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25)화 (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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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잘못도 아냐. 내가….”

그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제 손가락이 정상인과 다르다는 걸 언제 눈치챘는지 알 수 없어서 마른침이 넘어갔다.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고 싶었다. 음악은커녕, 일상의 생활까지 손가락으로 인해 불편했다.

그래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라 강태윤은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어?”

이제 더 이상 제 손은 예쁘지 않다.

그가 예쁘다고 말했던 아름다운 신의 악기라는 하프를 다루는 손은 이제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그걸 궁금해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서우가 입을 다물자 태윤이 한숨처럼 숨을 뱉는다.

“제발, 다른 이야기 해.”

서우가 그가 빨았던 손가락을 말아 쥐면서 말했다.

“무슨 이야기. 내가 지금 너랑 여기서라도 붙어먹고 싶다는 거?”

강태윤의 머릿속엔 화, 아니면 변태가 들어서 있는 것 같다. 무릎을 세워 은근히 서우의 허벅지 안쪽과 그 위를 은밀하게 긁는 행위에 저도 모르게 아래가 젖어 들어간다.

“너는 그 생각밖에 안 해?”

“그럼 넌 그냥 날 곱게 두고만 싶어? 아래 쥐어 잡고 혼자 풀까? 네 생각하면서?”

서우의 말아쥔 손을 태윤이 가져가 꾹꾹 누르면서 말에 가시를 세워 말한다. 여전히 벽과 태윤의 틈에 끼어 있는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그제야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만해. 우리 나가야 될 것 같아. 경찰 왔나 봐.”

경찰은 눈치도 없지.

태윤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고 서우에게서 겨우 떨어졌다.

“신고받고 출동했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삐걱대며 반쯤 기울어진 문을 열고 경찰 제복을 입은 두 명이 들어왔다. 막 태윤이 서우가 놓친 소방 도끼를 들어 올린 차였다.

“어, 무기 내려놓으세요!”

“무기라뇨. 내 용맹한 비서가 날 구하겠다고 들고 온 건데.”

용맹한 비서라고 입을 열면서 여리고 약해 보이는 서우를 돌아보는 태윤의 눈빛이 익살스러웠다.

방금 전까지 입술을 부딪쳤던 사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괜히 이제는 체온이 사라진 입술을 서우가 손등으로 문질렀다. 얇은 살갗이 벗겨졌는지 따끔거린다.

“…용맹한… 문은 그쪽이 부순 거예요?”

경찰들이 말을 흐리며 일순 서우를 바라봤다.

“네. 제가 했어요.”

“아주 박살이 났는데. 새로 해야겠어요. 아니, 열쇠를 가지러 갔다는데 문을 왜 부숩니까.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성인 남자 혼자 있는데.”

경찰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밖에서 공장장이 열쇠로 열려고 방금 가지고 왔는데 서우에게 뒤집어씌운 모양이었다.

어차피 생산이 돌아가지 않는 라인이라 CCTV는 예전부터 꺼진 상태였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겠습니까. 내 비서는 내가 아주 연약한 줄 알아서 안에 갇혔다는 말에 무려 도끼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분명히 자신을 편들어 주는 말인데 자꾸 민망해졌다.

소방 도끼의 머리를 바닥에 쿵쿵 가볍게 내리찍으며 태윤이 말하자 경찰들이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다시 한번 경고를 했다.

“본부장님!”

김진호가 뒤늦게 나타났다. 그까지 들어서자 창고 안이 좁게 느껴져 결국 다들 창고 바깥으로 나왔다.

“빨리도 온다. 뭐 한다고 윤서우를 혼자 보내?”

이를 문 채로 태윤이 나직하게 물었다. 감사팀이 생각보다 빨리 와 그쪽에 맡기고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억울했다.

애초에 그녀를 잡을 새도 없이 튀어 나갔다. 창고에 갇힌 본부장과 소중한 증거 자료 사이에서 잠깐 김진호도 갈등이란 걸 하긴 했다.

“도끼를 들고 달려가는데 별일이야 있으려고요.”

다들 피해 다녔겠죠.

심드렁하게 김진호가 덧붙였다. 자신도 깜짝 놀랐다. 갑자기 사무실 한쪽에 있는 소방 시설을 부수고 도끼를 꺼내서 잠깐 등골이 오싹했다.

“갇혔다고 하셔서….”

왜 달려왔는지 알겠다. 혹시라도 창고가 제게 트라우마가 됐을까 봐 천지 분간 못 하고 달려온 게 분명해서 태윤은 좋은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손이 경직될 정도로 저걸 들고 문을 거의 부순 그녀가 그저 안쓰러웠다.

