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3)화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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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못 사는 친구.

그의 말을 곱씹기도 전에 그대로 황 집사에게 서우를 넘겼다.

“데려가요.”

“아가씨.”

황 집사가 서우를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태윤의 성격을 오래전부터 봐 와 알고 있어서다. 조용히 이 집에서 나가기 위해선 일단 그가 하라는 대로 하라는 소리 없는 말에 결국 황 집사의 뒤를 따랐다.

서우가 이 집에 드나든 뒤로 올라가 본 적 없는 2층의 계단을 밟았다.

다행히 태윤은 따라오지 않았다. 큰 사모님을 뵈러 가는 듯 자신이 왔던 복도를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귀국하고 난 뒤에 도련님께서 2층을 쓰고 계세요.”

궁금한 게 많을 텐데 황 집사는 묻지 않고 다정하게 서우에게 말했다.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그에게 잡힌 손이 저릿해서 서우가 다른 손으로 손목 아래를 버릇처럼 주물렀다.

이대로 나갔다간 회사에서 또 마주칠 텐데 이렇게 앞, 뒤 상관없이 구는 강태윤은 곤란했다. 황 집사가 아니라 회사 사람 앞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득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많이 젖어서 마음이 쓰였는데, 아가씨가 갈아입고 가신다니 다행이네요.”

곧 황 집사가 멈춰 문 하나를 열었다.

서우는 벌써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무가 짙게 물을 먹은 냄새가 났다. 비가 와서 그런 걸까. 열린 방 문틈 사이로 태윤의 향기가 나는 듯해 서우가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황 집사가 먼저 태윤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하얀 까멜리아가 붙은 쇼핑백 몇 개를 챙겨서 가지고 나왔다.

“은하 아가씨 선물인 줄 알았는데 그 댁으론 이미 선물들이 갔거든요. 이건 남겨 놓으시길래 의아했는데 아무래도 주인이 따로 있었나 봐요.”

“…은하요?”

태윤의 여동생 은하의 이야기가 나오자 서우가 되물었다. 은은한 미소를 짓고 황 집사가 쇼핑백을 들고 그의 방을 불편해할 서우를 위해 다른 빈방의 문을 연다.

“갈아입고 나오세요.”

등이 떠밀렸다.

텅 빈 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손에 든 쇼핑백을 들고 여전히 막무가내에 안하무인인 태윤을 떠올렸다. 쇼핑백에 쓰인 브랜드만 봐도 자신의 연봉 절반은 거뜬하게 넘을 것 같다.

이대로 그냥 갔다가 태윤에게 또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더 이상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입지 않으면 또다시 말을 섞어야 할 테니까.

그래서 조용히 그냥 그가 하는 말을 듣는 게 서로에게 편한 일이었다. 그게 밖에서 괜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 황 집사에게도 편한 일이 될 거고.

결국 서우가 쇼핑백을 열었다. 젖은 제 옷은 개서 크로스백에 대충 넣고 쇼핑백의 옷을 꺼내 몸에 걸쳤다.

닿기만 해도 부서질 듯 얇은 짙은 녹색의 샤스커트와 실크에 검은 비즈로 자수가 놓여진 드레스 셔츠였다. 여름용으로, 입자마자 가볍게 몸에 달라붙었다.

마지막 쇼핑백엔 어울리는 구두가 있었는데, 235mm로 제 사이즈였다. 잠시 망설이다 구두는 그대로 바닥에 거기에 두고 나왔다.

자신의 신발을 신으면 될 일이었다.

“어머나, 잘 어울리시네요.”

매번 비즈니스용 캐주얼 정장만 몇 벌 사 돌려 입는 서우만 보던 황 집사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구두는 안에 놓고 나왔어요.”

“같이 신으셔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서우가 재빨리 인사했다. 황 집사가 배웅해 주겠다는 걸 거절하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려던 때, 아래서 올라오는 태윤과 마주쳐 버렸다.

