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0화
다음 날, 나는 키키와이로 돌아갔다.
나머지는 마키나가 알아서 잘 해낼 거란 믿음이 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늦은 오후에 마키나에게서 몇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견례 진행 중입니다.>
“푸흡.”
주말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나는 웃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상견례래. 미친.”
절대로 둘 다 부모가 없는 아이인 걸 비웃을 정도로 내 인성이 썩은 건 아니다.
그저, 마키나 같은 어린아이가 상견례라는 단어를 쓰니까 흔히 말하는 꼬마 신랑처럼 보여 귀여웠을 뿐.
“지점장님 얼굴 펴신 것 좀 봐.”
내가 마키나가 보낸 몇 장의 기념사진을 보며 즐겁게 웃자 멀리서 놀고 있던 정령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같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규규거리며 우는 녀석들의 얼굴은 그 생김새가 그렇듯이 포근하고 사랑스러웠다.
“마키나랑 필로아는 좋겠네. 벌써 인생 승리자라서.”
저번에도 한 번 떠올린 일이었지만 나의 인생관과 연애관은 주위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최대한 적은 횟수의 연애로 평생의 반려를 만나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인생이라고, 옛날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어릴 적 고아원에서 지내본 경험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고아원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남녀가 버린 아이들이 득실댔고, 나와 띠동갑인 형과 누나들은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임신시키거나 임신해 돌아와서는 태아에게 몹쓸 짓을 하는 일이 잦았다.
누군가의 책임 없는 쾌락으로 인해 불행해진 아이들과 책임지지 못할 나이에 쾌락에 몸을 맡겨 인생을 조져 버린 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29년 동안 내가 이성 관계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데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사랑이든 뭐든 쉽게 믿을 수 없고 현실의 벽 앞에서 연인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본 탓에 나 자신조차 의심하게 된 것이다.
“이래서 어릴 적의 트라우마가 중요하다고 그러는 거구나.”
특히나 내 부모님은 날 버린 게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돌아가신지라, 불안정한 미래에 관해 걱정하는 버릇이 어릴 적부터 몸에 배었다.
“행복해 보여서 좋네. 마키나는.”
델 몬테 지점장님 부부와 필로아 사이에서 환하게 웃는 마키나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부러움과 질투가 동시에 끓어 올랐다.
나는 마키나가 행복하길 바라고 녀석이 성인이 된 다음 필로아와 평안한 가정을 이루길 바라고 있었지만 동시에 저렇게 어린아이들도 해내는 일을 못 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체념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언제가 되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냥, 자신이 잘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따뜻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말이다.
“하아….”
뭐, 사실 이런 것도 배부른 고민이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해야 그날 먹을 라면과 뜨거운 물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극도의 빈곤을 벗어나고 자아성취까지 어느 정도 가능해지니까 그다음 단계가 욕심나기 시작했다.
“욕심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나도 사람이다.
자꾸 더 좋은 것을 바라게 되는 마음은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어쩌면 본점 근무를 희망하고 있는 것도 정말로 더욱 많은 사람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 사회를 바꾸는 데에 은행원으로서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나 자신의 인정 욕구를 채우려는 의도가 강할지도 모르지.
“나도 날 모르겠네. 진짜로.”
내가 한탄하는 걸 바라보던 정령들이 배 위에 올라타 몸을 비벼 댔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일까.
그나마 녀석들의 존재가 오늘따라 적적하게 느껴지는 집에서 적잖은 위로가 되어 주고 있었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이 숙소는 혼자 살기 조금 넓은 것 같다.
연수원의 널찍한 2인실에서 아이작과 머물던 시절이 가끔은 그리워진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언제든 대화할 수 있는 말 상대가 있다는 부분이 말이다.
키키와이는 절대 땅값이 싼 지역이 아니다. 이곳은 휴양지고, 리조트고, 은퇴한 다음 집을 사서 눌러앉은 부자들이나 셀럽들의 별장이 넘쳐나는 곳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름 수도권에 위치한 서부 포독스에서 사용하던 숙소와 비교하면 키키와이에서 묵고 있는 독신 행원 숙소의 면적은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을 넓다고 느끼는 이유는 나 혼자 사는 공간에 이렇다 할 가구 배치도 없이 혼자 휑한 공간에 던져지는 기분을 이따금씩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지안이라는 사람이 있는 자리와, 내가 없는 공백.
그 두 가지만으로 이루어진 이 집에 바닷바람이 불어닥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사무치곤 했다.
그 공백을 견딜 수 있던 건 전적으로 여기 있는 자그마한 친구들 덕분이었다.
외로움이 뼈에 스며들 때마다 여기 보이는 정령들이 나를 위로해 주었고 해가 늦게 지는 키키와이의 밤을 같이 견뎌 주었다.
세계수 목재로 만든 스마트폰 케이스를 방에 둘 때마다 삭막한 방에 숲이 생겨나고 꽃이 피었다.
상록수와 단풍이 함께 지는 기묘한 광경을 보다 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곗바늘이 훅훅 지나가 있었다.
