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7화

“플루토 씨, 아무도 안 데려가도 돼?”

왠지 모르게 날 바라보는 플루토의 눈에서 광기가 엿보여서 잠깐 존댓말을 쓸 뻔했다.

“내가 왜?”

“엘라마 소장님이 뭐라 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정신줄을 잡고 다시 물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소장님이어도 싱글인 여성한테 남자 데려오라고 윽박지를 정도로 용감하진 않을걸?”

“아….”

듣고 보니 납득이 갔다.

사회적으로 보통 남자한테 시사회든 파티든 갈 때 이성 파트너를 데려오라고는 나름 쉽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지만 여성에게 그런 말을 했다간 매장당하기 딱 좋지.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찌르면 인사고과에 충분히 반영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특히 이 경우는 플루토가 보복당해도 잃을 게 없는 비정규직 창구 상담사.

동시에, 플루토는 은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를 친언니로 두고 있는 여신이기도 하다.

반면 엘라마는 어떤가.

그는 잘나가는 전략 점포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소장일 뿐만이 아니라 차원신용금고에서 최연소로 차장을 달고 활약 중인 구 디스파테르 신용금고 파벌의 실세이자 에이스이기도 하다.

게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 미인인 사모님도 있고.

잃을 게 많은 사람이 플루토에게 남자 안 데려온다고 뭐라 하는, 자살행위와 비슷한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

“헤헷.”

다만, 이런 말을 늘어놓으면서 플루토가 해맑게 웃는 건 좀 무섭긴 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속에 여우든 구렁이든 수십 마리는 들어 있을 것 같다.

역시 살아온 시간이 평범한 인간인 나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근데, 대리님 하나 오해하고 있는 게 있어.”

“응?”

“나 아무도 안 데려간다곤 말한 적 없는데.”

“아.”

듣고 보니 그렇다.

플루토는 단지 엘라마가 자신에게 뭐라 따지지 못할 거라고 말했을 뿐, 파트너 없이 시사회에 혼자 참석하겠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를 데려온다는 뜻인데.

“플루토 씨 남친 데려오는 거야?”

“그런 거 안 키워. 나 신이야, 대리님. 정신 차리라고.”

“혹시 방금 굉장히 실례되는 발언이었어? 신성 모독 같은 거.”

“응!”

아니 웃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여신이라는 작자가.

당장 천장이 무너지든 바닥이 꺼지든 천벌이 내 머리 위에 쏟아질 거 같다니까….

“걱정 마. 안 잡아먹어.”

“진짜?”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걸 보고 플루토가 다시 한번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근데 있잖아, 내가 데려오는 사람 대리님이랑 아는 사이다?”

“오오.”

플루토 씨는 외모만 보면 나보다 한창 어리다. 밀라가 동안인 걸 생각하면 밀라 말고 이로울보다 어려 보이는… 아, 이로울도 오래 사는 종족이었지. 어떻게 이건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렵네.

그냥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스물셋 정도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 나이의 남자라면 아마 나보다 1년 후배인 공채 행원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용케도 남자를 만나고 다닌 모양이다.

아니, 잠깐. 후배 공채 행원이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럼 대체 누구지.

당장 그 사람이 지금 근처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후리텐 본토나 전혀 다른 곳에 산다는 뜻일 터.

아, 그럼 아예 공채 행원이 아니라 그냥 은행이랑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일지도?

근데, 그런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사이인 사람이 있다고?

“잠깐. 플루토 씨. 설마 고객을 데려오는 건 아니지?”

“고객? 아하하. 내가 왜.”

아니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었잖아. 미친 사람 보는 것처럼 쳐다보지 말라니까.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음….”

그럼 대체 누구지. 고객이 아닌 사람인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진짜 신기하네. 안 그래도 평소 분신 만들어서 업무 처리하는 것만 봐도 경이로웠는데. 플루토 씨 본인이랑 분신들이 일하는 동안 다른 분신들이 밖으로 놀러 다니거나 사람 만나고 다니고 그러는 거야?”

“응. 아무래도 남들보다 업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잖아? 스트레스받자마자 다른 분신들이 그걸 풀고 다니는 거지. 분신 A는 창구에서 업무 보고 분신 K는 같은 시간에 영화관에서 신작 감상하며 팝콘 먹고 분신 L이 집에서 게임하고 있는, 그런 느낌.”

어쩐지.

이제야 왜 플루토가 스트레스로 인해 앓아눕는 일 없이 멀쩡히 업무를 소화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점심시간 때였나, 플루토 씨가 분신을 늘려 사복 차림으로 밖으로 내보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평소부터 저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양의 업무를 창구 여러 곳에서 분신을 활용해 처리하는 걸 보고 저 사람은 대체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는 건가 궁금했는데, 밖으로 분신 내보내는 게 놀러 가라고 저러는 거였구나.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닌 신 다운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 말은, 플루토 씨는 평소 분신들이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전부 기억한다는 거네?”

“맞아. 정확히는, 분신이 해제되며 마력이 다시 본체에 돌아올 때 알게 되는 거지만.”

“편리한 능력이네.”

“편하긴 한데 잘못 쓰면 스트레스로 정신병 오니까 조심해야 해.”

처음이었다. 플루토와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 건.

