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6화
전용기 탑승 수속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쾌적했다.
평소 항공기 탑승할 때 거치는 바디 체크 등을 아예 일반 항공기랑 다른 공간에서 진행했는데 기나긴 대기열에 불편하게 낑겨 있을 필요 없이 그냥 거의 비어 있다 싶은 장소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면세 쇼핑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면세 쇼핑이라고 해 봤자 특채 동기들 줄 초콜릿이라든지 그런 거 말곤 살 게 없었지만.
밀라한테 향수나 그런 거라도 사다 줄까 잠시 고민해 봤지만 녀석의 취향을 모르는 데에다 괜히 이상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애초에, 녀석이 시간 내준 데에 고마워하는 의미로 맛있는 것도 사 주기로 이미 약속했지 않은가.
쓸데없을 정도로 과한 호의를 보일 필요는 없다.
내가 걔 남자친구도 아닌데, 뭘.
“…….”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괜찮은 술이나 한 병씩 사다 줘야겠네.”
이로울은 술 좋아하는데 잘 마시진 못한다.
밀라도 그보다 조금 주량이 센 정도.
그리고 과타노차는….
“두 병 사야겠네.”
일반적인 지성체와 전혀 다른 신체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녀석은 제대로 취하는 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알코올을 분해하는 장기의 기능이 엄청나게 발달되어 있거나 배출이 빠른 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면세점에서 술을 고르고 있었는데, 문득 서부 포독스 지점의 행원들도 이번 시사회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지점장님이랑 프레드 선배 것도 챙겨야겠네.”
둘 다 술을 아주 좋아한다.
그렇다고 서부 포독스 지점의 다른 행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나중에 욕먹을 것 같으니까 프레드 선배 통해서 단 거라도 싹 돌려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면세점에서 카드를 긁고 보니 짐의 크기가 상당했다.
“기내 반입, 이 정도는 다 들어가겠지….”
전세기니까 문제없을 거다.
탑승구도 따로 분리되어 있고 짐도 평범한 항공기처럼 머리 위에 두었다가 내릴 때 실수로 떨어뜨려 술병이 와장창 박살 나는 일도 없겠지.
“영화에서만 보던 건데, 이걸 실제로 해 보게 되네.”
솔직히 말해서 아직 항공기 내부를 구경하지 못해서인가, 영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차분히 앉아 시간표를 주시하는 아이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라면 어릴 적부터 전용기를 질리도록 타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이작은 누가 뭐래도 범차원 세계 굴지의 호텔 체인을 보유한 래리어트 가문 사람이다.
이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리저드맨이라면 틀림없이 익숙하겠지.
“…….”
전용기 타면 무슨 기분 드는지 물어볼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너무 내가 서민의 뇌로 모든 것을 판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 같은 평범한 월급쟁이에게나 특별한 경험이지, 아이작에겐 그냥 일상일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이작이라면 자기 비행기 가져와서 따로 오겠다고 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순순히 다들 하는 대로 따라와서 플랫 씨가 보내 준 전용기에 타겠다고 하는 걸 보니 역시 내 망상은 잘못되어 있던 모양이다.
이게 다 한국 드라마가 나쁜 거다.
재벌가 사람들을 무슨 사회성 없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악당처럼 묘사해 두니까 내가 이렇게 실물을 눈앞에 두고도 심각할 정도로 실례가 되는 상상을 하고 마는 게 아니겠나.
“하여튼 한국 드라마 작가들은 각성해야 해.”
드라마에서 재벌이나 대기업 욕하면서 시청률을 뽑는 걸 보면 참 개인적으로 마음이 착잡해지는 일이 많았다.
그야, 대기업은 때때로 이득을 위해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행동을 저지르곤 한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악한 본성이 반영된 결과이자 상당수의 사람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비열한 습성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결한 사람도 세상에는 많이 존재하고 기업이 이윤을 목적으로 코스트 삭감이란 명목을 내세워 끔찍한 일을 벌이는 걸 변호할 생각은 없다.
인간이 지닌 악한 본성과 힘을 가진 자리에서 그 본성을 스스럼없이 휘두르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도 자유라고 생각한다.
다만, 방송에서 이를 과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저지르고 사람들이 이를 보고 환호하는 걸 목격할 때마다 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괴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는 돈은 후원자인 대기업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즉, 시청률을 뽑기 위해 대기업을 성토하고 허수아비를 패는 드라마에 대기업이 출자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기업과 재벌가를 욕하면서도 주인공이 그 일원이 되어 시스템 안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얻는다.
어째서 자신이 그리도 싫어하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 그 안에서 존경받고 본인의 위치를 공고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걸까.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사실 이 역시 인간의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부러운 거야.’
‘재벌가를 악마화하려 하는 건 자신들이 그 일원이 아니어서 그런 거겠지.’
타자화와 편 가르기를 누구보다 잘하는 사람들의 성향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절대적인 기준이랄 게 존재하지 않으며 애매하기 그지없는 상대적 기준을 따라 더블 스탠드를 취하는 건 비단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사는 범차원 세계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장 아이작만 해도 대기업의 후계자가 한낱 은행 점포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벌써 신상과 이름, 신장, 추정 체중, 나이, 일하는 점포, 얼굴 사진까지 인터넷에 쫙 유포되어서 곤란을 겪은 게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번엔 아예 대놓고 손님인 척 아이작을 꼬시러 리저드맨 여성이 은행을 찾아온 적도 있었을 정도다.
