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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발자국 (47)화 (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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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에 필요한 모든 걸 약속하고, 서우가 살아가는 데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말하는 주 회장을 그저 멍하니 내려다봤다.

한참의 시간 뒤에 힘겹게 일어난 그가 병실 문을 나설 때까지 서우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새벽이 지나가기 전에, 오늘이 발인이라는 말이 겨우 생각나서 손등에 박힌 바늘을 뽑았다.

핏자국이 하얗고 깨끗한 시트 위에 튀는 것도 모른 채 맨발로 뛰쳐나갔다.

별관 바깥까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서우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맨발의 발등 위로 얼음 같은 빗물이 떨어졌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몸이 금세 흠뻑 젖었다.

어둠 속에 숨어서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장례식장을 바라봤다.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나타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주 회장의 말.

서우가 빗물에 무거워진 제 두 손을 바라봤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해 보지 않은 절을 했다. 선생님이 어느 방향에 계시는지 몰라 장례식장을 바라보면서 빗물과 오물투성이인 바닥에 고통뿐인 손을 대고 이마를 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하죠.

선생님이 알려준 길로만 갔다. 그런데 그 길이 끊겨 보이지 않는다.

주변이 막막했다.



 

주 회장이 언젠가 무릎을 꿇었던 그곳에 주저앉아서 서우가 병원이 싫다고 말했다.

손이 많이 아팠다. 그때를 떠올리자 손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또다시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그녀가 상체를 웅크리고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 태윤아. 나 손 잘못되면 어쩌지? 나 그럼 어쩌지?”

그럼 나 어떻게 살아.

서우가 아프다고 말했다. 방금까지 멍이 든 거라며 괜찮다고 나가자던 서우가 별안간 주저앉더니 손이 아파서 견딜 수 없다고 다 샌 목소리로 운다. 열 손가락을 절망적으로 내려다보면서 쥐지도 펴지도 못한 채 발발 떨어 댔다.

태윤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손을 내민 서우의 손을 멀쩡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떨림이 고스란히 저에게까지 느껴졌다.

“괜찮아. 네가 잘못되면 나도 잘못될 테니까.”

이제 혼자서만 그 길을 걷게 하지 않겠다. 태윤이 꿀이 떨어질 듯 달콤하게 서우를 달랬다.

그녀의 눈물에 당황하지 않고 다정하게 서우에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손가락을 전부 부러트려서 윤서우가 안심하면 그리할 생각이었다.

“네가 왜?”

“몰랐어? 이렇게 눈치 없어서 내가 갈 길이 머네. 서우야, 내가 널 좋아하잖아. 좋아하니까 나는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어.”

너 대신.

태윤의 입 모양을 보면서 서우가 겨우 떨림을 멈췄다.

여긴 옛날의 그곳이 아니다. 밖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지 않고 멀쩡했다. 그리고 그때는 없던 강태윤이 이제는 제 앞에 있었다.

“병원이 싫으면 응급실에서 치료만 받고 가자. 그건 괜찮지, 서우야?”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어르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뼈에는 이상이 없고 멍이 심하게 들어 간단한 응급 처치만 하고 바로 나왔다.

병원 특유의 냄새를 서우가 질색했기 때문이다. 어쩐지 기운 없고 넋이 반쯤 나가 있는 서우를 태윤은 당연하게 제 집으로 데려왔다.

타인으로 인해 태윤의 집이 부산스러웠다.

뭔가를 옮겨 놓고 나가는 인부들과 집 앞에서 마주쳤다. 아무래도 텅 빈 집이나 다름없어 그가 주문한 물건이겠거니 별생각 없이 태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거실에 도달했을 때였다. 서우가 물러났다.

겁을 잔뜩 먹은 사람처럼 물러나다가 작은 등이 벽에 닿는다.

한쪽으로 놓여 있는 피아노 옆, 거실의 정 중앙에 은하의 집에 있었던 제 하프가 놓여 있었다.

엉망으로 켜 놓고도 그냥 너무 좋아서 혼자서 웃음이 나왔다. 굳은살 없이 말랑말랑해진 제 손가락 끝에 엉기는 현이 주는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처음부터 제자리였던 것처럼 하프가 놓여 있었다.

태윤이 아끼는 피아노는 옆으로, 그리고 창을 바라보며 유려한 곡선을 뽐낸 신의 악기가 고즈넉하게 서우를 기다렸다.

“왜 이게 여기 있어?”

“네 거잖아.”

“은하가….”

선생님의 마지막 유품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건 많아. 다만, 네 속을 뒤집고 싶어서겠지. 네가 그리워서거나.”

자신은 다가가지도 못하는 것에 태윤이 거침없이 갔다. 그리고 하프의 어깨를 쓸어 올리며 서우를 바라본다. 그의 행동이 마치 이곳에 앉을 주인을 기다리는 듯했다.

담담하게 서서 그녀가 제 발로 걸어오기를, 곁에 나란히 서는 순간을 얌전히 주시하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커다란 덫으로 서우를 유혹하고 꾀어낸다.

