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41)화 (4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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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의 집에 도착해서 차 밖으로 나온 서우의 눈과 코가 빨개져 있었다.

계속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의 미라에게 괜찮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걱정했다. 조금 떨어져 재채기를 하고 있자 한솔이의 손을 잡고 은하가 나왔다.

“둘이 같이 왔어?”

“은하야, 어떻게 해. 나 때문에… 꽃가루 알레르기 있으신가 봐.”

“아….”

서우가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빨개진 두 눈을 보면서 은하가 꽃을 한 손에 받아 들었다.

어쩐지 자신이 그들을 곤란하게 하는 것 같아 서우가 떨어져서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어쩐지 정원이 분주했다.

원형 테이블이 곳곳에 있었고, 자신이 거실에서 봤던 하프와 그랜드피아노가 설치된 게 보였다. 작은 공연이라도 있는 듯 보였다. 한쪽에서 호텔 주방장들이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어쩐지 올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 서우가 그제야 미라와 은하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가든 파티에 어울리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한솔이까지 예쁘고 앙증맞은 드레스를 입고 서우를 보며 웃는다.

“내가 잘못 왔나 봐. 다음에 다시 올까?”

“아니야. 언니도 다 아는 사람들일 거야. 오늘 지형이가 온다고 했거든. 다들 지형이 연주 듣고 싶다고 해서 작게 모였어.”

호텔에 있을 지형이를 생각하자 서우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 얼굴을 피해서 왔더니 여기에서 다시 마주쳐야 할 운명이었나 보다.

한솔이 은하의 손을 놓고 서우에게 와서 배꼽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오~”

“한솔이 잘 있었어요?”

“네에.”

빨개진 코로 서우가 웃었다. 당황도 잠시, 이렇게 아이가 예쁘게 웃으니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왔다.

한솔이의 얼굴을 샅샅이 보면서 은하의 어린 시절을 찾아낸다. 별처럼 맑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 사람들 오기 전에 난 한솔이 데리고 놀고 있을게. 집에 들어가도 돼? 그때처럼 거실에 있을게.”

또 미니 하프를 가지고 놀면 시간이 금세 갈 게 분명했다. 이들의 만찬에 자신이 끼는 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은하 역시 드레스 코드를 알려 주지 못했으리라.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게 싫어서 서우가 한솔이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은하에게 물었다.

“언니가 보기 싫으면, 뭐. 그렇게 해.”

사실 토요일의 가든 연주회 일정은 예전부터 잡혀 있었다. 그걸 굳이 서우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토요일에 꼭 오라고 했던 것도 미라와 태윤의 사이를 서우 앞에서 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윤서우가 첫사랑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지형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서였다.

그럼 차이가 좀 보이지 않을까.

태윤과 미라가 함께 서면 제법 괜찮은 투샷이 나오리라.

이곳에 올 모두가 내로라하는 집안들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나 다 같이 어울렸던 거지, 이제는 서우가 낄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은하는 그걸 서우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임에도 서우를 달마다 불렀다.

하지만, 매번 꿋꿋이 수수하게 나오는 모습을 보고 눈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불편해도 이번 기회로 어린 시절 함께 어울리던 모두가 이제는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됐다는 걸 서우가 깨달았으면.

여기서 서우를 반길 이는 유럽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주지형뿐이다.

차라리 제 오빠보단 사촌인 주지형에게 떠넘기려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저렇게 그냥 말갛게 서 있는 서우를 보자니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주지형도 윤서우에게 실망하면 이 가든 파티 자체가 윤서우를 조롱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테니.

“애는 잠깐 시터한테 맡기면 돼. 따라와. 나 입었던 드레스 몇 개 있어.”

서우는 검은 슬랙스에 흰색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저러고 있으니 호텔에서 부른 웨이터들과 모양새가 비슷해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냥 저 모양새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이 연주회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은 저에게 화살이 돌아올까 봐서다. 그래서 옷을 빌려주는 것뿐이라고 애써 은하가 생각했다.

“괜찮아. 어차피 나 금방 갈 건데.”

“오랜만에 지형이도 오는데 언니도 인사해야지. 언니가 그러고 있으면 내가 뭐가 돼. 내 얼굴이 뭐가 되냐구.”

은하의 싸늘한 말에 서우가 난처하게 머뭇거렸다.

괜히 제 손을 잡고 있는 한솔이의 작고 보드라운 손만 만지자 먼저 쌀쌀맞게 따라오라며 뒤돌아 가 버린다.

