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_
친절한 강태윤. 하지만 그가 선을 넘는 순간 포악한 기질을 가졌다는 건 진작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아끼던 물건들이 남의 손을 타면 그대로 버리는 것도, 제 고집을 단 한 번도 굽히지 않는다. 저택의 고용인들조차 주 회장 내외보다 태윤을 더 어려워했다.
친절하지만, 그건 벼려진 칼날을 얇게 깔아 놓고 누구라도 거기에 속는다면 베일 듯한 위선이다.
그럼에도 서우는 강태윤을 좋아했다. 되돌려 받지 못할 마음이더라도, 언젠가 꼭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연주회에 서 보고 싶었던 게 오로지 제 꿈이었을 정도로 그를 선망했다.
“오히려 불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것과 동시에 어려워했다. 강태윤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웃는 낯이 분명한데 정신을 차리면 가시에 찔려 있다. 그건 꽤 큰 상처라, 강태윤과 돌아선 이들은 대부분 그를 저주에 가깝게 원망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까지 매력적일 정도로 모두가 친해지고 싶어 하던 대상이었다.
“의외네. 왜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 너한테 못되게 군 적이 없는데.”
“그래서 그래. 네가 나한테 화라도 한번 냈다면 우리 사이는 조금 더 편해졌을걸.”
이미 지나간 일을 서우가 되새겼다. 그랬다면, 더 포기하기 쉬웠으리라. 평범하게 싸우고, 투닥거리는 사이였다면, 그냥 친구로 남을 수 있었을 거다.
“나는 편한 사이 하기 싫은데.”
“우리 사이 아무것도 아니야.”
“가까운 사이 해. 네 입술부터, 아래까지 맞추는 사이.”
그런 말을 참 담백하게도 꺼낸다.
“내가 왜 그래야 해?”
“의식했잖아. 원래 먼저 자리를 피하면 지는 거야. 짐승 새끼처럼 세운 거 보고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지.”
트레이닝복 아래를 다시 떠올렸다. 서우가 어느새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같이 있기 불편해서 나온 거니까….”
“욕실 안이 온통 네 냄새밖에 안 나는데 그 좁아 터진 곳에 나를 집어넣으면 안 되지.”
서우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안다. 최선을 다해 다정한 어조로, 금방이라도 목이 끓는 듯한 소리가 나올 것을 태윤은 필사적으로 참았다.
세우나 마나 한 가시를 잔뜩 세우고 언제라도 도망갈 기회만 보고 있는 서우에게 친절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현실을 알려 줘야 했다.
“너어….”
“내가 안 서고 배겨?”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는 어떤 흥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굳이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태윤의 말이 끝난 뒤에 저도 모르게 향한 시선에 여전히 부푼 아랫도리가 보였다.
왜 트레이닝복은 회색이고, 꼭 거기는 물이라도 튄 것처럼 그 부분만 동그랗게 젖어 있었다.
어떻게든 눈에 띈다. 이성의 끈이 자신을 붙잡았다. 저렇게 여우처럼 웃는 강태윤에게 심장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이렇게 심장이 뛴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태윤이 여우처럼 굴었다. 서우의 동요를 알아챘는지 그가 눈꼬리를 내리며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매력이 없을까, 너에겐 내가.”
강태윤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손차양을 만들어 주며 상체를 제게 숙인 채 묻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음험함을 숨기지 않는다. 좋아했었던 마음 어딘가에 불씨가 붙어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선득한 느낌이 마음을 스친다.
“난….”
“결혼을 전제하기로 했으니 알아 두라는 소리야. 나는 이렇게 너만 봐도 그래. 숨길 생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어떤 식으로든 네가 날 의식해서 흥분하길 바라.”
해를 가려 주는데도 빨갛게 잘 익은 서우를 보면서 태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가 가려 준 손바닥이 사라지자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치고 빠질 때를 잘 알고 있는 태윤의 얼굴에 아쉬운 빛이 머물렀다.
“문단속 잘하고, 내 옷 두고 갈 테니까 남자 옷은 내 걸로 걸어 둬.”
“너 지금 그러고 가려고?”
“왜?”
진짜 이상한 걸 모르는 건가. 그냥 걸어 다니는 변태일까.
서우의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차마 한 점을 가리키지 못했다. 차라리 오물이 묻어 있는 옷을 다시 입고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그….”
“그러다 터지겠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 없어. 내 아래만 쳐다보면 그게 변태지. 내일 봐, 서우야.”
잘 익어서 찌르면 터질 것처럼 붉고 먹음직스러웠다. 태윤이 짧게 웃으며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옥탑 아래로 거침없이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서우가 중얼거렸다.
“내가 변태란 거야, 뭐야.”
사람들은 그의 생각과 다르게 강태윤을 매력적으로 생각할 테고, 아래는… 모르겠다.
