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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들이 묵는 스위트룸이었다. 각국의 정상들이 왔을 때나 개방되는 방을 주지형이 쓸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호텔이 EA 계열이기도 했고, 그가 쓰던 것과는 다르지만 스위트룸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 언제 어느 때나 연습실에 가기 전까지 손을 풀 수 있어서다. EA와 솔음은 그만큼 주지형의 이번 공연에 신경 쓰고 있었다.
태윤 역시 아무리 깨끗하게 정돈된 채여도 주지형이 묵는 방에서 서우를 재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머무는 메인 침실 외에 게스트 침실에 술에 취해 잠든 그녀를 누였다.
드러난 동그란 이마에 제 손바닥을 잠시 올려놓자 그게 시원했는지 서우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부볐다. 그러다 홧홧하게 술김에 열이 오른 제 열기에 금세 손이 미지근해진 것을 느끼고선 금세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 과정을 태윤이 부드러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누나 이제 하프 안 켜는 거 알아?”
“알아.”
누구보다 잘 안다. 성마른 침을 삼키며 태윤이 싸우듯이 대답하자 문가에서 기대서 있던 지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의 첫사랑이기도 했지만, 그때의 서우는 모두의 첫사랑이었다.
똑 부러지고 상냥하고 무엇보다 빛이 났다. 그녀의 처지를 비웃는 사람들을 도리어 비웃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당당했다. 그런 면에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끌렸다.
아무리 타인이 깎아내리고 비웃어도 사라지지 않는 재능과 열정이 있어서이리라.
“손은 왜 그래? 누구 때렸어?”
당연히 지형은 태윤이 누군가를 때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장례식장에서 차가운 분노를 터트리고, 유럽까지 저를 찾아와 윽박질렀던 걸 떠올리면 그러고도 남았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지형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글쎄.”
마취가 풀리는지 통증으로 손가락이 지끈거렸다.
“누나는 여전히 예쁘더라. 찾았으면 좀 말을 해 주지.”
“숙모님도 이야기 안 하시는 걸 내가 왜.”
“엄마가 안다고?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지형이 놀라서 물었다. 그러다 이내 매번 통화를 할 때마다 그놈의 피아노 때려치우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연락을 안 한 지 꽤 됐다는 걸 깨달았다.
머쓱한 얼굴로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가서 피아노나 쳐.”
“내가 왜?”
“달빛. 서우가 좋아해.”
그러니까 나가서 피아노나 치라는 말에 지형이 황당하게 입을 벌렸다.
저 털끝도 타인이 쓴 걸 같이 쓰지 않는 완벽주의자가 왜 제 방으로 오나 했더니 스위트룸에만 있는 피아노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무슨 피아노 치는 기계로 여기는 것 같다.
손만 다치지 않았어도 태윤이 직접 쳤으리란 건 불 보듯 뻔했다.
“어차피 누나는 듣지도 못할 텐데.”
서우에게서 시선을 돌린 태윤이 묵묵한 눈으로 지형을 바라봤다. 곧 그의 입술에서 닥치고 그냥 가서 치라는 말이 나올 게 분명해 얌전히 응접실로 나갔다.
손을 푸는지 피아노 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치는 소리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음이 들렸다.
서우의 밤이 편안하길 바랐다.
타인의 손을 빌린 자장가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제 손은 자신이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잘 자.”
대답이라도 하듯 베개에 얼굴을 묻는 그녀를 보면서 태윤이 밤 인사를 건넸다.
***
푹신한 침대가 꼭 수렁처럼 몸을 끌어당겼다. 너무나도 안온한, 오랜만에 느껴 보는 편안함이 좋아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방에 있는 매트리스는 스프링이 나가 엉망이고, 제 친구는 이렇게 부드럽고 바삭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태윤의 방은 아니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울렸다.
어딜 봐도 호텔 방이었다. 마지막 기억이 호텔 바였다는 걸 기억해 내면서 서우가 재빨리 옷부터 살폈다. 다행히 옷은 그대로 입고 있었는데 당황스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쏴아아아-
욕실 쪽에서 씻는 물소리가 뒤늦게 귀에 들려왔다.
왠지 상대방이 나오기 전에 먼저 떠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감에 테이블 위에 있는 제 가방을 찾아 그 방을 나왔다.
그리고 응접실의 그랜드 피아노와 널려진 악보를 보는 순간 누구의 방인지 짐작됐다.
“…미치겠다.”
아무 일이 없었더라도 제 부주의였다. 막 씻고 나오는 주지형과 얼굴을 맞댈 자신이 없어서 서우가 재빨리 문 앞에 있는 신발을 거꾸로 신다시피 하고 호텔 방을 나섰다.
지금 언론이 주목하고 있는 연주자라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괜히 강태윤이 신경 쓰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는데 배터리가 나갔는지 꺼져 있었다.
