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55화
마키나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진 건 오후 4시였다.
“이게 맞나….”
솔직히 말해서 조금 후회가 되는 참이었다.
내 일도 아니고 남의 연애사에 이런 식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게 과연 옳은 행동일까.
괜히 시누이 짓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될 따름이었다.
“으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외엔 답이 없는 것 같다.
마키나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슈퍼 인공 지능이고 어지간한 힘으로는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한 슈-퍼 고출력 인공 육체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 외견은 3세 유아고 영혼 역시 태어난 지 채 반년이 되지 않았다.
즉, 법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마키나는 미성년자.
게다가 촉법소년. 아니, 아예 진짜 아기다.
여자고 나발이고 어른이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라는 뜻이다.
“걸리기만 해 봐라. 가만 안 둔다.”
어쩌면 상대는 대외적 신분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어린아이를 상대로 자신의 파렴치한 욕망을 채우려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건 제대로 된 어른으로서 넘어갈 수 없다.
상대의 성별에 상관없이 가만두어선 안 되는 일.
“후…. 침착해야 하는데.”
일단, 내가 세운 계획은 이러하다.
1. 공원은 아니고 충분히 거리를 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도착 시간은 7시가 아닌 약속 시간 1시간 전인 저녁 6시.
2. 마키나에겐 잠시 볼일이 있어서 오늘은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미안하다고 연락한다.
3. 마키나는 솔직한 성격이라서 만날 예정인 여성에게 오늘 원래 따라올 예정이었던 사람이 있었지만 급한 용무로 인해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4. 멀리서 스텔스 모드를 켠 콜로서스를 보내 원격으로 채증을 마친다. 방심한 상대는 평소처럼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마키나와 대화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꼬리를 드러낼 것이다.
5. 만일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해선 안 되는 짓을 벌인다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 증거를 제출한다.
6. 여자가 경찰에 끌려가면 마키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쁜 어른이란 무엇인지 자세히 알려준다. 마키나는 두 번 다시 같은 일에 휘말려 피해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좋아. 완벽해.”
집에서 계획의 디테일을 다듬고 콜로서스의 충전을 마친 나는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마키나의 숙소에서 걸어서 500m가량 떨어진 공원이었다.
마키나가 혹시나 GPS를 탐지하거나 내게 연락하지 않도록 스마트폰은 굳이 갖고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가기 전에 오늘 약속 장소에 갈 수 없게 되었다고 메신저 앱으로 연락을 한 통 넣어 두었다.
나는 스마트폰 대신 콜로서스와 연동된 태블릿 PC를 들고 가까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콜로서스, 스텔스 모드 온.”
<은밀 기동을 개시합니다.>
콜로서스는 내 명령을 따라 기체 표면에 광학 미채를 둘렀다.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고 전자파 감지 등의 수단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완벽에 가까운 잠입.
저번엔 리베르토티의 격납고에 들어갈 때 사용했는데 설마 사적인 이유로 이 기능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노이의 우수한 과학력을 이런 방식으로 활용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이것도 전부 어린 새싹이 추악한 어른의 욕심에 물들지 않게 만들기 위한 행동이다.
협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어찌 사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른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을 직접 보고도 아무 행동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마키나는 물론 델 몬테 지점장님 부부에게도 면목이 없다.
마키나를 부탁받은 사람으로서 나는 후견인까진 아니더라도 녀석이 나쁜 어른에게 속는 불상사를 방지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냐….”
<릴렉스에 도움이 되는 음악을 재생하겠습니다.>
“하지 마.”
하여튼, 인공 지능이 뛰어난 건 알겠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게 문제다.
콜로서스의 인공 지능도 무지막지하게 뛰어난데 그런 건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마키나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스럽지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애초에 영혼의 유무만 생각해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집중해야만 한다. 마키나를 악의 손에서 구해 내기 위해선 완벽하게 증거를 모아 상대가 오리발을 내밀지 못하도록 만들어야만 하니까.
“콜로서스, 감청 준비.”
<지향성 감청 장비 상시 가동 중.>
왠지 모르게 내 직업이 은행원이 아니라 스파이가 된 기분이다.
저번에 아비아노와 바리타스 제국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이것저것 암약한 탓에 더욱 그런 기분이 드는 걸지도.
평일이 아닌 주말이라 그런지 그나마 본업이 아닌 다른 데에 신경 팔고 있다는 죄책감은 그나마 덜하다.
대의는 내게 있다.
걸리기만 해 봐라, 아동 성추행범.
아주 그냥 경찰 아저씨의 손을 빌려 팔목에 은팔찌를 철컹철컹해 줄 테니.
“살짝 쌀쌀하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6시 50분. 아무리 열대에 속하는 키키와이라고 하지만 밤에 부는 바닷바람은 똑같이 싸늘한 법이다.
미리 준비해 온 외투를 걸치고 의자에 앉아 7시가 되길 기다렸다.
55분 즈음 되었을 때, 마침내 마키나가 공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간식이라도 사 온 건지 깔끔한 디자인의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혼자 공원 중앙에 위치한 호숫가의 벤치에 앉은 마키나는 잠시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더니 바닥에 닿지 않는 앙증맞은 짧은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호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겉모습만 봐선 평범한 세 살 꼬마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
아무리 생각해도 저 모습에 이성으로서 흥미를 느끼는 건 마키나와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 아니면 변태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증거를 잡아야 하는 상대는 후자.
