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7화
올림포스, 포세이디아노스의 집무실.
저번에 김지안이 방문했을 땐 용무로 인해 자리를 비웠던 다른 신들도 이날만큼은 한곳에 모여 초조한 얼굴로 김지안과 계약을 체결해 얻은 오른쪽 눈의 시야를 확인하고 있었다.
김지안은 그들 중 처음 담보 대출 계약에 서명한 셋 외엔 많아 봤자 한두 명 정도만 발송한 계약서에 서명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들은 모두 담보 대출 계약에 도장을 찍어 김지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빌려주기로 약속했다.
김지안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이 크나큰 한 번의 도박에 신들 역시 많은 것을 내걸고 있었다.
계획에 따르면 김지안의 오른쪽 눈을 담보로 대출을 약속한 것의 크기가 클수록 계약에 가해지는 세계의 억지력이 그에 비례해 거대해진다.
많은 걸 내걸수록 리스크가 커지긴 해도 악마와 그 대행자를 세계에서 확실히 지워 버릴 확률 역시 올라가는 것이다.
그들은 6-2차원의 시간을 기준으로 오전 10시, 그러니까 이곳에선 새벽 3시에 모두 모여 물 한 잔 마시는 일 없이 김지안의 눈을 통해 모든 것을 관찰했다.
눈은 김지안이 지니고 있어도 그 권리는 신들에게 담보로서 저당 잡힌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지안은 이 모든 거래가 신들의 공증 아래 투명하게 진행되길 원했다.
그가 굳이 신들의 권능을 빌려 간 것 역시 계약을 신언으로 완벽하게 공증해 세계의 억지력 아래 묶어 두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두 시간이 지났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출근해 업무를 준비하는 김지안의 무덤덤한 모습은 신들조차 감탄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어째 하나도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군.”
“세계의 힘과 악마의 성질을 역이용해 놈들의 존재를 지우려 하고 있으니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간이 이만한 담력과 지혜를 발휘하는 걸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신화시대에나 있던 일인데. 갑자기 그리워지는군.”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감각에 신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한낱 인간이 일신의 지혜와 세 치 혀를 무기로 악마와 그 대행자에게 맞서려 하다니.
신들조차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일을, 저 김지안이라는 3-1차원의 인간은 묵묵히 해내려 하고 있었다.
“제발 눈치채지 말아다오.”
허공에 떠오른 거울에 비춘 김지안의 시야.
그 너머로 마침내 악마의 대행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신들은 열띤 눈빛으로 사태의 흐름을 관망했다.
지극히 무례한 언행으로 김지안에게 눈을 요구한 대행자.
반면 김지안은 재치 있게 번호표를 뽑아 오라는 한마디로 선수를 제압했다.
“오커스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군.”
“신왕께서 예전에 눈을 하사하신 인간과는 달라도 크게 다르군.”
“똑같이 실패한 화가인 점 외엔 전혀 세상을 보는 방식도, 타인에 대한 생각도 겹치는 곳이 하나도 없어.”
“과연, 이번엔 기어코 성공하고 말았는가.”
“잠드신 신왕께서도 이를 알면 기뻐하실 게 분명해.”
김지안은 능수능란하게 인질을 되찾고, 계획대로 악마의 대행자에게 자신의 눈을 내어 주었다.
그 와중에도 사전에 아폴론에게 배운 대로 신의 권능을 사용해 지혈과 새로운 안구의 재생을 마치기까지.
과연, 은행원으로서 막대한 양의 업무 지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습득하는 훈련을 마친 김지안은 고작 하루 만에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능숙하게 권능의 힘을 다루고 있었다.
금방 신들에게 돌아올 힘이긴 해도 자신의 것이 아닌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는 걸 보니 평소부터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권능의 조각을 직무 권능으로써 사용해 온 덕에 권능의 사용에 아무런 저항이 없는 모양이었다.
김지안은 그대로 안구가 재생된 걸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으로 가린 채 인질을 되찾고 거래 상대인 악마의 대행자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신들은 안구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고 있던 덕에 악마의 대행자가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던 건지 마침내 찾아낼 수 있었다.
“맙소사, 저긴….”
“버려진 차원이로군. 번호조차 붙어 있지 않은.”
“신왕께서 크로노스의 목을 벤 이래 영구적으로 출입이 금지된 곳이 아닌가.”
“저곳이라면 확실히 우리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었겠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탓에 생존에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악마의 대행자는 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수백 년 동안 버텨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놈은 마침내 안구를 감싸고 있던 얼음을 녹이고 자신의 몸에 이식을 시도했다.
마침내 찾아온 기회.
“우리는 이 거래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의를 제기하오!!”
“제기한다!!!”
“이의가 있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신들은 계약의 오류를 지목했고 세계의 억지력이 이에 반응해 계약에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김지안이 사전에 미리 안구를 담보로 저당 잡았기에 현재 권리를 지니고 있는 건 열댓 명의 올림포스의 신들.
악마의 대행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김지안에게 속아 계약을 마쳤고, 뒤늦게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노골적으로 낭패를 표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저당물을 호출하는 권리를 사용해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권능이 담긴 안구를 불러낸 신들은 순식간에 이를 안전하게 판도라의 상자에 넣어 봉인했다.
