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_
회사 생활은 순조로웠다.
처음 며칠은 강태윤의 얼굴도 출퇴근에나 겨우 볼 정도지, 그가 매번 자리를 비워 어떠한 접점 없이 잘 지냈다. 그냥 회사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서우 씨, 오늘 부탁 좀 할게.”
번갈아 가며 점심시간을 좀 더 늦추고 자리를 지킨다. 아직 식사 전인 본부장실에선 사람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 급한 약속이 있는 윤경이 서우와 점심시간을 교대했다.
“네. 다녀오세요.”
“저도 다녀올게요.”
윤경과 주희가 나가고 난 뒤 비서실에 혼자 앉아 남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점심은 간단하게 먹거나 먹지 않는 날도 많아 이렇게 시간을 바꾼다 해도 서우는 별로 상관없었다.
다음 주에 있을 일정표를 정리하고, 그와 약속을 잡고 싶어 연락 온 곳을 따로 보고하기 위해 목록을 정리하고 있을 때 비서실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냐는 말은 상대를 확인하자 저절로 들어갔다.
환하게 웃으면서 들어오던 은하가 비서실 안쪽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서우를 보자 얼굴을 굳혔다.
“태윤 오빠가 나 기억할까?”
은하의 뒤를 따라 들어온 누군가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가늘지만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몸의 주인공을 서우는 단번에 알아봤다.
희주가 준 티켓으로 간 공연에서 본 사람이었다.
한국의 프리마돈나이자, 러시아 국립 발레단에서 단기간에 수석을 차지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나 박미라였다.
“…그럼. 기억하지.”
서우로 인해 잠시 끊겼던 대화를 은하가 아무렇지 않게 이었다. 은하의 대답에 환하게 웃던 미라가 이내 서우를 발견하고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 떨려.”
무대 위에서는 완벽한 프리마돈나가 떨린다고 이야기하며 짓는 수줍은 얼굴은 꼭 그 나이 또래와 같아 서우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녀가 안쪽에 미처 두 사람의 방문을 알리기도 전에 당연하게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듯 은하가 본부장실 문을 노크했다.
“곧 식사하러 나갈 거라 음료는 괜찮아.”
“아는 사람이야?”
“응.”
은하가 서우에게 편하게 말하는 것에 놀란 미라가 되물었다. 짧게 대답하곤 미라가 아는 사람이란 소리에 다시 인사하려 하자 문을 열고 안으로 그녀를 데리고 은하가 들어가 버렸다.
공연에 갈 때마다 꼭 공연 팸플릿을 모아 놓곤 했다.
자리를 옮긴 비서실 제 책상 가장 마지막 서랍을 열어 가장 위에 있는 팸플릿을 서우가 꺼냈다.
어둠 속에서 하나의 조명 아래 허공을 보며 눈부시게 서 있는 프리마돈나는 분명 박미라가 맞았다.
눈부신 재능이란 그녀를 보며 하는 말이리라.
그걸 서우는 공연에 가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면 꼭 박미라와 같은 몸짓일 거라 여겼다.
달칵.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란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팸플릿을 자리에 놓고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자 나온 건 은하뿐이었다.
문이 닫히기 전, 환하게 웃는 미라의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왜 여기 있어?”
문이 닫힐 때까지만 해도 웃는 낯이던 은하가 표정을 싹 굳힌 채 서우에게 다가와 물었다.
“나 이 회사 다녀.”
“알아. 그런데 왜 비서실에 있냐고.”
“새로 이동한 곳이 여기야. 서서 그러지 말고, 앉아서 이야기하자.”
임신 7개월째인 은하는 배가 뭉치는지 한 손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서우는 비서실 반대편에 있는 대기 소파를 가리켰다.
“됐어.”
짜증을 내다 말고 이내 은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은하의 시선이 서우의 책상에 놓인 팸플릿을 발견하고 픽 웃는다.
“언니도 저 공연 봤어?”
“응. 희주가 티켓 줘서.”
“미라 예쁘지? 옛날부터 오빠가 발레 하는 여자 좋아했잖아.”
그랬었나.
자신은 가까이 있었어도 태윤에 대해 잘 몰랐다. 동생인 은하가 훨씬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따뜻한 차라도 줄까? 배는 괜찮니?”
“오빠 미국에 있을 때 미라가 거기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내가 둘 소개시켜 줬어.”
그제야 서우는 자신에게 날을 세운 은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신을 잘 따랐던 은하는 가장 먼저 제 짝사랑을 눈치챈 상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여전히 신경 쓰나.
서우가 순간 웃고 말았다.
“은하야. 나 신경 안 써도 돼. 우리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잖아.”
“언니가 우리 오빠 좋아했잖아.”