가장 갖고 싶은 걸 흔들어 대면서 태윤이 역광을 뒤집어쓴 채 선득하게 웃는다.

네가 가장 바라는 게 나에게 있어. 어떻게 할래?

소리 없는 물음이 서우에게 던져졌다.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여기 들어온 순간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늘이 드리워진 그의 마음에 윤서우는 가장 아끼며 숨겨 놓고 싶었던 따스한 빛이었다. 진작 부서지고도 남았을 제 가족이란 이름이 윤서우로 인해 유지되고 있었다는 걸 안다.

착해 빠져선.

“여기로 와, 서우야. 너 좋아하는 거 여기 다 있잖아.”

피아노와 못내 놓지 못하던 하프, 그리고 그녀가 좋아한다는 말조차 꺼내 보지 못하는 저까지.

전부 이 자리에 있지 않냐고 태윤이 서우를 설탕 같은 말로 꾀었다.

그녀를 선망하게 하는 무대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가끔 윤서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게 해 줄 수는 있다. 해가 서우의 머리 위를 내리쬐면 하프를 켜는 이마를 그가 가려 주리라. 이곳에서 햇살에 눈을 찌푸리는 윤서우를 보고 있었다.

제 손이 필요해서 난처한 얼굴로 콧잔등에 잔뜩 주름이 가겠지.

“처음부터 여긴 네 자리였어.”

가장 볕이 잘 들고, 고즈넉한 곳을 찾았다. 물가는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고 하니 그런 곳을 피해 윤서우가 좋아할 만한 곳을 태윤이 찾았고, 이곳은 그가 세심하게 고른 그들의 집이었다.

거실에는 아무것도 두지 말고 너를 위한 것만 두어야지.

“태윤아.”

서우가 멀리서 그를 불렀다. 좀 더 좁은 집을 살걸.

윤서우의 집은 이보다 더 황량해도 붙어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태윤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너는 나 보면서 선생님 생각 안 나겠어? 괜찮겠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은하 마음 아프게 하면서까지 내가 네 옆에 있고 싶지 않아.”

주 회장이 뭘 걱정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족을 찢어 놓으면서 자신이 얻는 건 없다.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서우에게 태윤과 은하는 전부였다. 자신으로 인해 둘의 사이가 멀어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걔도 알 건 알아야지. 누구 때문에 그래도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있는지.”

“하지 마.”

“너는 버티는 일을 은하라고 못할까. 우리를 얼마나 약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는 거야.”

무게를 짊어지고 혼자서 버틴 서우를 씹어서 삼키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진작 그렇게 했다. 차라리 제 속에 있는 게 안전할 것 같아서.

“…지금도 은하 눈에 나를 보면 애정이 있고, 애증이 있는데. 거기에 죄책감까지 더할까?”

어차피 시간이 많이 지났다. 이제는 다 부질없었다. 다시 후벼 파야 할 상처라면, 그냥 하나라도 덜 아픈 게 낫다.

“서우야, 그럼 나는?”

태윤이 하프의 어깨에 한쪽 얼굴을 기대고 짓누르면서 물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스르르, 아래로 향한다. 자신이 먼저 발견했는데, 손을 잡고 끌어당겼는데 윤서우는 끌려오지 않는다.

나의 위안.

“너까지 제발 이러지 마. 그냥….”

“은하는 어차피 나 없이 잘 살 거야. 나 하나 없어져도. 네가 그렇게 무서우면 우리 같이 손잡고 다른 데 갈까?”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우와 함께 걷는 인생도 태윤은 좋았다.

어차피 그가 갖고자 욕심부려 본 건 윤서우뿐이었다. 음악도, 회사도, 전부 어머니가 원한 것에 따랐다.

“나는 혼자가 편해.”

처음부터 혼자 있었던 사람처럼 윤서우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나 혼자만 생각하면 되니 생각보다 편하고 좋았다.

“혼자가 편한 사람이 어디 있어. 난 같이 있고 싶어서 죽겠던데.”

서우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물러날 데 없이 물러나 벽에 딱 달라붙어 있는 그녀를 보면서 태윤이 조금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꾀어도 넘어오지 않으니 그가 갈 수밖에 없다. 능글맞은 소리를 하면서 다가오는 태윤이 두려웠다.

“윤서우, 너는 네가 지금 사람 사는 꼴로 산다고 생각해?”

다가온 태윤이 웃으며 물었다.

생활감이라도 있었으면 윤서우가 저를 떠나고, 그래도 혼자 잘 살아가서 조금 서운해도 다행이라 여겼으리라.

이렇게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나름의 행복을 찾은 윤서우를 꾀어서 다시 저를 보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매트리스 하나에 정말 잠을 자는 공간이 전부인 곳을 보면서 태윤은 초조해졌다.

전부 버리고 갈 수 있는 것들뿐이라, 애정이라곤 없는 공간이라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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