사태 수습을 위해 태윤이 진호에게 서우를 맡기고 그가 직접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예정이기에 서울에서 법무팀이 도착하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한해서 고소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경찰과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섰을 때 김진호 옆에서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윤서우를 발견했다.

“피곤했나 봐요.”

“그렇겠지.”

슬쩍 서우의 피곤함을 강조하는 김진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태윤이 말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이 상황이 그녀에게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서우에게 한없이 길었을 시간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옆으로 쓰러지려는 걸 가까스로 받아 안았다.

기절에 가까운 잠일까.

축 늘어져 자신이 안아서 옮기는데도 서우가 눈을 뜨지 못했다. 불면 날아갈까, 이 용맹한 걸 어디서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태윤이 바람조차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꿈을 꾸지 않는지 서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고, 눈을 뜨지 않았다.

뒷좌석에 그녀를 안온하게 눕히고 제 재킷을 벗어 위에 덮어 줬다.

“나머지 수습은 네가 하고 와.”

“네, 알겠습니다.”

김진호가 대답했다. 그에게 아주 긴 하루였다. 잠든 그녀에겐 짧은 하루였을 게 분명해 태윤은 그녀의 모든 게 신경 쓰였다.


 

***


 

5단 트레이에 예쁘게 담긴 애프터눈 티 세트에는 손도 대지 않고 은하가 소파에 앉아서 배만 문질렀다.

“오늘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아?”

윤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은하에게 물었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끼리만 간단하게 차 한잔하자고 모인 자리였다.

기분이 너무 별로라며 은하의 주최로 윤지와 민하가 나와 있었는데 정작 표정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아서 두 사람이 눈치를 봤다.

“서우 언니 때문에 그래?”

윤지가 슬쩍 서우의 이름을 입에 담자 은하의 표정이 단번에 어두워진다.

“…오빠가 언니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

한참 지난 뒤에 은하가 툭 꺼낸 말에 윤지와 민하의 얼굴이 둘 다 난감해졌다. 서로 시선을 마주하면서 어깨를 으쓱인다.

“설마? 네가 오해한 거 아니야? 솔직히 누가 서우 언니를 좋아하겠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도 아닌데 결혼 적령기에 미쳤다고 윤서우를 좋아하겠냐고 윤지가 별걱정을 다 한다며 과장스럽게 웃었다.

“아냐, 어쩌면 관심 있는 거 맞을 수도 있어.”

가만히 있던 민하가 말했다.

“에이~ 민하 언니. 태윤 오빠가 미쳤어?”

윤지가 웃다가 이내 은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은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입 모양으로 ‘진짠가 봐.’ 민하에게 말했다.

속이 어쩐지 뒤틀렸다. 자신을 끌어안고 다독여 주던 서우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여전히 따뜻한 품은 그녀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말해 주는 듯했다. 냉랭했던 엄마와 다르게 서우는 항상 제 옆에 있었다.

정말 언니가 생긴 것 같았다.

어릴 땐 태윤과 결혼해 영원히 제 가족이 됐으면 싶을 정도로 서우를 좋아했다.

“나 잠깐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선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윤을 만나고 난 뒤부터 혼란스러웠다.

꼭 자신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군다. 통로를 지나 화장실로 가면서 은하가 잠시 현기증이 나 멈춰 서 있을 때였다.

“강은하.”

“…희주 언니?”

미팅 장소가 이곳이었는지 비즈니스 정장을 입고 있는 희주는 일행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은하를 향해 다가왔다.

모임에서 어쩐지 희주가 가장 불편했기에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아는 척을 했다.

“괜찮아? 어지러운 거 아니야?”

“괜찮아. 언니야말로 일행들 있는데 이렇게 와도 돼?”

“나야, 뭐….”

매번 제게 가시 돋친 말만 하는데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은하의 그런 기분을 알았는지 희주가 괜찮으면 됐다고 돌아섰다.

“그럼 됐고. 나중에 그럼 모임에서 보자.”

“저기… 언니.”

“응?”

“서우 언니 말이야.”

잠깐 희주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와 가장 친한 서우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뿐인데 왜 저런 얼굴을 한단 말인가.

어쩐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모님을 잃고 남편을 만나 현재에 잘 안주하고 있었다. 보기 싫고 듣기 싫은 건 뒤로했다. 모두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엄마를 잃은 자신을 동정하고 친절하게 대해 줬다.

희주 빼고 모두 자신을 가엾게 여겼다.

“또 서우 이야기야? 걔가 또 네 기분 나쁘게 해?”

자신의 몸을 걱정하던 희주의 목소리에 알게 모르게 짜증이 스몄다.

“언니랑 친하잖아. 그, 우리 엄마 사고당했을 때 말이야. 그때 서우 언니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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