 지형에게 은하가 먼저 말했다.

엄마의 사고에 서우는 관련 없다고. 상세하게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걸 이야기하며 비난받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전부 제 손을 잡아 줬다. 그걸 마음에 안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지형은 울었다. 희주는 그렇다고 서우에게 한 네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다고 따끔하게 혼을 내고 힘들었겠다며 안아 줬다.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안 좋은 관계만 이어 가려고 했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늦게 알았어. 좋은 사람들은 내가 아픈 거부터 알아차려 준다는 걸.”

창피한 시선에만 급급했다. 은하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서우에게 말한다. 이제부터라도 제 잘못을 바로잡을 거라고.

그래야 두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서우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될 수 있단다.

“그래, 은하야. 우리 아프게 하는 사람들 보지 말자.”

은하가 제법 씩씩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아프면 서로 잠시 기대기로 했다.

“네!”

은하 대신 품에 있던 한솔이 힘차게 대답한다. 눈물이 글썽인 채로 둘이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전부 잊었다.

지금은 그저 사랑에 전념할 때였다.


 

***


 

차를 보내 주겠다는 그와 길이 엇갈렸다.

택시를 타고 태윤의 집에 도착한 서우가 익숙한 비밀번호를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사에 출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집주인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만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대부분 서우가 다음 날의 옷을 챙겨 바로 가면 하루쯤은 서로 보지 못했다.

익숙하게 주방으로 가서 오늘 태윤이 저를 위해 준비한 요리는 뭐가 있는지 냉장고를 열어 봤다.

연어 샐러드와 데우기만 하면 금방인 이탈리안식 뇨끼가 보였다.

배부르게 은하의 집에서 먹고 왔는데도 궁금해서 꼭 열어 보게 된다. 매번 태윤은 이렇게 서우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 놨다. 혹시라도 제 집에 들렀다가 아무것도 없어 배를 곪을까 봐.

그런 그의 배려가 집 안 곳곳에 있었다.

여전히 집 안 어디서나 문을 열면 볼 수 있는 곳에 제 하프가 놓여 있다.

언제라도 서우가 마음이 내킬 때 켤 수 있게 준비돼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 그냥 태윤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그립거나 아프지 않았다. 계속 괜찮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다가 이제는 정말 괜찮아졌다.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넓은 집을 바라봤다.

강태윤의 손은 거의 나았다. 얼마 전 깁스를 풀었다. 어느새 서우가 손가락으로 식탁 위를 툭툭 두드렸다. 매번 그러는 태윤으로 인해 제 버릇이 됐다.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알림이 들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관 앞으로 조르르 달려간 그녀가 곧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맞았다.

“안녕, 태윤아.”

제대로 불을 켜고 있지 않아 그녀가 없는 줄 알았던 태윤이 잠시 서서 멍하게 바라본다. 이내 가방을 바닥에 그냥 던지곤 서우를 당겨 안았다.

몇 시간 전에 봐 놓고 이렇게 좋을까. 자신도 그가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반겨 주진 못할 것 같다.

“없는 줄 알았어.”

“오늘은 요리 뭐 해 놨나 보고 있었어.”

“매번 옷만 가지고 그냥 가 버리니까.”

태윤이 그렇게 대답하자 어쩐지 자신이 매몰차 보였다. 그와 마주 안아서 넓은 등을 찬찬히 쓸어 주며 서우가 멋쩍게 웃었다.

“밥은 먹었어?”

“아직.”

또다. 꼭 자신이 물어보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대답이 주로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그가 만들어 둔 걸 꺼내 놓고 태윤에게 씻고 나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제가 만든 요리도 아닌데 그에게 생색만 내는 것 같다.

전자레인지에 뇨끼를 데우고 샐러드를 차려 놨다.

적당히 먹기 좋게 뜨거운 음식이 식었을 때쯤 태윤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오늘은 은하 집에서 밥 먹으니까 안 만들어도 된다고 했잖아.”

“네가 낮에 왔다가 배고플까 봐. 그런데 주지형 공연 보러 갈 줄은 몰랐지.”

이렇게 뒤끝이 길다. 한숨과 함께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먹으라고 포크를 태윤의 앞으로 밀었다.

“마지막 공연인데 보고 싶었어.”

서우의 말에 태윤이 포크를 들었다가 떨어트렸다. 대리석 식탁 위로 떨어져 꽤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에게 태윤이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편다.

“아직 힘이 안 들어가.”

“그럼 왼손으로….”

어차피 젓가락이 그렇게 필요한 음식은 아니라 다른 손으로 먹으라고 하려다 태윤이 지그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먹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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