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18)화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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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서우가 한숨을 내쉬자 축축한 공기 중으로 하얀 입김이 스르르 녹아들어 갔다.

마음이 아플 때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그냥 현실이 보일 때가 유독 있었다.

혼자인 게 싫어서 납골당에 오게 된다.

기쁜 마음을 안고 와야 할 곳에 이렇게 투정만 부리러 오는 스스로가 싫어도 섧은 마음이 들 때면 저도 엄마와 아빠를 찾았다.

선생님의 말이 서운한 건 아니었다. 잘 생각하면 저라도 곱고 예쁘게 큰 강태윤이 저와 같은 사람과 연애하는 건 싫을 것 같았다.

서운한 건.

“피아노… 그만두니까.”

강태윤이 지금까지 해 왔던 음악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주 회장의 뒤를 밟겠다는 건 서우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평생 음악을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이가 아니더라도 평생 친구로 가까이 남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의 부친을 닮아 피아니스트의 유망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태윤이 그 예쁘고 아름다운 손으로 피아노를 더 이상 치지 않는다는 게 서러웠다.

피아노를 치는 강태윤은 모두의 시선을 앗아 갔다.

선생님도 태윤이 주 회장의 뒤를 잇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서 말릴 자격도, 그럴 수조차 없다.

그와의 거리가 단번에 벌려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하지 못할 마음.

그렇게 생각하자 앞이 아니라 시선이 발끝을 향했다. 여기 와서 가족에게 전부 털어놓고 마음도 털어 버리고 가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같은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강태윤과 협연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이제는 영영 접어야 했다.

“한 번만 하자고 할걸.”

이렇게 후회가 남을 줄 알았으면 한 번만 함께 연주회에 서 보자고 할걸.

끼이이익-

도로에 막 들어섰을 때 빗길을 뚫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서우의 시선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콰아아앙!

목재를 가득 실은 트럭과 빗길에 미끄러진 승용차가 그대로 충돌했다. 어깨 위가 순간 오싹해서 서우가 우산을 떨어트렸다.

“으, 은색….”

선생님 차 아닌가?

은색이라고 전부 선생님 차일 리 없다. 워낙 순식간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

그런데 서우의 걸음이 그곳으로 향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순간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순간도 이렇게 섬뜩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과 비가 한데 어우러져 우산도 팽개치고 달려가던 서우 또한 그대로 미끄러졌다. 바지가 찢어진 것도 모르고 다가갔다.

급하게 정차하느라 사람 몸통보다 더 큰 통나무들이 운전석 앞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기울어진 채 그대로 승용차로 쏟아질 것 같아 서우가 흠뻑 젖은 채 주변을 바라봤다. 트럭 운전사도 정신을 잃었는지 미칠 듯한 고요함만 인적이 드문 도로에 흘렀다.

“서… 선생님?”

머릿속이 하얘졌다. 에어백이 터진 운전석에 엎드려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바라봤다.

숨을 몰아쉬다가 서둘러 휴대폰으로 119에 연락했다. 의식이 없으면 옮기려 하지 말고 상태를 지켜보란 말이었다.

구조 대원의 몇 가지 당부가 멀리서 말하는 것처럼 멍하게 들렸다.

“은하… 우리 은하….”

희미한 목소리가 은하의 이름을 말하자 서우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재빨리 조수석 쪽으로 돌아가자 눈물이 터졌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은하가 거기 있었다.

“다리, 애 다리….”

움직이지 못하는 선생님의 시선이 조수석 쪽 은하의 다리를 보고 있었다. 차체가 완전히 구겨지면서 은하의 가느다란 다리를 짓누른 채였다.

“아, 아아…. 선생님, 어떻게 해요. 어떻게.”

눈물이 앞을 가렸다.

끼이이익-

서우가 손등으로 거칠게 그걸 닦아 냈다. 트럭에서 반쯤 튀어나온 통나무가 기울어져 금방이라도 차체 위로 떨어져 내리려 하는 게 보였다.

어떻게든 은하의 다리만이라도 꺼내야 했다. 서우의 손이 주저 없이 대시보드 아래 레그 룸의 구겨진 아래로 뻗어졌다.

이미 날카롭게 다리가 찢겼는지 손바닥이 금세 피로 흥건해졌다.

“은하야, 괜찮아. 괜찮아. 언니 여기 있어. 괜찮아.”

발레를 하는 은하를 떠올렸다.

흐느낌이 터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서우가 은하의 발을 어떻게든 꺼내려 했을 때였다.

쾅!

통나무가 기울어지면서 그대로 보닛 위를 짓눌렀다.

“아아악!”

은하의 다리를 감싼 제 손에서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고통이 끔찍하게 찾아왔다.



 

“윤서우!”

눈을 가렸던 손이 타인의 힘에 의해 확 치워졌다.