큰 사모님께 그냥 인사만 드리고 오는 건지 힐끗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은 무심했다.

급하던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느려진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태윤을 스쳐 지나가려는 움직임이었다.

서우가 계단 하나를 밟을 때마다 그는 일정하게 두세 계단씩 위로 올라왔다.

자신이 갈아입으라고 말한 옷으로 입었는데도 어떤 말도 없다.

강태윤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고 그와 스쳐 내려갔다.

“앞으로 자주 봐, 윤서우.”

서우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어느새 등을 돌린 태윤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느른한 얼굴로 웃었다.

작고 가녀린 몸이 현관을 나서 비가 그친 정원으로 뛰어나간다.

“구두는 놓고 가셨어요.”

빈방에서 그녀가 놓고 간 것을 가지고 나온 황 집사가 태윤에게 말했다.

“버려요, 그럼.”

주인이 놓고 갔으니 이제 쓸모가 없다. 태윤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황 집사가 조용히 소리 없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서우가 사라진 정원 너머를 향해 있었다. 층고가 높은 집이다. 2층 높이로 커다란 통창이 그녀가 가는 마지막까지 볼 수 있게 그에게 시야를 트여 주고 있다.

윤서우는 항상 그랬다.

곤란한 상황이나 안 좋은 상황에 그녀를 두고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적어도 태윤에겐 그랬다.

마음속에 있는 그의 가장 악한 부분을 자극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가봐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서우는 저택에서 나와 급하게 시내 5성급 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을 향했다.

83층에 위치해 늦은 오후부터 해가 지는 걸 보면서 식사를 하는 뷰로 유명한 곳이다. 미슐랭 가이드에 선정된 이후로 폭발적으로 예약이 늘어 몇 달 전부터 예약하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도착해서 예약자 이름을 말하자마자 서버가 프라이빗 룸으로 서우를 안내했다.

여름이라 해가 지기엔 아직 멀었는데 언뜻언뜻 보이는 통창으로 서울 시내와 한강이 한눈에 보여 개방감이 좋았다.

똑똑.

서버가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어 주자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서우 왔구나!”

“언니~ 오랜만이에요.”

“좀 늦었네?”

일제히 서우를 보자 거짓말처럼 환하게 표정을 바꾸며 그녀들이 인사했다. 하나 남아 있는 자리가 있었지만 그곳에 앉지 않고 맞은편 옆자리에 홀로 앉았다.

거기가 당연히 자신의 자리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다들 잘 있었죠? 은하야, 잘 지냈지?”

서우가 앉은 건 당연하게 은하의 옆자리였다. 얼마 전 둘째를 임신해 제법 태가 나는 배로 앉아 있는 그녀가 웃으면서 서우를 반겼다. 이 모임에 서우를 초대한 것도 은하였다.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

일찍 결혼을 해 벌써 둘째를 갖고 있는 은하에게 서우가 다정하게 말했다.

“갑자기 중간에 비가 와서.”

“못 보던 옷이네? 이거 C사에서 유럽 한정판으로 냈던 거 아니야?”

은하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서우를 훑어보며 자연스럽게 브랜드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러자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탰다.

“나도 들어올 때부터 봤잖아. 우리나라에서는 못 구하는 건데. 동대문표 아니지?”

“그런가 보다. 설마, 진짜겠어? 서우 월급보다 더 클걸?”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중간에 연락이 끊어졌었지만 우연히 은하를 클래식 공연장에서 다시 만난 뒤로 서우는 이 모임에 초대됐다. 대기업의 내로라 하는 재벌 3세들의 모임 중 하나였다.

나긋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말 속에 악의가 없다는 걸 안다.

서우가 대답하지 않고 웃자 은하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목덜미로 손을 가져가 옷을 늘어뜨려 택을 살펴본다.

“…진짜네?”

“어우야~ 서우 민망하게 왜 그래.”

