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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제 와서 궁금하니? 왜?”
팔짱을 끼고 방어적인 자세로 희주가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물었다.
“오빠가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것처럼….”
“그럼 서우를 비난할 시간에 네가 직접 알아봤어야지. 솔직히, 나는 친구라서 서우를 얼마 못 봤는데 너흰 10년을 같이 먹고 자고 했잖아. 언젠가 서우가 그러더라. 제 부모님과 지낸 시간보다 너희들이랑 지낸 시간이 더 길다고.”
희주의 말에 은하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주 어릴 때, 서우가 돌아가신 부모님은 사진을 보지 않으면 기억이 흐려진다고 했다.
매해 기일에 혼자서 납골당에 가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같이 가자고 하니 어린 저를 데려가기엔 먼 곳이라며 기어이 혼자 갔다.
“아는 게… 있어?”
“있어도 너한테는 말 안 해 주지.”
비난하는 어투에서 희주의 목소리가 일순 씁쓸하게 들렸다. 울면서 자신을 찾아와 도와 달라고 했던 서우의 어린 날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손은 다 망가져서 와선.
“왜? 왜 나한테 말을 안 해 주는데.”
은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희주가 부른 은하의 배를 잠시 바라봤다. 내내 서우를 원망하기 바빴던 애가 이제 와 뭔가 눈치챈 것처럼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있는 그대로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럼 서우가 이번엔 자신에게조차 연락하지 않고 숨어 버릴까 봐 결국 침묵을 지켰다.
몇 번이나 말해 주고 싶었다.
은하에게 이렇게 비난받을 짓을 윤서우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고로 선생님이 죽고 그 옆에 타고 있었던 은하가 장례식이 끝나고 태윤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었다.
사고가 났던 근처에서 발견됐을 때는 거의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그곳에서 도로에 뛰어들려고 하는 걸 누군가 붙잡고 신고했다는데, 겨울인데 옷도 얇게 입고 자살 시도를 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
지금이야 정신과 치료를 받고 남편과 일찍 결혼해 안정을 찾았다지만, 그 시절 불안했던 건 강은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서우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그 마음마저 사라진다.
“나는 뭐라고 말을 못 해 주겠다. 정 알고 싶으면 너희 외할아버지한테 물어봐.”
“외할아버지가 왜 여기서 나와?”
“가서 네가 직접 물어봐.”
머리에 두통이 날카롭게 왔다.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이마를 짚자 집에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희주가 다시 한번 묻는다. 인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희주의 손을 뿌리치고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서우 언니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해져선. 아니, 그때 일이 언젠데 아직까지 이래?”
“놔둬. 그러다 제풀에 지치겠지.”
“지치겠어? 괴롭히려고 우리 모임에까지 끌고 와서 우리까지 스트레스받잖아.”
윤지가 입을 내밀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돌아가서 자리에 앉으려던 은하가 멈칫하곤 뒤에서 저도 모르게 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있던 그들이 자신이 돌아온 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옛날부터 윤서우한테 은하 집착 장난 아니었잖아.”
“솔직히 강은하 왕따였던 거 서우 언니가 애들한테 난리 치고 일 크게 만들어서 흐지부지된 거지. 성격 예민하고 피곤해. 그땐 제멋대로인 강은하 싸고도는 서우 언니가 이해 안 갔는데 난 이제 솔직히 이해 간다? 강은하 성격이 그 모양이니까 나 같아도 도망갔겠다.”
“네 말 들으니까 피곤하긴 해.”
“그치? 장례식장에 있었으면 저 성격에 얼마나 서우 언니한테 네 탓이라고 지랄했을 거야. 있어도 지랄, 없어도 지랄이지.”
마카롱을 입에 넣으면서 윤지가 투덜거렸다. 없는 자리에서 적나라하게 오가는 제 이야기들을 들으며 은하가 턱에 주름이 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앞에서는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고 둘도 없는 친구처럼 굴어도 원래 이런 바닥이라는 걸 알았다. 제 편이 아무도 없었다. 굳어 있던 표정을 은하가 갈무리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계속 봐야 할 상대였다.
“희주 언니도 여기서 미팅 있나 봐. 방금 오다가 만났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은하가 자리에 앉자 둘이서 웃으면서 맞아 준다.
“그래? 미팅이면 끝나고 밥이나 먹자고 할까.”
화제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뭉친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은하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잠에서 깼을 땐 낯선 방에 있었다.
손목과 손가락이 빳빳하게 굳어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낮의 일이 떠오르자, 스스로가 웃겨서 웃음이 샜다.
