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69화

마키나의 이야기는 한 시간 남짓 이어졌다.

자신이 누구의 손에 의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그리고는 어떤 과정을 거쳐 몸을 손에 넣고 전뇌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또한, 필로아가 모르는 사이에 가공할 만한 연산력을 갖고 최근 벌어진 아비아노 공화국과 바리타스 제국의 전쟁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요점만을 간결하게 추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필로아가 울음을 터뜨리는 탓에 마키나는 계속해서 그녀를 다독이며 위로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왜… 왜 계속 감추고 있던 거야….”

“그야, 필로아가 인공 지능에게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들었으니까요.”

“…….”

필로아가 분노하거나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보.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마키나를 싫어할 리 없잖아.”

그리고, 이어진 필로아의 한마디에 마키나는 그저 벙찐 얼굴로 가만히 굳어 있었다.

가장 듣고 싶었던 대답.

지금 필로아가 보이는 진솔한 얼굴에서 마키나가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추궁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

그 순간, 마키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이 모든 준비는 자신이 필로아에게 진실을 털어놓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용기를 비축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마도 필로아는 진즉에 마키나의 비밀을 듣고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마, 김지안 대리는 이것까지 전부 계산하고 있던 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와락, 필로아가 마키나를 껴안았다.

“나는 마키나가 기계든 뭐든 아무 상관 없어. 그냥 곁에만 있어 주면 돼.”

“…….”

일단, 필로아가 자신을 받아들여 준 이상 긴말은 필요 없다.

마키나 역시 필로아의 몸을 감싸 안았다.

두 아이는 현시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 도달했다.

* * *

마키나와 필로아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는 델 몬테 지점장님과 함께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김지안 대리. 마키나를 부탁하길 잘했군요.”

“와. 그 말 진심으로 하시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조금 놀랐다.

왜냐하면 저번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틀 정도 짧게 플랫 씨에게 연기 레슨을 부탁하기로 했을 때 델 몬테 지점장님과 사모님의 반응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진심입니다. 저번에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망설인 건, 괜히 마키나의 비밀이 여러 영화 관계자들에게 알려져서 그들의 작품에 ‘영감’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또, 마키나가 자동차에 치이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들었을 때 다치진 않을까 불안했거든요.”

“충분히 그럴 만하죠. 저도 정말로 치이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했으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좀 무서웠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저번 휴가 때 한국에서 가져온 여러 영상 자료를 본 참이어서 더더욱.

사극 촬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니 말 다리를 실제로 줄에 걸어 넘어뜨린다고 그러던데, 그 과정에서 말이 죽거나 죽는 것보다 더욱 끔찍한 고통을 겪어 안락사를 시킨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나른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저런 야만스러운 촬영 기법으로 낙마를 표현한다는 사실이 하도 기가 막혀서 매스터한트 감독에게 한탄한 적이 있었는데, 감독은 이를 두고 충분히 돈과 머리를 쓰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 얘길 하며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배우를 다치게 하는 일 없이 차에 치인 것처럼 간단히 연출하는지 알려 준 덕에 마키나가 정말로 차에 치이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하게 되었던가.

“뭐, 결국 마키나가 다친 곳은 고의로 찢은 팔뚝의 피부 말곤 없으니 다행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나저나, 아이들끼리 이야기가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잘될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시는 거죠?”

“필로아라는 아이, 마키나를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 제가 보기에도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사랑은 허다한 결점과 허물을 덮는 법입니다.”

“…뭔가 지점장님이 그런 말씀 하시니까 굉장히 낯선데요.”

“흠. 이래 봬도 유부남입니다.”

아, 맞네.

진짜 나 빼고 다들 연애든 결혼이든 하고 있구나.

괜히 얘기해서 손해 본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야기 잘 풀리는 걸 전제로 제가 저번에 말씀드린 건 고민해 보시겠어요?”

“그건… 아내랑 지금 대화 중입니다. 아내는 좋아하더군요. 필로아 양을 집에 들이면 정말 잘 돌봐줄 자신이 있다던데.”

“오오.”

그렇다. 나는 델 몬테 지점장 내외에게 필로아를 부탁하는 걸 생각해 보고 있었다.

마키나도 언제까지나 키키와이에 있을 게 아니니까.

이 기회에 필로아와 마키나가 같이 포독스로 이사 간다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마키나는 필로아의 개발자 커리어를 걱정하고 있었고 수도권으로 이주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 고려해, 마키나의 빈자리를 아쉬워하고 있는 지점장 부부에게 필로아를 맡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물론, 필로아 본인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하겠지만.

마키나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필로아가 델 몬테 부부의 집에 들어간다면 근처로 이사 갈 의향이 있다고 대답했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각각 외모만 보아선 세 살과 다섯 살이니 필로아와 마키나가 함께 살긴 어려울 것 같다 보니 내린 판단이었다.

이게 성사된다면, 그리고 마키나와 필로아의 관계가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다면.

필로아는 어릴 적부터 미래의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모양새가 된다.

