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6화
“훌륭하군요. 마음에 듭니다.”
이름 없는 악마의 하수인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또 한 장의 계약서를 내게 내밀었다.
정확히 방금 전 서명을 마친 계약서와 똑같은 내용이 인쇄된 종이.
나는 거기에도 똑같이 이름 세 글자를 사인한 다음 간인 대신 두 장의 계약서를 맞붙이고 그 중앙에도 이름을 적었다.
악마의 대행자 역시 자신의 주인 되는 악마의 엄지손가락에 피를 묻혀 두 번 더 꾹 찍었다.
계약의 완성.
허공에 나타난 새까만 글자가 체결을 알렸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는 악마의 힘에 의한 계약의 공증.
이로써 나는 계약의 효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쪽 역시 ‘안전책’을 간구해야겠지.
“신들의 이름으로 계약의 공증을 선언한다.”
-파앗
내가 말을 마친 순간 허공에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환한 빛무리가 알아볼 수 없는 오래된 글자를 그렸다.
“…무슨 짓이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악마의 대행자가 황급히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뭐긴. 계약을 더욱 공고히 했을 뿐이야.”
내가 방금 읊은 것은 신언이었다.
내 오른쪽 눈을 담보로 저당 잡고 신들에게서 대출해 온 것 중엔 그들의 힘과 권능도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필요할 때 소량을 빌려오는 계약.
그게 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악마의 타깃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완전히 가져오진 못했다.
통째로 빌려와 봤자 인간인 나의 몸이 그 힘을 온전히 버틸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었고.
-투둑
실제로 내 양쪽 눈은 피눈물을 흘리는 중이었다.
방금 사용한 신언의 후유증이다.
예전에 세계수 뿌리에서 정령을 대정령으로 진화시킬 땐 은행장이 펜으로 적은 걸 그냥 읊었을 뿐이어서 후유증이 없다시피 했지만 이번엔 내 의지로 짜낸 단어를 내 입으로 읊은 탓에 빌려온 권능이 몸에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신의 권능으로 금방 회복했기에 뇌가 손상되는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전에 올림포스에서 사용법과 주의점을 간략하게 아폴론 신에게 렉쳐받았으니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거였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그대로 뇌에 부하가 심하게 걸려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꿍꿍이속이 있었다 이거군요.”
“헛소리하지 말고 약속이나 지켜. 밀라를 내놔.”
“칫.”
놈은 한 번 혀를 찬 다음 손가락을 튕겼다.
다음 순간, 밀라를 묶고 있던 무형의 힘과 그녀가 앉아 있던 소파가 동시에 사라졌다.
-털썩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밀라의 몸을 지탱하자 사라진 안대 너머에 있던 감긴 두 눈이 보였다.
다행이다. 이로써 밀라를 무사히 병원으로 데려갈 수 있게 되었다.
“이쪽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제 김지안 대리 차례입니다.”
놈은 밀라를 부축하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말했다.
이쪽이 품은 의도를 지독할 정도로 경계하는 분위기.
나는 망설이는 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놈과 마주 보았다.
“가져가.”
“…의외로 담담하시군요. 보통은 다들 애원하던데.”
“이제 와서 겁이라도 먹으라고?”
내가 말하자 놈은 싱긋 웃더니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왼손을 뻗었다.
-콰악!
-카드득!
-으적!
끔찍한 소리와 함께 시신경이 뜯겨나가며 격통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끄아아아악…!”
어떻게든 빌려온 권능을 끌어올려 상처에 집중하자 손상된 부위에서 흐르던 피가 멎었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권능의 후유증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잔머리를 좀 굴린 모양이군요. 그래요. 산 채로 눈이 뜯기면 쇼크사할지도 모르니까요. 하도 자신감이 넘치길래 뭔가 준비해 온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고통에 버틸 수단 말곤 별거 없던 모양이군요. 보나 마나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의 여동생에게 간단한 권능이라도 빌렸겠군요.”
“…어. 비슷해.”
나는 한 손으로 텅 빈 오른쪽 안와를 가리고 대답했다.
-꿈틀
피를 토해내던 혈관이 권능에 의해 순식간에 봉합되며 안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신의 눈이 아닌, 정말로 내 유전자만이 담겨 있고 별 특이한 권능 따위 존재하지 않는 진짜 나의 눈.
-투둑
마지막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고 안구가 완벽하게 재생되었지만 표면에 묻은 피 때문에 시야가 여전히 흐릿했다.
놈에게 눈이 재생된 사실을 알려 주었다간 힌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그대로 눈을 가리고 말을 이었다.
“그 눈으로 이제 뭘 할 생각이지?”
“이게 얼마나 귀한 물건인진 디스파테르 행장에게 진즉에 들은 줄 알았는데, 혹시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까? 당신은. 방금 당신이 넘긴 이 안구로 인해 차원신용금고는 파멸에 이르고 말 텐데요.”
놈은 사랑스러운 보물이라도 지키는 것처럼 얼음으로 안구를 감싸고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이제 이 눈을 제 몸에 이식하면 부의 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가능성을 살피는 궁극의 권능이, 그 안력이 제 손에 들어올 겁니다. 모든 피조물이 지닌 잠재력을 살펴 제 밑에서 오롯이 그 능력을 펼치게 하는 겁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 세계의 전부를 약탈할 겁니다.”
놈은 벌써 세상의 지배자라도 된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물을 오시하는 듯한 태도. 저 기쁨에 겨운 얼굴이 언제 무너질지 상상하고 있자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어.”
나는 차분하게 놈을 주시하며 말했다.