여전히 아이 같다. 그래서 이상하게 서우는 은하가 예뻤다. 아무리 상처를 주려고 칼날 같은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자신이 알던 은하의 본모습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고아를 언니, 언니, 따르며 잘 때조차 함께 서로 마주 보고 자던 그런 때가 서로에게 존재했다.
“이제는 아니야.”
“아니라고?”
“응, 아니야.”
“지금 이 자리가 하루 종일, 오빠랑 제일 가깝게 붙어 있는 자리 아냐? 그러면서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감정이 있어도 지금 와서 그게 뭐. 어릴 때 감정이야 서로 금방 지나가는 거야.”
은하가 잠시 말이 없었다.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서우의 말끔한 얼굴을 빤히 바라봤을 뿐이다. 서우가 속없는 사람처럼 맑게 웃었다.
“진심이야. 아무것도 없어. 설사 남아 있다 해도 그건 금수 같은 짓이잖아.”
여전히 얼굴 표정이 바뀌지 않은 채 웃는 낯으로 서우가 말을 이었다. 금수라는 말에 은하가 조금 당황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상처 주지 못하는 여린 속내를 보고 서우가 울렁거리는 제 가슴을 내리눌렀다.
서우는 곧 제 입장을 또박또박 전달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내 마음이 온전히 그때와 같겠어. 걱정하지 마. 그리고 강태윤이 얼마나 냉정한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너는 날 좋아해도 강태윤이 날 좋아할 일은 없어.”
“내가 무슨 언니를 좋아한다고 그래?”
발끈해서 소리치는 은하의 말에 서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자신을 미워하려면 한참 남았다.
은하는 좀 더 사람을 미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분명 서우에게 돌리고 있지만, 가장 따랐던 친언니 같은 사람을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 또한 남아 있다. 그 양가 감정을 알기에 서우는 그냥 은하가 안쓰러웠다.
그냥, 마음 놓고 원망하지.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좀먹는다.
“왜. 은하 너 나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자꾸 신경 쓰지. 언니가 물가에 내놓기엔 좀 불안한 편이지?”
여전히 웃으면서 서우가 농담을 던졌다.
은하가 어이없는 얼굴로 기가 차 웃는다.
“참나. 그건 됐고, 일주일에 한 번, 와서 우리 한솔이 레슨 좀 해 줘.”
“응?”
“하프 배우고 싶대. 집에 있는 하프 보고 계속 탐냈거든.”
갑작스러운 제안에 서우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나 하프 손에서 놓은 지 너무 오래됐어. 아이에게 가르쳐 주려면 제대로 된 선생을 붙여 주는 게 낫지 않겠어?”
“아직 애잖아. 배우다가 싫증 나면 금방 포기해.”
“너도 칠 줄 알잖아. 그럼 우선 기본적인 건 네가….”
“언니가 그것도 못 해 줘? 우리 중에 엄마한테 제대로 하프 배운 건 언니뿐이잖아.”
계속되는 핑계에 은하의 언성이 짜증스럽게 높아졌다. 은하는 제 엄마를 들먹이면 꼼짝 못 한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서우를 다그쳤다.
자신은 재능이 없다며 은하는 발레를 시작했고, 자신은 선생님 아래서 하프를 배웠다. 그리고 그 선율에 맞춰서 학원에서 배웠다며 은하는 가끔 춤을 나비처럼 팔랑이며 예쁘게 췄었다.
“손가락이 굳어서 한솔이한테 망신만 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이제 다섯 살인 애가 뭘 안다고. 레슨비는 넉넉하게 챙겨 줄게.”
“아냐. 네 말대로 내가 네 아이한테 이 정도도 못 해 줄까? 일주일에 겨우 하루잖아.”
서우가 속없는 사람처럼 여전히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은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가 언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러니까 왜 도망쳤어. 그냥 엄마 장례식에 와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으면 하프는 계속할 수 있었을 거 아냐.”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선생님의 열렬한 지지와 후원, 그리고 은하가 맹목적으로 저를 언니로 따르는 바람에 서우는 한때 자신이 빛나는 재능을 가진 박미라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스포트라이트 아래서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더 큰 세계 무대에서 하피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평생 하프를 손에서 놓는 일 같은 건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자신을 데리러 선생님이 빗길에 은하를 데리고 운전만 하지 않았더라면 은하의 말대로 하프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답은 알 수 없다. 서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언니는 진짜 나쁜 사람이야.”
“그러니까 은혜도 모르지.”
담담하게 은하의 말에 동의했다. 결국 은하가 기가 차서 웃고 말았다.
“…이번 주 토요일부터 와 줘.”
“그래. 3시에 갈게.”
오로지 은하에게만 집중해 어느새 본부장실 문이 열려 있는 줄 몰랐다.
그 문 앞에 서 있는 건 당황한 얼굴의 박미라와 그 뒤에 선 강태윤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