서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대로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눈꺼풀을 깜박이지도 못한 채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새로 허공을 보는 서우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꿈과 현실의 분리를 겨우 해냈다.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태윤 때문이었다.

“꿈, 꿈꿨어.”

천천히 그가 서우의 어깨를 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식은땀인지 그저 데워진 평상 위에서 잠깐 잠들어서인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눈꼬리를 타고 흐르던 눈물까지 대충 땀으로 보일 정도였다. 축축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있었는데, 강태윤을 너무 오랜만에 자꾸 보고 말을 섞었더니 이렇게 또 바로 어제 같은 꿈을 다시 꾼다.

꼭 선생님이 다시 저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약속을, 유언이 돼 버린 그 말을 지키라고 경각심을 주시는 것 같았다.

“무슨 꿈.”

“너 아니었으면 평상에서 떨어질 뻔했네. 고마워.”

태윤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흘리면서 서우가 말을 돌렸다. 식은땀이 관자놀이에서 턱까지 주르륵 흘렀다. 태윤이 손으로 닦아 주려 뻗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쳐 냈다.

“아, 미안.”

굳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무의미한 사과를 내뱉었다. 정말 다시는 꾸고 싶지 않았던 악몽이라 몸부림을 쳤었던 걸까.

이어폰은 빠져 평상 위를 뒹굴고 있고 휴대폰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건네주며 태윤의 시선이 켜진 화면에 잠시 멈춘다.

서우의 손이 멈칫했다.

고작 피아노를 치는 손인데 알아봤을까.

“주지형 채널이네.”

안도의 한숨이 터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응. 연락은 안 해도 이렇게 영상 채널이 있어서 가끔 봐.”

머릿속으로 자신의 대답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주지형의 팬들은 이 피아노의 주인공이 주지형인 줄 알고 있었다.

어떤 일언반구도 없이 몇 년 전 그의 채널이 생기자마자 처음 등록된 영상을 서우는 단번에 알아봤다.

자신이 주지형에게만 보내 준 강태윤의 마지막 피아노였다.

그 이후로 그가 피아노를 취미로라도 다시 쳤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교복 끝만 보고 당연히 주지형이라고 여겼다.

어릴 적, 서우가 은하와 지형을 자주 데리고 놀아줬다. 그때 지형의 손을 보고 강태윤만큼 예쁘다고 말하자 곧장 그를 따라 피아노를 시작했다. 서우는 그게 EA의 후계 구도가 바뀌는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강태윤은 피아노를 그만두고, 그의 외삼촌이자 주지형의 아버지인 주영석의 밑으로 들어갔다.

결국엔 강태윤도, 그리고 저도, 음악을 그만뒀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곳과 이제는 동떨어진 사람이 됐다.

“그래. 주지형과 넌 비슷한 점이 많았지. 꽤 친하기도 했었고.”

꼭 사촌을 남처럼 이야기한다. 친해 봤자 사촌인 그보다 자신이 더 친했을 리 없다.

태윤이 말하는 비슷한 점을 잠시 생각하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주지형에게도 있었던 걸 기억해 냈다. 서우가 희미하게 웃자 태윤의 시선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우리가 그랬나.”

“네가 우리라는 범주에 이상한 걸 처넣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태윤이 입꼬리를 올렸다. 서 있는 그가 조금 상체를 제 쪽으로 숙였을 뿐인데 똑같은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꼭 자신의 냄새가 밴 것 같은 강태윤을 올려다보자 그가 상냥한 얼굴로 서우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왜….”

“글쎄. 나한테는 그게 퍽 다정하게 들려서 말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야.”

“그러니까, 서우야. 네 우리라는 범주엔 나만 들어갔으면 좋겠어. 예를 들어 너한테 발정 나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만.”

뜨거운 더위에 귓가가 익을 것만 같다.

서우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이런 말을 뱉어 놓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강태윤이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제 욕실에서 씻고 나왔을 때 서둘러 시선을 내렸던 건 트레이닝복 아래로 확연하게 부풀어 오른 그곳을 봤기 때문이다.

두 번 확인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정말이면, 애써 모른 척 한 게 들통 날까 봐.

“너-”

“너는 예전부터 나를 착하고 바른 이미지로 봐서 그게 참 이상했단 말이야. 나는 매번 이런 상태였는데 윤서우가 너무 착해서 그런가. 개새끼를 자꾸 순하게 보더라고.”

착한 눈에는 착한 것만 보인다며 태윤이 사르르 웃는다. 그의 손이 해가 기울어 파라솔을 벗어나 서우의 이마 위로 드리워진 햇살을 다정하게 가려 줬다.

다정한 몸짓, 상냥한 말투, 그리고 그렇지 못한 언사.

“…그렇게 너 착하게 본 적 없어.”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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