“그래요, 비서님. 사람들 올 텐데 좀 그렇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고집을 부려 봤자 이 연주회의 주최자인 은하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서우가 한솔이의 손을 놓고 은하의 뒤를 따랐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거기에도 케이터링을 테이블마다 차려 놓은 게 보였다. 거실 창문을 전체 개방해 자연스럽게 그곳을 통해 안쪽으로도 들어올 수 있었다.

“꽃병에 꽂아서 2층 거실 테이블 한쪽에 올려 주세요.”

은하가 들고 있던 꽃을 메이드에게 맡기며 말했다. 그리고 서우를 제 드레스룸으로 데려간다.

2층에 따로 있는 드레스룸에는 행사별로 맞는 옷차림들이 따로 걸려 있었다. 화려한 장신구들이 있는 칸이 있었고, 구두와 가방 등이 보관돼 있는 방은 따로, 그리고 옷들이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쪽이 나 애 가지기 전에 입었던 옷들. 여기서 하나 알아서 입어. 화장품은 저쪽에 있어.”

그러고 드레스룸을 나가려는 은하를 서우가 불렀다.

“은하야.”

은하가 자신을 돌아봤다. 서우가 가만히 그녀를 보며 웃는다.

“왜 그렇게 불러 놓고 웃어?”

“그냥. 너 얼굴 보니까 좋아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이런 건 잠깐 잊어버리고 그냥 이런 강은하가 좋았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으면서 결국엔 자신이 신경 쓰여 이렇게 제 것을 내어 준다.

심술을 부릴 거면 끝까지 부려야지.

“…언니는.”

“응?”

“아냐, 됐어.”

잠시 머뭇거리던 은하가 곧 밖으로 나갔다. 옷을 고르는데 제 손에 바른 화장품이 신경 쓰였다. 파우더룸 옆에 있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자 차가운 물에 손이 붉어져 상처가 오늘따라 유독 눈에 들어왔다.

서우가 상처 부위를 쓸어 봤다.

눈동자가 침전물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이 낯설었다. 분명 윤서우, 자신인데 생기라곤 없다. 멍하니 거울을 잠시 보면서 바깥에서 들리는 분주한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언니, 이거 알레르기약.”

문이 다시 열리고 은하가 거울을 보던 서우를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흉터가 있는 젖은 손등을 반대쪽 손으로 감쌌다.

“고마워. 마침 안 가지고 왔었는데.”

반듯하게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는 서우에게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태윤의 말이 떠올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서우는 꼭 죄라도 지은 것처럼 가끔 이런 자세로 서 있을 때가 있었다.

갑자기 다가온 은하가 서우의 손목을 낚아챘다.

“은하야!”

“…나 이런 거 못 본 거 같은데.”

“대충 가리고 다녔으니까.”

물에 닿아서 어쩐지 더 도드라져 보인다. 평소엔 괜찮았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화장품으로 덮었을 때 많이들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대부분 손가락 옆쪽이나 안쪽에 자국이 있었다.

“다쳤어?”

“아, 옛날에 잠깐 부주의해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리고 은하가 잠시 미간을 좁혔을 때 서둘러 더 보지 못하도록 손을 빼냈다.

“이것 때문에 하프 그만둔 거야?”

“아니.”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 대답을 은하가 믿는 것 같지 않자 서우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냥 하프는 내가 그만뒀어. 더 하기에도 염치없고.”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더 돈이 많이 들어가는 하프를 할 수 있겠냐고 하는 서우의 변명을 은하가 가까스로 이해한 듯했다.

가린 손으로 자꾸 시선이 향하려는 은하를 보면서 그녀가 분명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다시 보여….”

“은하야,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누가 신경 쓴대? 그냥… 이상하니까 그러잖아.”

은하가 날카롭게 외쳤다. 깊숙이 찌푸려진 미간의 주름이 신경 쓰였다. 뭔가를 떠올리려고 하는데 잘되지 않자 헛헛한 숨만 나왔다.

서우의 손을 본 순간 뭔가가 제 기억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떤 파편이 그대로 박힌 채 주욱, 찢기는 선득한 감각이 든다.

괜찮다고 잔뜩 인상을 쓴 이마를 쓸어 주려 했는데 순간 놀라서 그대로 은하가 서우의 손을 쳐 냈다.

쫙.

뺨이라도 맞은 소리가 난다. 아프지는 않았는데 소리에 서로 놀랐다.

“미, 미안해. 너무 놀라서.”

“괜찮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마. 왜 자꾸 과거 일을 꺼내려고 해, 은하야.”

“내가 무슨 생각 했는데?”

은하의 말에 서우가 서글픈 눈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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