아니, 어쩌면 필로아가 새로운 양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모양새가 될지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마키나는 두 사람의 양아들이 아닌, 델 몬테 지점장님이 단순히 신원을 보장해 주는 형태로 후리텐에 머물러 있는 거니까.

만일 이대로 잘 흘러간다면, 마키나는 미래에 필로아와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난민 신분이 아닌 후리텐의 국민으로서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려나?

그때부턴 마키나도 더는 사회적 신분에 구애받는 일 없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겠지.

그때까진 못해도 계속 차원신용금고에 근무하면서 두 아이들을 지켜봐야겠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어느 쪽이든 저 둘만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잘되겠죠. 그보다, 김지안 대리.”

“예?”

“아이들에 관한 것 말고도 저랑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다. 저번에 통화할 때 다른 얘기도 이것저것 했었지.

“본점에 가고 싶다지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네.”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배울 것도 많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업무 강도가 빡센 건 있어도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고요.”

“그렇다면 어째서 벌써….”

“음. 당장 옮기겠다는 건 아니에요. 애초에 그럴 수도 없고, 짬도 아직 차지 않았으니까요.”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거군요.”

“네.”

나는 감추는 일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거짓을 고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더 큰 안건들을 만져 보고 싶습니다. 다차원 출장소는 여러 차원에서 오는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본점의 기업여신부라면 정말로 저희 생활에 관계된 제품을 만드는 기업을 상대로 융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규모야 다차원 출장소에서 다루던 안건보다 작아질지는 몰라도 역시나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다차원 출장소를 거쳐 본점에 오는 건 말 그대로 엘리트 코스. 하루라도 빨리 더욱 좋은 기회를 잡고 싶다, 이건가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특수한 전략적 목적을 위해 설립된 혁신 점포에서 일하는 건 분명 좋은 경험이고 출세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다차원 출장소에 머무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건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작도, 비슈티 과장도, 라즈마 과장도, 엘라마 차장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창구 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행장님의 친동생인 플루토 씨 역시도 본점 근무나 정식 행원으로 입행하는 걸 고려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지점장님도 슬슬 임원 승진을 노리기 시작하지 않으신가 싶었는데.”

“…햇수로 따지면 슬슬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긴 합니다.”

“어쩌면 인사 시즌이 두어 번 지나가는 사이 본점에서 뵙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행장님과 이사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저도 김지안 대리도 알 수 없으니까요.”

지점장과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만일, 본점에서 뵙게 된다면. 그땐 여러모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저한테 청탁하려는 건 아니죠?”

“에이. 설마요. 그냥, 여러모로 눈치 보이는 곳이니까 한 분이라도 알고 지내던 분과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안 본 사이에 부쩍 음흉해졌군요, 김지안 대리.”

“죄송합니다. 출장소 선배 행원들한테 이것저것 의도치 않게 배워 버린지라.”

내가 말하자 지점장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럴 만도 하죠. 구D의 엘라마 소장이라면 몰라도 구C의 라즈마 과장과 구E의 비슈티 과장은 말 그대로 파벌을 대표해서 기여도를 경쟁하러 온 괴물들이니까.”

“예전에 하셨던 말씀, 기억하시나요?”

“김지안 대리에게 파벌 항쟁을 막는 쿠션이 되어 달라고 했던 그것 말씀이신가요?”

“네.”

내가 말을 꺼내자 델 몬테 지점장의 표정이 한층 오묘해졌다.

아마도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략 예상한 모양이었다.

“막상 일하게 되니까 제 존재로 인해 무언가가 달라지는 건 없더군요. 비슈티 과장과 라즈마 과장은 늘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고요. 그래도, 뭐, 큰 안건을 수행할 땐 둘 다 서로 협조하는 분위기였습니다만.”

“…….”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파벌 경쟁의 최전선일 줄 알았던 출장소가 생각보다 평온한 걸 보고 저는 이곳에서 두 파벌 간에 작용하는 행내 정치 역학을 몸으로 느끼며 분위기를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 정작, 그 배운 내용을 실행에 옮겨야 하는 장소는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가 아니었던 겁니다.”

정답이었던 걸까, 델 몬테 지점장이 빙그레 웃었다.

“과연, 행장님이 직접 고른 인재답군요. 정확한 판단입니다.”

“역시….”

“두 파벌의 에이스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파악한 지금이라면 정말로 행장님이 원하시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군요.”

예상했던 대로였다.

델 몬테 지점장은 오커스 디스파테르가 숨겨 둔 심복이었다.

내가 왜 정식 행원이 되고 나서 서부 포독스 지점에 배치되었는지, 출장소로 떠나기 전 그가 술자리에서 어째서 파벌 경쟁에 관한 이야기를 잔뜩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본점에서 근무할 준비를 마친 모양이니 조만간 소식이 있을 겁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 두십쇼.”

“감사합니다.”

델 몬테 지점장은 눈웃음을 짓고 담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떠나는 그 뒷모습에선 어딘가 후련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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