방심은 용납되지 않는다. 위험한 범죄자는 무조건 이번 기회에 채증을 마치고 접근 금지 명령을 받게 하든 감옥으로 보내든 어떻게든 조져 버려야만 한다.
“후우….”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콜로서스가 마키나의 방향으로 접근하는 인영 몇몇을 포착했다.
그중 한 명, 젊은 여자가 섞여 있었다.
밤 산책을 나온 듯한 복장.
그녀는 하반신의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레깅스와 크롭티를 입은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만일 아무것도 모르고 거리에서 마주쳤다면 한 번쯤은 쳐다볼 법한 미녀.
하지만 어쩌면 저 여인이 마키나를 꼬드기려 한 괴상한 욕구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최대한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콜로서스의 카메라가 비춘 화면에 집중했다.
“으음, 대체 누구지.”
여고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하나. 기혼 여성으로 보이는 반지 낀 여성도 있다.
마키나의 근처를 돌아다니는 후보는 모두 셋.
범인이 미성년자라면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해 봤자 훈방 조치 받고 끝날 것 같은데, 학교에 직접 찔러야 하려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마키나가 앉은 벤치로 다가가 폴짝 뛰어올라 인공 지능의 곁에 앉았다.
<조금 늦었지?>
그 인물의 정체는.
“…잉?”
뜻밖에도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 * *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네….”
화면을 통해 한동안 두 꼬마가 대화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내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걱정했던 것처럼 마키나와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던 건 성인 여성이 아니었다.
상대는 어디까지나 육체 연령이 기준이지만 마키나보다 두 살가량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았을 법한 꼬마는 들고 온 등나무 바구니에서 샌드위치와 노트북을 꺼내더니 마키나가 가져온 백화점 지하 매장에서 파는 비싼 주먹밥과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어린아이답지 않은 지적이고 날카로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인생 2회차, 혹은 세상 혼자 다 살아 본 듯한 노련한 눈빛.
아이는 마키나와 이야기하는 틈틈이 노트북을 꺼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타이핑을 했는데 마키나가 말한 코딩에 능하다는 건 아마 저 얘기가 아닐까 싶었다.
“엿듣는 건 좀 그렇겠지…?”
마키나가 좋아하는 상대가 아동 성추행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부터 나는 콜로서스의 감청 기능을 Off로 돌려 두었다.
꼬맹이들끼리 시시콜콜 사는 이야기를 굳이 기계까지 써서 엿듣는 건 다 자란 어른이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고 느낀 까닭이었다.
차라리 직접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낫지.
무엇보다, 호기심을 자제할 수 없었다.
대체 저 꼬마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고작 5살밖에 안 된 주제에 어서 가정을 꾸리니 마니, 여성의 행복을 찾니 마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
솔직히 말해서 의심스러웠다.
그냥 둘이서 소꿉놀이하다 드라마 보고 따라 한 대사를 마키나가 듣고 오해한 게 아닐까 싶어서.
“그건 그거대로 문제인데….”
만일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나중에 마키나가 진실을 알게 된 다음 큰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어쩔 수 없군. 이럴 땐 역시 어른이 나서는 게 좋겠지.”
나는 콜로서스를 호출해 최대 속도로 집에 두고 온 스마트폰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초음속 가속 개시. 복귀까지 남은 시간 25초.>
-콰앙!
스텔스 모드를 해제한 콜로서스가 음속의 벽을 넘으며 일으킨 소닉 붐에 놀란 두 꼬맹이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다행히 들키진 않은 모양이었다.
“돌아올 땐 티 안 나게 조용히 복귀해도 돼.”
콜로서스는 이내 스마트폰을 들고 돌아왔고 나는 마키나에게 연락해 근처에 도착했는데 아직 공원에 있는지 물었다.
<네. 아직 대화 중입니다. 김지안 대리도 합류하시겠습니까?>
<좋지. 바로 갈게. 위치 알려 줘.>
<공원 중앙의 호수를 기준으로 동쪽 호숫가 한가운데의 벤치에 있습니다. 근처에 큰 당근 모양 조각상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콜로서스를 숙소로 돌려보낸 다음 차분한 얼굴로 두 아이의 앞에 나타났다.
반갑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마키나와 역시나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여자아이.
안경 안쪽에서 지적인 눈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호기심이 아닌 경계의 색을 담고 있었다.
‘신기하네, 진짜. 요즘 애들이 조숙한 건가.’
나는 아이들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눈높이를 맞췄다.
“안녕. 네가 마키나의 친구구나. 이야기 많이 들었어. 나는 김지안. 마키나의 삼촌이야.”
“…안녕하세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김지안 대리.”
누가 삼촌을 직급으로 부르냐.
뭐, 일단은 아이들의 관계가 소꿉놀이인지 진짜 애정인지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어. 대충 때우고 왔는데, 슬슬 춥지 않아? 근처에 카페 있으니까 셋이서 따뜻한 거라도 마실래?”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서 내려온 마키나.
여자아이 역시 작게 머리를 까딱이고는 노트북을 정리하고 그 뒤를 따랐다.