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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비가 많이 오죠? 마중을 나갈걸, 다 젖었네.”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현관을 열고 맞아 준 건 황 집사였다. 이곳에서 30년을 넘게 근무한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서우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황 집사님.”
“매달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오네요.”
“한 달에 한 번뿐인걸요.”
“그렇다고 그게 어디 쉽나요.”
매달 20일마다 이곳을 방문했다. 괜찮다고 하는 서우를 안쓰럽게 바라본 황 집사가 재빨리 수건을 가져다줘 몸을 대충 닦았다. 그리고 이내 안으로 안내하자 실내화로 갈아 신고 바깥의 외형처럼 꼭 예쁜 안쪽의 복도로 가로질렀다.
“사모님, 서우 아가씨 오셨어요.”
노크를 한 뒤 황 집사의 말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서우는 익숙한 듯 문을 열고 안쪽으로 한 발 들였다.
“잘 지내셨어요?”
비가 쏟아지는 통창 가운데로 커다란 그랜드 하프가 보였다. 매번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옆 흔들의자에 앉아 무릎에 블랭킷을 덮고 있는 노부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앞으로 단정히 걸어간 서우가 무릎을 꿇고 노부인과 눈을 맞췄다. 초점이 없던 눈이 서우의 얼굴을 보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주름진 손이 축축한 빗물이 튄 말간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영아.”
“네.”
“이탈리아에 다녀왔니?”
“네. 공연 끝내고 방금 돌아왔어요.”
“그래. 그렇구나.”
이제 이 거짓말도 익숙해질 때가 됐다. 자신을 하영이라 부르며, 죽은 딸의 모습을 찾는 노부인에게 서우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럼 연주해 주겠니?”
매번 노부인이 원하는 곡은 하나뿐이었다.
헨델의 파사칼리아.
몸을 일으킨 서우가 하프로 다가가 어깨를 매만졌다.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가볍게 현을 잡아 뜯었다.
곧 아름다운 선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스페인의 춤곡으로 탄생한 음악답게 격정적이고 어딘지 하프로 연주할 때면 마음 한쪽이 울린다.
손가락이 뻐근했다. 뻣뻣하게 울리는 이 음악을 노부인은 알면서 모르는 척 넘어가는 걸지도 모른다.
연주는 그저 그런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더 이상 손가락이 예전처럼 움직여지지 않았고, 무리해서 빠르게 현을 튕길 때마다 통증이 올라왔다.
비가 와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피하지 못한 빗방울의 잔재로 젖은 서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뒤섞여 흘렀다.
7분에 가까운 연주가 끝나고 마지막 현의 울림이 끝났을 때 서우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을 때 자신을 보는 노부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젖은 눈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서우가 당신의 죽은 딸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면서 부정하는 것이리라.
“여전히 마음에 드세요?”
“…그래. 항상 우리 딸이 내 마음을 연주하지.”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 집사는 늘 연주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과를 준비해 왔다.
밖에선 비 내리는 날씨가 후텁지근하다 생각했는데 쾌적한 에어컨 바람이 젖은 목덜미를 스치자 오한이 느껴졌다. 그걸 고려해서인지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홍차와 쿠키, 그리고 케이크가 놓여졌다.
노부인은 다시 정적 속에서 창밖만을 바라봤다.
공허하고 비어 있는 눈동자였다.
“사모님, 지금 태윤 도련님도 오신다는데 좋으시겠어요.”
뜻밖의 소식을 전하는 황 집사의 목소리에 차를 마시던 서우의 손이 멎었다. 더할 나위 없이 놀란 얼굴이 황 집사에게 향했다.
강태윤이라니.
회사에서 봤던 무심하고 타인과 다를 바 없는 눈이 서우의 뇌리에 스쳤다.
그녀는 다시금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그가 미국에서 돌아왔다면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었다.
노부인의 딸인 주하영은 태윤의 생모였으니까.
서우가 서둘러 자신의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매번 연주를 하고 난 뒤에는 차 한 잔을 전부 마시고 가던 그녀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황 집사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요.”
“곧 태윤 도련님 오실 텐데. 서우 아가씨랑도 친하지 않았어요?”
“그냥 모임이 같아서 몇 번 본 게 전부예요.”
서우는 여전히 멍하니 넋이 나간 노부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급하게 돌아섰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서우의 뒤를 황 집사가 배웅하러 따라왔다.
