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6)화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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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고심해 쓴 종이가 한 번 펴 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찢어지는 걸 서우가 바라봤다.

“무슨 말이야?”

“이전에 있던 경영진들이 해 처먹은 게 아직 수습되지 않아서 잠깐 내가 온 거야. 회사 동향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

과거의 일이 아닌, 그저 회사의 일을 들먹이는 강태윤을 보며 어쩐지 맥이 빠졌다. 괜히 과거를 들먹인 건 저 혼자 같아서였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서우의 얼굴을 태윤이 알 수 없는 얼굴로 응시했다.

“그거야 나보다 여기 오래 계셨던….”

“내가 누굴 믿을 수 있겠어. 오래된 친구가 이곳에 있는데. 서우야, 너는 나 안 속이잖아. 그렇지?”

서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태윤의 입술이 비죽인다. 여전했다. 시간이 지나도 저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집을 빤히 보던 어린 윤서우의 모습이 지금과 오버랩됐다.

말을 잇지 못하는 서우를 보면서 태윤이 느리게 말했다.

“두 달 뒤, 계약이 끝나면 정직원으로 네가 원하는 부서에 채용할게. 난 깨끗하게 이 회사를 떠날 거고.”

이제 막 캐낸 탐스러운 당근이 태윤의 머리 위로 흔들리는 환각이 보였다.

월급부터가 달라진다. 어떤 기술도 없고, 졸업장이라곤 고등학교뿐인 서우에게 대기업 계열사 정직원 자리는 제 스펙으로 결코 채용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난….”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인사 고과도 괜찮고, 애초에 2년 후 정직원으로 채용 유무가 계약서에 있잖아.”

그러니 낙하산은 아니라고 태윤이 설명하고 있었다.

거부하기엔 너무 달콤한 제안을 그가 말했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줘?”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에게 강태윤이 이럴 리 없다. 차라리 은하처럼 마음이 훤히 보이는 사람이었다면 제 상황에서 호의나 다름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강태윤은 도무지 10년을 알고 지내도 서우에겐 너무 어려운 남자였다.

태윤이 반으로 찢은 사직서를 조각조각 계속 찢었다.

“윤서우, 네가 필요해서.”

심장의 어느 한 조각이 깊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흔적도 없이 깨져 본래의 모습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서우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필요한 이유는 이 회사에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야 해서다.

서우가 허리를 반쯤 숙여 책상 위에 있는 강태윤이 찢어 놓은 제 사직서 조각들을 샅샅이 모았다. 그녀의 행동을 보며 태윤이 손을 털고 깊게 의자에 상체를 묻는다.

조각들을 빈 재킷 주머니에 전부 몰아넣고 난 뒤 그녀가 태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앞으로 두 달간 잘 부탁드립니다, 강태윤 본부장님.”

“그래요, 윤 비서.”

윤 주임이 아니라 비서라는 호칭을 쓰면서 부드럽게 풀린 목소리로 태윤이 대답했다.

어쩐지 재미있어하는 기색이었다.

재킷 주머니에 든 종잇조각이 바스락거린다. 차마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서우를 보며 태윤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어요?”

부드러운 존대는 더 이상 자신이 그의 어린 소꿉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서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때는….”

“윤 비서님. 꼭 지금 나한테 사과라도 하려는 얼굴인데.”

종이가 여전히 바스락거린다. 그게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환청이라는 걸 알았다.

필사적으로 태윤의 말이 칼날처럼 파고드는 게 싫어서 억지로 아까 집중했던 종이 찢어지는 소리를 되새기고 있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태윤이 책상을 돌아 한 치 앞까지 가까이 다가올 때조차 서우는 가만히 멈춰 선 채였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윤 비서 때문이에요?”

“난….”

“사과하지 말아요. 우리 윤 비서, 자기가 잘못하지 않은 일은 죽어도 사과 안 하는 사람이잖아.”

그의 기색이 어떤지 느낄 수 없었다. 시선을 내린 서우가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태윤의 가슴팍뿐이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하려는 말이 무언지, 어떤 말을 내뱉을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가 말하고 있다.

입술이 달라붙어서 달싹였다.

“내 어머니에 대해 사과할 게 아니라, 내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없었던 걸 사과해야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바로 머리꼭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윤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학창 시절과는 달랐다.

그때보다 더 크고 단단해진 몸, 그리고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을 가진 사내가 된 남자는 모호하게 서우를 바라본다.

“넌 그것만 미안하다고 하면 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안함이 너무 커서 자신의 입을, 숨구멍을 막아 버린 건지도 모른다.

어떤 사이도 아니었다. 그가 가장 힘들 때 서우는 곁에 있어 줄 수조차 없는 관계였다.

우리는 그저 10살에 만나 함께 음악을 했고, 10년의 세월을 마주 본 채 보냈을 뿐이다.

어떤 관계가 되기엔 너무 어렸다.

강태윤과 자신의 사이엔 항상 문 하나가 자리했다.

서우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매미가 커다란 느티나무에 다닥다닥 매달려 우짖던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다.

코끝의 사이프러스 향과 함께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얗고 두꺼운 창문에 바짝 달라붙자 안쪽은 에어컨을 틀어 놓아 시원한지 금세 몸이 시원해졌다.