강태윤이 혹시 자신에게 전화를 했을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늦은 밤까지 지형과 둘이서 술을 마실 때조차 없던 연락이 새벽에 왔을 리 없다.
연락이 올 거란 기대가 아니라 그냥 어제의 강태윤의 목소리가 이상해서 계속 신경 쓰이는 거라 여기며 애써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도착하자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은하의 집에 가면 시간이 엇비슷하게 맞을 듯했다.
급하게 씻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손등에도 혹시 몰라 화장품을 발랐다. 손을 씻고 난 뒤 다시 덧바를 것도 챙겼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서우가 휴대 전화를 충전할 생각도 못 하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이상하게 계속 쫓기듯이 정신이 없었다.
한남동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 뒤에야 좌석 제일 끝에 앉아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무슨 얼굴로 보지….”
은하에게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태윤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약속했다. 며칠 전에 그와 보냈던 밤이 양심에 걸려 자신도 모르게 태윤을 피해 다녔다.
이제야 피하던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 된 것 같아 좌석 뒤편에 머리를 그대로 쿵, 박았다.
한번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치기엔 그날 이후 눈에 띄게 태윤의 태도가 달라졌다.
보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애써 그를 피하는 서우를 안다는 얼굴로 가끔 눈이 마주치면 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꼭 연애를 하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다.
말랑말랑한데 불안하고 외면하고 싶은 양가 감정이 충돌한다.
창밖으로 빠르게 바뀌는 풍경을 보면서 서우가 입 안쪽 연한 살을 깨물었다.
자신이 뱉은 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그 밤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은혜도 모르는 애가 맞다. 그래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에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강태윤과 보낸 밤이 좋았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를 보면서 자신이 정말 강태윤을 좋아했던 게 떠올랐다. 강태윤이 여전히 좋은 이유는 그를 보면 그 옛날의 윤서우가 생각나서다. 설렘만 갖고 온통 마음이 들떴었던 어린 날의 자신이 가졌던 그 감정이 되살아나 숨을 쉰다.
그날의 어린 윤서우는 살아 있었다. 그걸 지금의 강태윤에게 확인받은 것만 같아서 서우는 지난 밤이 좋았다.
어느 기억 한 자락에 그대로 고스란히 넣어 놓고 싶을 정도로.
가끔 삶이 너무 힘들 때 꺼내 보고 싶을 그런 밤이었다.
- 이번 역은 한남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안내 방송이 나오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은 채 다시 뒤죽박죽해선 지하철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레슨은 안 되겠다고 은하한테 말해야지.”
스스로 결심하듯 입 밖으로 꺼내 말했다. 마음으론 어느 정도 결심을 내렸다. 알게 모르게 서우는 주변을 정리해야 한다고 막연하게 여겨 왔다.
비가 오면 그때마다 상처가 아프다는 은하를 알면서 주 회장의 부탁이란 걸 핑계로 너무 이 주위를 서성였다.
정말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제안이 아니다.
부정해도 마음속 어딘가가 양심을 찔렀다. 은하를 다시 볼 수 있고, 나아가선 언젠가 강태윤을 다시 볼 수 있어서 그 저택에 다시 드나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들이 안녕한지 눈으로 봐야 마지막으로 정리가 될 것 같아서다.
지하철역에서 은하의 집까진 꽤 오래 걸어야 해서 서우가 햇빛 아래로 나왔다.
지나가던 차 한 대가 서더니 뒷좌석 창문이 내려갔다.
“저기요, 비서님 맞죠!”
밝은 목소리에 보니 은하의 친구인 미라였다. 가느다란 팔을 흔들면서 그녀가 반갑게 서우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은하 집에 가시는 거죠? 타세요.”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차 문이 열리고 미라가 안쪽으로 조금 옮겨 타서 서우를 배려했다. 어차피 목적지는 같아 결국 그 차에 탔다.
커다란 백합 꽃다발이 미라의 허벅지에 놓여 있었다.
“은하가 백합 제일 좋아하거든요.”
백합과 은방울꽃의 조화가 예뻤다. 선생님이 자신의 꽃가루 알레르기를 신경 안 쓰고 피아노 옆이나 하프 옆에 화병을 놔두면 은하가 죄다 뽑아 버렸다. 그래서 은하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서우는 알지 못했다.
백합을 좋아했구나.
금세 코가 간지러우면서 자꾸 재채기가 나왔다.
“콜록.”
참으려고 했는데, 생리적인 현상이라 서우가 숨을 크게 헐떡이자 미라가 깜짝 놀랐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창문 조금만 열게요.”
“혹시 알레르기 있어요? 어머, 어떻게 하지.”
“창문 열면 괜찮아요.”
서우가 창문을 열었다. 그럼에도 간지러움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기서 내려 달라고 하기엔 미라가 미안해하는 얼굴인 데다, 어차피 차로는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니 버텼다.
숨을 쉴 때마다 창문을 바라봐야 했지만, 하나 다행인 건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