그냥 자기 자신을 여러 명 만들어서 편하게 사는 줄 알았더니 플루토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 힘을 신화시대부터 지니고 있어서 계속 사용해 왔으니 이미 어느 정도 도가 텄겠지.

나도 저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업무가 한결 수월해졌을 텐데 말이다.

어찌 보면 궁극의 멀티 태스킹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아무튼 기대하고 있어.”

“근데 솔직히 내가 왜 플루토 씨 누구 데려오는지 신경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

“와. 너무 솔직한데 그건. 상처받을지도.”

“아 지랄 말고 좀.”

단순히 나랑 아는 사람을 데려온다길래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더 이어 갈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와 밀라야 그냥 동기니까 같이 가는 건데 플루토 씨는 정말 연인을 데려오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남의 연애 사정, 특히 당사자가 사람이 아닌 초월자라면 더더욱 흥미가 사라진다.

당장 연예인들 결혼 소식만 봐도 아무런 호기심도 들지 않는데 여신의 연애사엔 더더욱 관심이 생길 리 만무하다.

“됐어. 혼자 놀 거야. 흥.”

플루토는 이내 폴짝폴짝 사슴처럼 작은 키에 비해 긴 다리로 전자 담배 코너로 뛰어갔다.

“여신도 담배 피우는구나.”

이거 하나만큼은 조금 신기해서 기억해 두기로 했다.

사실, 지금 플루토보다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오늘은 평소보다 구름이 높네요. 북쪽에서 귀한 분을 보겠어요.”

“…내가 린딘에서 시사회에 참석한다는 얘기, 안 했었나?”

“아. 잊고 있었습니다.”

멍한 얼굴의 리저드맨 여성과 함께 앉아 어질어질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이작이었다.

“교제 중인 여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었는데.”

두 과장과 엘라마가 각자 자신의 가족인지 파트너인지 신경 쓰느라 다른 데를 보는 사이 아이작과 그의 연인으로 보이는 여성은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여성은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듯한 인상이었다.

리저드맨 특유의 날카로움이 전혀 보이지 않는 포근해 보이는 인상에 눈은 온순하다.

아이작과 나누던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는 여성인 듯했다.

왼손 약지에 각자 반지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이 아닌 커플은 확실한데.

아이작은 여태껏 내게 여자친구 같은 건 사귄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이 나와 같은 모쏠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이작이 여자에게 무어라 말한 다음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에게 걸어가 보폭을 맞추고 이동하며 물었다.

“너 여친 사귄 적 없다며. 저 사람은 어떻게 된 건데.”

“…여자친구는 아니다.”

“뭐?”

그럼 대체 무슨 관계지.

설마 입에 담기도 좀 그런 관계라든지.

내 표정이 미묘해진 걸 보고 아이작이 변명하듯 말했다.

“…약혼자다. 가문 어르신들이 어릴 적부터 정해 둔.”

“헐….”

이 새끼 기만자였네.

“잠깐, 키키와이 살아 저 사람?”

“아니. 평소 린딘에서 지낸다.”

“그럼 네 약혼자는 너 만나서 같이 전용기 타고 린딘으로 돌아가겠다고 굳이 키키와이까지 한 번 온 거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올 땐 자기 집안의 프라이빗 제트를 타고 왔다.”

“…….”

이 무슨 지극정성인가.

집안 소유의 개인용 비행기가 있는데 자기 약혼자 기 살려 주겠답시고 일부러 키키와이까지 날아와 남의 전용기를 타고 린딘으로 같이 돌아가는 거라고? 손 꼭 잡고?

“와.”

부자들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연애하는지 참 궁금했는데 아예 어릴 적부터 자기 짝이 정해져 있어서 어디 헤매는 일도 없이 백년해로하게 되는 건가.

아니 아니.

이건 절대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아무리 부잣집이어도 요즘은 다들 자유연애 시킨다던데.

쟤네 집이 이상한 거다.

래리어트 가문이랑, 저기 보이는 영애네 집안이.

“몇 살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세 살.”

“어우.”

잠시 기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주위에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다.

마키나가 세 살이고(육체 연령이) 필로아가 다섯 살이니까 얼추 비슷하겠군.

이렇게 생각하니까 저번에 내가 했던 일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거나 아이들의 미래를 제약하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랑의 형태는 각자 다른 법이다.

저렇게 3세 유아 시절부터 둘이 꼭 손잡고 세상 풍파에 휩쓸리는 일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자란 커플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몇 살에 경험 인원수가 몇 명도 되지 않았다~ 따위의 헛소리로 남을 놀리거나 가스라이팅하는 연놈들이 상대를 자기 기준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끌어내리려고 헛수작 하려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암. 그래. 역시 딱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 한 명만 바라보고 평생 사는 게 진짜 행복이지.

남들이 나보고 유교 사상이 과하니 뭐니 지껄여도 이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평생 나만 보고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을 만나 알콩달콩하게.

“나중에 이것저것 물어봐도 돼?”

“사생활 침해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오케이. 고마워.”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정말로 본점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면 일 외에도 내가 앞으로 어떤 남자가 되어야 할지도 충분히 고려해 봐야겠다.

아이작을 화장실 앞까지 바래다준 다음 물을 마시고 엘라마와 합류해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그곳에선 으리으리한 소형 항공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메아이 해뷰어 어텐션.”

플랫 씨가 보내 준 전용기 좌석에 앉은 나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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