양쪽 눈가에 손바닥을 세워 가림막을 만든 뒤 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유려한 곡선의 태어나서 처음 본 악기인 하프에 처음 시선이 팔리고, 그 옆에서 피아노를 치는 새하얀 남자아이에게 두 번째로 시선이 갔다.

창문에 달라붙은 자신을 보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침없이 다가오더니 곧 커다란 통창이 옆으로 밀려난다.

후욱.

차가운 냉기가 몸을 감싸자 서우가 저절로 눈을 크게 떴다. 부끄러움은 뒤늦게 몰려왔다.

서울에서 내려온 귀한 아가씨 댁 일을 해 줘야 한다며 할머니가 일하러 다니는 집이었다. 마침 방학이었던 서우가 몰래 따라왔다가 안쪽을 훔쳐본 걸 들키고야 말았다. 집에 가면 분명히 혼날 텐데.

그런데 앞에 있는 하얗고 예쁜 남자아이를 보자 절로 주눅이 들어 도망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어머, 네가 한 집사님 손녀구나?

남자아이의 등 뒤로 할머니가 말한 서울에서 내려온 귀한 아가씨는 동화에서나 보던 선녀 같았다. 예뻐서 입술을 벌리고 인사조차 잊었다. 예쁜 아가씨가 서우에게 들어오라며 상냥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그제야 돌아다녀 꼬질꼬질해진 제 신발이, 땀이 잔뜩 나 더운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제 몰골이 부끄러워졌다.

들어와.

예쁜 아가씨를 똑 닮은 예쁜 남자아이가 서우에게 말했다. 망설이는 그녀의 땀투성이 손을 잡고 안쪽으로 부드럽게 잡아당긴다.

못 이기는 척 신발이라도 벗고 들어가려 버둥거렸는데 그가 당겨 벗을 새도 없이 발이 깨끗하고 하얀 대리석 위를 밟았다.

그때였다.

지독한 제 첫사랑이 시작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서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 그가 창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문을 열고 자신을 잡아끌어 줬는데 그녀는 강태윤을 볼 때마다 그 문이 여전하다는 걸 느꼈다.

“나가 보겠습니다.”

서우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잠시의 상념에서 깨어나 제 눈에만 보이는 그 견고한 문과 거리를 순식간에 벌려 둔다. 다시는 저 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재빨리 등을 돌려 본부장실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태윤이 지그시 응시했다.

표정이 없다.

애초에 강태윤의 표정은 어릴 때부터 그리 다양한 편은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싸늘한 눈매가 눈꺼풀의 미동조차 없이 다만 서우가 나가는 마지막까지 바라볼 뿐이었다.

배 속에서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화는 어떤 욕구와도 닮아 있었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그가 낮게 혀를 찼다.

욕구를 누르는 건 그에게 익숙한 일이라 대수롭지 않았다.

“박윤경이에요. 이쪽은 최주희 씨.”

“안녕하세요.”

서우가 비서실 사람들의 인사에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윤서우라고 합니다.”

김진호는 태윤을 따라 본사에서 왔고, 박윤경은 원래 회사가 바뀌며 그만둔 임원의 비서로 있다가 이곳으로 재배치를 받았다고 했다. 최주희는 비서학과를 나와 첫 취업을 한 곳이 여기인데 수습 기간 중이라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들 사연 있는 사람들인데 잘 지내 봐요.”

가장 연차가 높은 박윤경이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본사에서 온 로열패밀리 중 하나인 강태윤이 이곳에 오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게 말의 기저에 깔려 있었다.

그들 중 서우가 가장 알 수 없는 인사이동이었는데 궁금증을 감춘 모양새였다.

이제 막 합병된 회사답게 본부장으로 온 태윤의 스케줄은 잠시 훑어봐도 빈틈이 없었다. 매번 새로운 임원 회의, 회사의 방향성에 대한 회의가 잡혀 있었고, 긴 시간이 비어 있다 싶으면 공장 실사가 그 자리를 메웠다.

정말 그는 이 회사에 진심인 것 같았다.

그래서 절대 강태윤을 속일 수 없는 자신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꿉친구 윤서우가 아니라, 그가 잠시 머물 징검다리가 될 이 회사의 윤 비서가 필요해서 부른 게 아닐까.

언젠가 강태윤과 마주치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올려 본 적 있다.

상상과 실제는 다르다고 상상 속에 있던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에게 적대감과 원망을 갖고 있는 강은하가 서우에겐 오히려 더 편했다.

강태윤은…

모르겠다. 그가 어떤 마음인지.

강산이 한 번 변할 만큼 함께 붙어 있었던 사인데 서우는 그를 완전하게 모른다.

“이쪽이 윤서우 씨 자리예요.”

자신의 자리를 소개해 주는 박윤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에도 시선은 자꾸만 닫힌 본부장실로 가는 걸 가까스로 붙들었다.

매일 강태윤을 본다.

이 자리에서 그가 출퇴근하는 걸 볼 거고, 가끔은 본부장실에 들어가 해야 할 말도 있으리라.

첫사랑은 더 이상 접히지 않을 만큼 접히다 못해 찢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게 뭘까.

강은하가 자신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한 거라면 강태윤은 짐작할 수 없다.

결코 평탄하지 않을 두 달이 될 거란 걸 서우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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