너무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아무도 탓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이들이 예의를 차려야 할 때는 얼마나 깍듯하고 바른지 알고 있는 서우는 자신은 그 대상이 아니라는 걸 이미 인지한 뒤였다.

“괜찮지, 언니?”

“괜찮아.”

“어디서 났어? 나도 태윤 오빠한테 구해 달라고 말해 놓은 옷인데.”

오늘따라 어딜 가나 태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모임에서는 반드시 그의 말을 듣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직접 본 뒤라 타인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스레 느껴졌다.

“…빌렸어.”

“흐음. 희주 언니한테 빌렸어?”

반은 거짓이고, 반은 진실인 서우의 말에 은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태윤 오빠 귀국했다면서?”

“응. 본사로 들어가라니까 기어이 별 볼 일 없는 계열사로 갔다니까. 외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윤지가 태윤이 귀국했냐고 묻자 은하가 곧 옷에서 관심을 거뒀다. 더 이상의 추궁은 자신도 할 말이 없었기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태윤의 이야기에 귀를 세웠다.

태윤의 하나뿐인 동생인 은하의 입술을 서우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봤다.

“서우 언니는 꼭 은하를 그런 눈으로 보더라.”

“응?”

윤지가 그 눈빛을 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자 이미 서로들이 웃고 있다.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보잖아.”

“예쁘잖아.”

서우의 말에 은하가 피식 웃었고, 다들 은하만 예뻐하냐고 야유를 보냈다.

똑똑.

식전 애피타이저가 나오기 전 서버에 의해 마지막으로 도착한 사람은 박희주였다. 이번에 공연 예술 쪽 사업을 맡아 정신없이 바쁜 그녀가 등장하자 서우가 왔을 때보다 더한 환대가 이어졌다.

희주는 두 팔을 벌리면서 곧장 서우에게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진하게 입술을 부볐다.

“우리 서우, 머리가 좀 젖었네?”

“비를 맞았거든. 좀 떨어져.”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 나 보여 주려고?”

희주가 호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위한 빈자리를 보다가 그 자리를 그대로 놔두고 서우의 맞은편에 앉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항상 넷만 모이던 모임에 끼어든 건 서우인데 은하의 앞자리가 비었다.

은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굳어진 채다.

놀란 서우가 옆을 바라보자 일어난 그대로 은하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은하야!”

서우가 일어나 재빨리 은하를 붙잡았다.

“…나 다리가 아파.”

“어디가 아파? 많이 아파? 병원에 갈까?”

테이블을 짚고 선 은하가 다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숙여 은하의 다리를 살핀다. 긴 플레어 롱스커트를 입은 은하는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지 몰라 서우가 당황해 있을 때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냥 비가 오니까 상처 부위가 아파. 서우 언니가 주물러 줘.”

“그래? 발 이리 대 봐.”

놀란 가슴을 누르면서 서우가 의자를 은하 쪽으로 돌려 앉았다. 구두를 벗고 제 한쪽 발을 당연하게 서우의 무릎에 올려놓는다.

“강은하.”

희주가 지그시 은하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이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사태를 지켜볼 뿐이다.

“왜?”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매너야.”

“서우 언니가 괜찮다는데 왜 희주 언니가 난리야?”

“윤서우. 너 손 떼. 가만 안 있어?”

은하가 서우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모임의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가 많았다. 대부분은 희주 또한 묵인하는데 이번엔 도가 지나쳤다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많이 아끼는 희주이기에 화를 낸다는 걸 알지만, 정말 은하가 걱정돼서 아프다는 발을 만져 봐야 할 것 같아 자진했다.

“괜찮아. 아픈 데 잠깐 확인하는 건데, 뭐.”

“네가 이러니까 얘가 자꾸 기어오르잖아.”

“내가 뭘? 서우 언니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언니가 이 정도도 못 해 줘?”

은하의 발목부터 종아리를 주무르던 서우의 손이 멎었다.

희주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는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웃듯이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도 죽었잖아. 서우 언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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