3년 가까이 이 집을 드나들고 있었는데 이렇게 당황한 모습의 서우는 처음이라 황 집사도 의아했다.
서우가 맡겨 두었던 제 우산도 잊은 채 서둘러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아가씨! 우산을 가져가야….”
황 집사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그게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황 집사가 말을 해 주지 않았어도 이 정도의 거리에서 존재감이 분명한 강태윤을 못 알아볼 리 없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서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커다란 키에 딱 맞게 입고 있는 슈트는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 덩치에 무섭게 잘 어울렸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는 완벽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회사에서 잠시 스쳤던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이전에 알던 소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강태윤, 안녕?”
간신히 연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여전히 마르지 않은 옷을 입고 젖어 있는 제 꼴이 새삼 한심했다. 태윤의 검은 시선이 비 맞은 생쥐 꼴인 서우에게 물끄러미 닿았다.
들어오면서 접은 우산을 아무렇게나 그가 바닥에 던졌다. 우산에서 튄 빗물 몇 방울이 제 다리로 튀었다. 오만한 얼굴로 태윤이 타이를 느슨하게 푼다. 회사에서 봤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도망가는 것치곤 인사 잘하네.”
“…도망이라니. 급한 일이 있어서 가는 거야.”
예전부터 눈치 하나는 무서울 정도였다. 강태윤이 서우와 눈을 맞췄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었다.
서우는 뒤에 서 있는 황 집사를 신경도 쓰지 않는 태윤의 태도에 이미 몸이 굳어 버렸다.
“그래.”
태윤이 대답하며 길을 열어 주듯 살짝 몸을 비켜 주었다.
유리로 된 현관 밖으로 보이는 빗줄기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회사에 있을 줄 알았어.”
불과 두 시간 전 회사에서 그를 봤다. 그도 자신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태윤의 시선이 서우의 얼굴 어디쯤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잠깐 얼굴만 비치러 간 거야. 거기에 재미있는 게 있더라고.”
평이한 대답이다. 하지만 그 말은 그 역시 회사에서 자신을 알아봤다는 게 명백했다.
“그렇구나. 만나서 반가웠어.”
빨리 태윤에게서 등을 돌리고 싶었다. 그의 등 뒤로 내리는 빗줄기가 이제 가느다랗다. 여름의 소나기가 으레 그렇듯 또다시 숨 막히는 더위를 몰고 올 게 분명했다.
몇 번의 마른세수 끝에 서우가 얼굴을 쓸며 태윤에게서 벗어났다.
3년쯤 됐을까.
한동안 이곳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다 강태윤이 한국을 떠나고, 3년 전 즈음부터 서우는 저택의 아름다운 별채에 다시 드나들기 시작했다.
“윤서우.”
그를 지나쳐 현관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다.
못 들은 척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목소리였다.
서우가 뒤를 돌았다. 여전히 자신이 벗어난 그 자리에 비켜 서 있던 태윤이 곧 느리게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오랜만에 봤는데 악수 정도는 해야지.”
태윤은 커다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자신이 멀리서나마 봤던 선이 굵고 긴 손가락이다. 손목을 깔끔하게 감싼 슈트 재킷의 끄트머리가 빗줄기에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잠시 망설이다 그의 말대로 악수 정도는 해도 될 사이 같아서 태윤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악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지게 손이 잡혔다.
깜짝 놀란 서우가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는 순간 오히려 앞으로 당겨졌다. 너무도 손쉽게 그녀를 제 좁은 영역 안으로 끌어들인 태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읏.”
비스듬히 그의 얼굴이 기울었다.
놀란 서우의 눈을 보면서 가느다란 입꼬리가 비틀린다.
“다 젖어서 어떻게 가려고.”
“내가 알아서 가.”
그와 맞잡은 제 손이 가늘게 경련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커서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황 집사님.”
서우와 끝까지 눈을 마주한 채 태윤이 뒤에 있을 황 집사를 불렀다.
“…네, 도련님.”
당황한 기색을 가까스로 감추고 황 집사가 대답했다.
“내 방으로 데려가서 갈아입을 옷 좀 주세요.”
“네. 서우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황 집사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태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꼭 눈을 떼면 서우가 그대로 도망갈 사람처럼 굴었다. 황 집사가 다가와 그에게서 서우를 넘겨받을 때까지 그랬다.
“강태윤, 난….”
“옷만 갈아입고 가.”
“내가 너랑 이럴 이유가 없어. 옷이 젖은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죽고 못 사는 친구 사이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