뻔뻔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몸에 심하게 딱 달라붙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깝지 않은 거리를 걸어갈 강태윤을 떠올렸다.
진심으로 그가 변태인지, 저가 변태인지 혼란스러워졌다.
***
“서우 씨,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일찍 나오셨네요?”
일찍 나왔는데 이미 비서실을 총괄하는 박윤경이 먼저 피곤한 얼굴로 나와 앉아 있었다.
이미 커피를 한 잔 마셨는지 옆에 빈 컵이 보인다.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왔는데 그보다 훨씬 먼저 온 모습이었다.
“아우…. 금요일에 오늘까지 결재 건 있는 걸 깜박하고 퇴근했지 뭐야.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했죠.”
윤경이 화면으로 오늘 당장 처리해야 할 결재 건들을 훑고 있었다. 정리해서 강태윤이 출근하면 가장 먼저 올려야 할 업무였다.
서우가 자리에 앉기 전에 가방과 쇼핑백만 올려 두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한 잔 내려 윤경의 자리에 놓아 뒀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몰래 태윤의 책상에 가져다 두려 일찍 나왔는데 윤경이 먼저 출근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땡큐. 서우 씨는 결혼하지 마.”
다짜고짜 한숨을 쉬면서 결혼하지 말라고 말하는 윤경에게 서우가 애매하게 웃었다.
“그럴 생각도 없어요.”
“요새 유행하는 비혼주의 그런 거야?”
“아뇨. 그냥 여유가 없어서요.”
“그래, 하지 마. 일하고 집에 가면 애들은 울어 대지, 신랑은 소파에 누워서 휴대폰만 하고 있지. 주말에도 못 쉬는 기분이라 너무 힘들어.”
피곤한 얼굴로 윤경이 말했다. 마우스 소리가 딸깍, 딸깍 나고 커피 향이 솔솔 향기롭게 비서실 안을 채웠다.
“뭐 도와드릴까요?”
아직 비서실 업무는 처음이라 서우에게 그리 많은 업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늘 강태윤의 일정을 확인하고 주로 윤경의 보조를 하는 게 전부였다.
“음…. 이천 공장 발주 건 서우 씨가 했었다고 했나?”
“네.”
잠깐 와 보라며 윤경이 서우를 불렀다. 옆으로 다가가자 오늘 처리해야 할 결재 목록에 이천 공장 건이 몇 건 보였다.
아래서 올라온 결재 파일을 한 번 비서실에서 확인하고 난 뒤에 강태윤에게 올라가는 식이었다.
“이것 좀 확인해 줄래?”
서우가 잘 알 거라고 여기고 결재 업무의 확인을 한번 윤경이 맡겨 봤다.
곧 본부장의 출근 시간이라 회사가 인수 합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할 일이 더 많아 누구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 제가 확인할게요.”
서우가 ERP1)에 접속해서 이천 쪽 결재 건만 확인했다. 여전히 자신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OQC2)쪽 불량이 많았다.
많을 때는 발주분의 1/3 정도는 OQC에서 불량 판정이 나와 매번 수량 확보 문제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건 그녀였다.
한번은 윗선에 공장 실사에서 이 문제를 점검해야 된다고 말했다가 계약직 주제에, 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불량에서 난 마이너스를 메우지 못해 회사가 합병된 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이제는 담당 부서가 다르지만 그때가 생각나서 서우가 살짝 미간을 굳혔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윤경의 인사에 모니터에서 서둘러 시선을 뗀 서우가 느리게 뒤따라 인사부터 했다. 시선이 말보다 한 박자 늦게 강태윤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와 눈이 바로 마주쳤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보고 시선을 스친 채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확인하고 결재 좀 위로 올려 줘, 서우 씨. 난 내려가서 샌드위치 좀 사 올게.”
“네.”
서우가 오늘 강태윤이 해야 할 결재들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동안 윤경이 지갑을 들고 비서실을 나갔다.
서둘러 누군가 또 들어오기 전에 발아래 있던 쇼핑백을 들고 본부장실 앞에 섰다.
똑똑.
- 들어와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말에 어쩐지 긴장됐다. 쇼핑백의 끈을 한 번 더 다잡고 서우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본부장님, 전자 결재 건 승인 부탁드립니다.”
들어온 이가 서우라는 걸 확인하고 태윤이 확인하고 있던 태블릿에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보고 있었어요.”
꼭 둘만 있을 때 재미있는 장난을 하는 사람처럼 그가 서우의 존대를 느리게 따라 했다.
바로 어제 좁은 방 안에서 함께 잠시나마 있었던 사이치곤 어색한 얼굴이었다.
무대에서도 긴장한 티를 한 번 내지 않던 서우를 기억하고 있는 태윤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