“하아. 고작 대리 나부랭이가 뭘 알겠습니까. 이런 보물을 지니고 있는데도 그 가능성을 하나도 활용하지 못했던 주제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안구, 네 게 아니라고.”
“그쪽이야말로 계속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군요. 원래 주인은 다를지 몰라도 이젠 제 것이 맞습니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 정도 교만해야 악마의 대행자니 뭐니 불릴 수 있는 거겠지.
놈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저 불쌍한 놈의 운명을 가엾게 여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뭐, 좋아. 어차피 금방 알게 될 거니까.”
“…재밌는 인간이군요, 당신.”
언젠 자신이 인간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축객령을 내렸다.
놈은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허공에 새까만 구멍을 뚫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고, 채 2초도 지나지 않아 출장소 2층 상담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끝난 건가.”
그제야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놈이 끝까지 내가 설계한 함정을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이다.
생각보다 김빠지는 결말이었지만 그래도 뭐, 당장 놈이 계략을 눈치채고 내 심장을 꿰뚫지 않은 게 어디인가.
살아남으면 된 거지….
* * *
허수 세계에 기거하는 탐욕의 악마의 뜻과 힘을 범차원 세계에서 펼치는 악마의 대행인.
그는 마침내 손에 넣은 부의 여신의 안구를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안구는 김지안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거기에 깃든 ‘눈이라는 개념’은 틀림없이 여신의 것.
피조물의 모든 잠재력을 살펴보고 그 미래를 점칠 수 있는 힘이 이 눈에는 담겨 있었다.
얼음을 녹이고, 안구를 교체하기만 하면 자신을 배척하고 추방한 신들과 세상에 복수할 수 있다.
마침내 다가온 수탈의 시간.
이날을 위해 악마와 계약을 맺고 수백 년을 기다려 왔다.
실적을 높이기 위해 저지른 몇 가지 규정 위반으로 인해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말도 안 되는 형벌을 받았으니 이젠 그 부조리한 처우를 세상에게 돌려줄 차례다.
“하하하하하…!!!!”
은신처가 떠나가라 웃은 악마의 대행자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뜯어내고 피가 흥건한 손으로 얼음을 녹여 거래를 통해 얻은 안구를 꺼냈다.
-콰득!
텅 빈 안와에 안구를 끼워 넣고 악마의 권능으로 혈관과 신경을 이어 붙였다.
혈액형이고 나발이고 이미 인간의 몸을 버린 그에게 있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합당한 거래를 통해 얻은 여신의 눈.
그 권능이 뇌와 완벽하게 이어지기만 하면 된다.
…이어지면, 되는 거였는데.
“……?!”
다음 순간, 악마의 대행자의 배후에 흐릿한 형상이 나타났다.
그의 섬김을 받고 모든 충성을 바치는 대상인 탐욕의 악마가 무리할 정도의 힘을 사용해 허수 공간에 갇힌 본신의 일부를 드러낸 것이다.
“주인님, 어째서 이곳에…!”
당황한 나머지 무릎을 꿇는 것도 잊은 대행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지배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끓어오르는 어두운 기운. 악마는 분노하고 있었다.
“으윽…!!!”
오직 대행자의 뇌에만 울리는 거대한 고함 소리.
그 원인을 이해하게 된 건 3초 후의 일이었다.
“권능을… 사용할 수 없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여신의 눈이 틀림없었을 텐데.
게다가 거래를 통해 정당한 방법으로 얻어오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눈에 담긴 권능 또한 전부 사용할 수 있어야 마땅한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패닉을 일으킨 것도 잠시.
해답은 이내 악마와 그 대행자의 눈앞에 나타났다.
-파츠츳
<계약에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거래의 대가로 제공된 안구는 이미 담보 대출 계약의 담보로 저당 잡혀 있습니다.>
<안구에 관한 모든 권리는 대출이 상환될 때까지 채권자 하데스, 포세이돈, 아폴론, 플루토 디스파테르가 보유하고 있습니다.>
<채권자의 요청에 의해 담보물이 채권자가 지정한 장소로 전송됩니다.>
허공에 아로새겨진 황금빛 글자가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친절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이런 미친.”
대행자는 깨달았다. 자신이 은행원, 김지안 대리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만일 자신과 자신이 섬기는 악마가 범차원 세계에 거주하는 평범한 피조물이었다면 얼마든지 경찰을 찾아가 피해 사실을 호소하고 김지안 대리를 고소 고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악마는 계약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 그 권능으로 인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대행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본질은 계약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는 것이기에, 수탈을 반복할수록 그 권능과 존재의 힘이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헌데, 역으로 사기 등의 수단으로 계약을 통해 무언가를 빼앗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무언가를 빼앗아야만 살아남는 존재가 지닌 것을 남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즉 존재 이유와 존재 목적에 반하는 일이다.
개념으로 존재하는 정보 생명체인 악마에게 있어 존재의 부정은 곧 자살과도 같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악마라는 강대한 생명체의 숨통을 끊는 유일한 방법.
그것을 고작 평범한 인간인 김지안이 해낸 것이다.
“아, 안 돼…!”
뒤늦게 절망한 표정을 지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한 대행자였지만 세계를 지탱하는 법칙은 어김없이 그 심판을 악마와 대행자의 머리 위에 쏟아 냈다.
-콰앙!!
다음 순간, 거대한 폭발이 대행자 외에 생명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버려진 차원의 반경 50km 범위를 휩쓸었다.
악마와 대행자는 완전히 절명.
인간이 악마에게 승리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