어쩐지 창밖으로 어스름한 풍경이 익숙해 이곳이 어딘지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 서울에서 이렇게 울창한 산을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은은한 조명 하나만 켜져 있는 실내는 넓고 깨끗했다.
“일어났어?”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이는 강태윤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어?”
“기절했어. 병원에 데려갈까 하다 여기로 온 거야. 너희 집 비밀번호는 모르니까.”
기절했다기보단 잠을 잘 자고 일어난 기분이라 서우가 뻣뻣한 오른손을 다른 손으로 주물렀다. 무거운 물건을 들 수도 없고, 무리를 해서도 안 된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그래서 어쩌면 정신적인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태윤이 서우에게 들고 온 물컵을 내밀었다. 마침 목이 말라 손을 뻗어 받는 순간 그대로 미끄러져 시트 위를 적셨다.
“아….”
손가락이 전혀 접히지 않았다. 뻗은 손만 그대로일 뿐, 쥐어지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있었다.
당황한 서우와 다르게 별 표정 없이 태윤이 다행히 깨지지 않고 러그 위를 구르고 있는 컵을 집어 들어 협탁에 올려놓는다.
“미안해.”
허둥지둥 사과하는 그녀를 그냥 앉혀 놓고 태윤이 젖은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았다.
뻣뻣한 서우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압을 가해 누른다. 놀라서 손을 빼내려 했는데 놓아주지 않아서 그대로 잡혀 있었다.
“아파?”
“아니…. 괜찮아. 이러다 괜찮아져.”
손바닥에서 땀이 나는 것 같다. 괜히 그 사실이 부끄러워서 이리저리 손을 움직였는데 태윤은 여전히 누르고 있을 뿐이다.
결국 포기하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상체를 살짝 숙이고 제 손을 만지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손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해 물을까 봐 서우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하지만 말없이 부드럽게 손을 풀어 주는 것에 집중한 태윤의 미간이 굳어 있었다.
그의 미간에서 뚜렷한 콧날, 그리고 그 아래 입술을 보자 문득 오후의 일이 떠올랐다.
…얘랑 했다.
“아!”
“미안. 많이 아파?”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떠올라서 그런 거다. 키스를 했다, 강태윤이랑.
먼지가 풀풀 날리는 창고 안에서 오로지 그의 입술만 보였다. 부드럽게 혀를 가르고 들어와 숨 막히게 입을 맞추고 빨았다. 태윤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그의 다리는 제 다리 사이로 들어와 단단히 몸을 고정시킨 채였다.
꿀꺽.
입안에 고인 침을 서우가 삼켰다. 그 소리가 목을 지나가며 노골적으로 들려 손만 보던 태윤까지 시선을 올릴 정도였다.
“군침을 삼킬 정도로 내가 맛있어 보인 건 아닐 테고.”
아, 덤덤한 얼굴로 저렇게 이상한 말을 하니까 듣는 자신이 자꾸 부끄러워진다.
“그냥. 긴장돼서.”
서우가 솔직하게 말하자 태윤이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손만 잡았는데 긴장돼?”
손바닥에 땀이 뱄다. 괜히 부끄러워서 서우가 더 이상 그가 만지지 못하게 주먹을 쥐자 태윤이 느른하게 숨을 내쉰다.
그의 말대로 손만 잡았을 뿐인데 우리 사이가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건, 분명 저 입술 때문이었다.
“우리… 입 맞췄잖아.”
“입을 맞춘 건 이런 거고.”
태윤이 자신이 잡고 있는 서우의 손가락에 얼굴을 내려 입을 맞췄다. 감각이 거의 없는 게 그냥 강태윤이 하는 행동에 마음이 술렁거려서 이상했다. 어쩐지 계속해서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가 자신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방심하다가 상체가 태윤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입술을 부딪쳤다. 탄식을 흘리려던 입술 사이로 그의 매끄러운 혀가 들어와 목 안쪽을 깊숙하게 찔렀다.
츳, 츱. 츠읏-
예민한 점막을 건들면서 그가 게걸스럽게 자신의 혀를 옭아매고 빨고, 타액까지 전부 삼켰다.
맞부딪친 입술이 뭉그러진다.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만 여유를 주고 끝까지 태윤이 서우를 몰아붙였다. 볼 안쪽 깊숙한 곳이 찔리자 벅찬 숨이 흘러나온다.
어느새 그의 품에서 침대 위로 완전히 눕혀졌다.
“태, 흡….”
이름을 불러 태윤의 행동에 제재를 가할 것 같자 그가 더 끝까지 서우를 입안을 탐했다.
잡고 있던 손을 깍지 껴 위로 올리며 완전히 아래 깔린 그녀를 먹어치울 것처럼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