그리고, 악마는.
세계에서 무언가를 빼앗는다는 그 역할과 존재의의를 부정당했다.
놈은 사기를 통해 거래해 얻어온 약탈물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방적으로 인질을 내어 주고 수탈당하고 말았다.
허수 공간에 거하는 정보 생명체에게 있어 이러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는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콰아앙!!
그동안 수많은 신들의 목숨을 빼앗고 그 대가로 잠깐의 번영을 올림포스에 가져다준 탐욕의 악마는 마침내 폭발 사산하며 그 악행의 끝을 고했다.
그리고, 영혼 담보 대출이라는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갈취한 악마의 대행자인 전직 디스파테르 신용금고 행원이자 현직 이름 없는 사채업자 역시 주인의 파멸과 함께 세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끝났군.”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신들이 거진 동시에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려두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유리 천장 너머로 보이는 12차원 올림포스의 밤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앞서 죽어 별이 된 신들이 가족들을 굽어살피고 있었다.
* * *
“…일단은, 그렇게 처리가 끝났습니다.”
나는 혼자 병상에서 회복 중인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님을 찾아뵈었다.
고작 사흘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녀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는데, 평소의 당당하고 위엄 넘치는 모습만 보아왔던 내겐 많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여신의 권능을 일시적으로 잃어버린 탓에 벌어진 일.
그 미모는 변함이 없었지만 악마의 대행자가 부린 농간으로 인해 며칠 동안 속이 문드러진 게 표정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신이 함정에 빠진 탓에 차원신용금고가 흔들렸다는 자책감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게 틀림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에 어떻게든 운 좋게 내 계획이 먹혀들어 가 악마와 그 대행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조금 전 올림포스에서 두 존재의 소멸을 확인했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이젠 안심해도 되겠지.
“자네가 큰일을 해 주었군….”
행장님은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다.
그녀의 칭찬에도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번 일은 나 혼자 해낸 게 아니다.
한낱 인간의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믿어 준 신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
어쨌든. 차원신용금고는 위기에서 구원받았다.
“이사회 임원들이 연락하더군. 자신들을 협박하던 존재가 있었다고.”
“역시 가족들을 인질로 삼고 무언가 꾸미고 있던 모양이군요, 악마의 대행자는.”
내가 말하자 행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 풀려난 지금 나를 배신할 이유가 사라진 거겠지.”
“그들의 처우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어쩌긴, 용서하는 수밖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리더로서 옳은 판단을 할 줄 알았다.
과연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신이다.
만일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배신자들을 숙청하니 마니 했을 텐데.
그래. 이 정도 품이 넓은 사람이니까 다른 차원의 화가 지망생을 은행원으로 데려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한 거겠지.
아니, 사람이 아니라 신이구나.
“나와 차원신용금고는 그대에게 큰 빚을 졌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저는 이대로 쭉 은행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뭐라 하지. 직무 권능이 사라진 것 같긴 해도, 그런 힘 없이도 이젠 어느 정도 사람을 볼 줄 알게 되었거든요. 행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이대로 쭉 업무를 보고 싶습니다.”
나로선 딱히 이렇다 할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뭐, 인사 고과에 반영해 주시고 보너스 챙겨 주시면 감사히 받을 생각이긴 한데.
너무 큰 일을 겪은 다음이라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타인에게 안구를 잡아 뜯기는 경험과 그 안구가 재생되는 경험을 하루 안에 할 줄은 몰랐지.
설마 밀라가 납치당한 걸 구하겠다고 그런 일까지 감내하다니.
어쩌면 사람의 내면엔 자신도 알 수 없는 용기가 잠들고 있어서 필요할 때에 조용히 눈을 뜨는 걸지도 모르겠다.
“평생 할 법한 고생을 하루 만에 겪고 나니 다른 생각이 안 들어요. 그냥 평온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과 직장에서 밥 벌어 먹고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질 따름입니다.”
내가 말하자 오커스 행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실하군, 그대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보상심리에 이것저것 요구했을 텐데. 생각해 보게. 신과 독대하고 있는 데에다 상대에게 마음의 빚까지 지운 상태인데, 정말로 원하는 것이 없는가?”
“글쎄요. 생각나면 그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아직 조금 혼란스러워서.”
“그래. 그래도 좋다. 내 기다리고 있도록 하지.”
행장님은 싱긋 웃은 다음 가만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인사부의 밀라 레브리에 대리도 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지? 찾아가 보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아. 옆방이라, 바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아까 사실 간호사분 통해 확인했는데 아직 자고 있다고 들어서.”
“그렇군.”
아주 잠깐이었지만 피식 웃는 그 모습은 여신보다는 정겨운 술친구처럼 느껴졌다.
“여자를 오래 기다리게 하면 좋지 않아. 방금 일어났을 테니 바로 가 보게.”
“어떻게 아신 거예요?”
“신이니까.”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작별을 고한 다음 병실을 나섰다.
“…밀라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녀석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런 과격한 일은 벌이지 못했을 거다.
밀라를 데려갔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조져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발상까지 하고 말았으니까.
“녀석에게도 말해야겠지.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는 이야기랑, 다른 중요한 이야기도.
나는 곧바로 밀라의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