책상 위에 생겨난 작은 숲을 놀이터 삼아 뛰놀며 재롱을 부리는 정령들이 아니었다면 업무의 스트레스로 진즉에 미쳐 버렸거나 몇 번씩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을 터.
녀석들의 존재가 고마워서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고마워. 그래도 니들 덕에 내가 이렇게 잘살고 있다.”
내가 감사 인사를 건네자 네 정령이 손가락에 몰려들어 가볍게 그것을 깨물었다.
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지만 그것이 녀석들에게 있어 친근함을 표시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익히 경험해 온지라 나는 머리맡에 둔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열어 달달한 젤리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옴뇸뇸뇸뇸
정령들은 싱글벙글 눈웃음을 지으며 젤리를 얌전하게 갉아먹기 시작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녀석들과 함께 살면서 정신건강만이 아닌 몸 상태도 많이 좋아진 듯하다.
28세 전까지 공사판 노가다로 청춘을 소모한 대가로 여기저기 골병이 들었고 포독스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주기적으로 물리 치료를 받았었는데 정령들과 함께 산 이후로 어지간한 사건‧사고를 겪지 않은 이상 단 한 번도 병원에 간 적이 없었다.
잘은 몰라도 녀석들에게 신비한 힘이 있는 건 확실하겠지.
다만, 이런 식으로 같이 지내는 정령들의 존재에 감사를 표하고 만족감을 느낄 때마다 내 안의 공허함이 얼마나 깊은지 역시 의식하게 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직무권능은 행원의 개성이나 성격이 반영되기 쉽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김에 직무권능까지 생각이 닿았다.
직무권능은 차원신용금고의 모든 정식 행원에게 부여되는 힘으로 조각난 신의 권능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즉 우리가 지닌 능력은 전부 은행장인 오커스 디스파테르 여신에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신이 가진 전지전능한 힘의 조각을 일부 빌려서 행사하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행원마다 능력이 다른지 묻는 질문에 연수원의 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의 힘은 본래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행사하는 것이라, 그것이 사람에게 돌아갔을 때 사람이 신을 믿고 섬기는 방식이 모두 조금씩 다르듯이 조각난 권능에게도 빌린 자의 성향이 반영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닌 ‘타인의 잠재력과 감정을 보는 능력’이 어디에 뿌리를 둔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 몇 가지 가능성을 추론할 수 있었다.
첫 번째가 바로, 과거 나를 자주 괴롭히던 악몽이자 그림을 어쩔 수 없이 때려치우게 만든 그 꿈.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의 오른쪽 안구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다른 이의 눈알을 이식했다.
꿈속에서 겪은 고통이라 자세히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악몽을 본 내가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대는 탓에 집주인 아주머니가 자주 화를 냈던 기억이 있다.
그 꿈이 헛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계기는 저번에 세계수 담보 대출을 진행하기 위해 33차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신이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는 특별한 힘, 신언神言.
직무권능을 지닌 외엔 평범한 행원인 내가 그 힘을 행사하는 데에 성공했고, 어째서인지 당시 아직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사이였던 행장님이 굳이 메모에 신언을 직접 적어 엘라마 소장을 통해 내게 주었던 건 분명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체 뭘 믿고 신입 행원이 신언의 힘을 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단순히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이 신이라는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 의문이었다.
이를 두고 나는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애초에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은 당사자인 나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서류 심사를 멋대로 통과시키고 특채 면접을 보도록 유도했으니까.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심지어 아직 차원신용금고가 진출하지 않았고 범차원 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3-1차원 지구의 인간이 이종족이 우글대는 1금융권 은행에 면접 보러 온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게 가능했던 건 내가 모르는 걸 행장이 알고 있는 까닭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꾸어온 눈을 교체당하는 악몽이 어쩌면 실제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차원 세계로 건너와 일한 이래로 그림을 그리려 한 적은 없지만 예전처럼 누군가의 얼굴을 쳐다보며 특징을 살피려 했을 때 기묘한 두통이 덮쳐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게 이식된 다른 누군가의 눈이 정말로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아직 이 문제에 관해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어쩌면 내가 지닌 희소하고 강력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직무권능에 이 눈이 영향을 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나의 성격이다.
나는 예전부터 고아로 자라오던 탓에 맞고 다니지 않으려고 사람을 정확히 보는 법을 익혀 왔다.
눈치를 보는 이상으로 누군가의 인격과 됨됨이를 빠르게 파악하고 내게 해를 가하는 자를 피하고 무시하는 자를 감지해 최대한 손해를 보지 않도록 행동하는 건 내 주특기였다.
오죽하면 내가 잘된다고 예상한 친구들이 전부 한국 사회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 이들이 얼마나 좋은 위치에 있든 순식간에 나락을 갈까.
직무권능에 이러한 성격과 특기가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일리가 있지 않나 싶었다.
문제는, 직무권능의 발현에 첫 번째 이유가 관여하고 있을 경우인데.
“…술자리에서 만났을 때 상대가 행장님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물어봤을 텐데.”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선 역시 본점에서 일하며 기회를 노려보는 수밖에 없을 터.
“가야겠지?”
린딘에서 일할 이유가, 방금 하나 더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