또, 언제는 한번 래리어트 호텔에서 횡포를 부렸다가 출입 금지당한 고객이 보복한답시고 아이작을 찾아와 은행에서 대뜸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이건 내가 엘라마와 출장 가 있어서 직접 목격한 건 아니었지만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은 다음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진상 고객은 처음엔 아이작의 말투가 거슬린다며 은행에서 난동을 피웠는데 이내 경비원에게 제압당해 경찰에 넘겨졌다.
조사 과정에서 래리어트 호텔과 연관된 해묵은 원한에 의한 폭행이었다는데, 그다음 날에도 아이작은 뺨에 반창고를 붙이고 멀쩡한 얼굴로 출근했다.
이런 일이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걸 보니, 좋게도 나쁘게도 부자 역시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깊게 체감할 수 있었다.
저들은 단지 돈이 많을 뿐이지, 나와 똑같이 남들의 말에 기뻐하거나 상처를 입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트레스 해소의 선택지가 남들보다 조금 더 많다는 정도겠지.
물론 이것도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쨌든, 내 친구인 아이작이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단순히 돈 많은 집안의 자제라는 이유로 험한 일을 당하는 걸 보니 성질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부자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지만 녀석은 돈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연수원 시절부터 보아 와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작은 어째서 모든 것이 예비되고 닦인 길만 걸으면 되는 호텔 그룹 후계자의 인생을 고르지 않고 굳이 키키와이 출장소의 막내가 되어 뼈 빠지게 고생하고 있는 걸까.
“흠….”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근처에 있던 엘라마에게로 옮겨갔다.
“아빠. 나 저거….”
엘라마는 한참 아내와 딸을 데리고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었다.
전용기라 그런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어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조금.
다른 행원들 앞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저런 건진 모르겠지만 딸에게 초콜릿을 얇게 표면에 굳힌 딥 아이스크림을 건네는 슬리크 엘라마 차장의 얼굴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을 주는 민머리 미중년.
반면, 옆에 있는 사모님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미인이었는데 딸의 얼굴은 둘의 미모를 절반씩 물려받은 느낌이 들었다.
“…대단하네.”
가끔씩 까먹고 사는 사실이지만 저 사람 배우 집안 출신이었지.
요 며칠 업무에 시달리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엘라마가 과거 전통 연극에서 배역을 맡아 선보인 연기의 영상 같은 걸 집에 돌아가서 찾아봤다.
목적은 당연히 연기 별로라고 악플을 달기 위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왜 잘하는 건데.’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엘라마는 얼굴만이 아니라 연기력도 정점이었다.
영화가 아닌, 위치가 고정된 카메라가 낮은 화질로 찍은 영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에서 얼굴에 분칠한 엘라마는 무시무시한 박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니터를 통해 과거의 영상을 잠시 감상했을 뿐이었지만 나는 전율해 몇 번씩이나 그것을 돌려 보았다.
일찌감치 연기력으로 인정받아 전통 예능을 계승하는 그의 가문의 후계자로 점찍혔다는 사실이 충분히 납득이 갔다.
그저 내 머릿속엔, ‘대체 어째서일까’ 같은 의문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남들은 양아들이 되어서라도 아득바득 후리텐의 전통 예술을 익히고 유명해져 돈을 쓸어 담으려 하는 마당에, 엘라마는 약속된 장래를 내려놓고 은행원이 되었다.
이렇게 보니 아이작과 엘라마가 어딘가 닮아 보였다.
동시에, 아이작이 어째서 나보다 평소 엘라마에게 고분고분하게 구는지 이해가 갔다.
“아이작한테는 어쩌면 같은 길을 걷는 인생 선배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네.”
나야 처음부터 쥐뿔도 없는 사람이라 차원신용금고에서 나름 좋은 연봉 받으며 일하는 게 감지덕지고 행복하긴 하다만.
저 둘은 다르다.
엘라마와 아이작은 본래 지니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인 케이스다.
거기에 어떤 사정이 있는 건진 알 순 없지만 원래 없던 걸 얻는 것만큼 지니고 있던 걸 스스로 내려놓는 게 힘들 거란 사실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네.”
술이 들어가 있을 때라면, 어쩌면 이 얘길 꺼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은행원이 된 거냐고.
한 번쯤은 묻고 싶었으니 기회를 찾아보자.
오늘 저녁은 밀라와 먹을 거지만 내일 저녁은 다 같이 회식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엘라마도 가족이랑 있으니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평소보단 온건한 태도로 대답해 주겠지.
“다른 과장님들은, 음….”
저 둘은 나중에 생각해 보는 거로.
일단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무려 은행장의 친동생인데 점포에서 정규 행원도 아니고 비정규직인 창구 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플루토 디스파테르 여신님이긴 한데.
이건 내가 신들의 가족사에 관해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으니 질문을 삼가고 호기심을 억눌러야겠다.
“대리님 혼자 거기서 뭐 해?”
그때였다.
예고 없이 내 곁에 나타난 플루토가 검지로 내 볼을 푹 찌른 건.
“응?”
“문제 하나만 내도 돼?”
“어떤 거?”
“나 이번 시사회, 누구 데려가게?”
“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다른 과장은 물론 아이작도 한 명씩 여성을 데리고 왔는데 플루토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